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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Jan 27. 2022

아직도 아파트는 싫다.

그럼에도 아파트를 찾아야 했다.

세 들어 산 지 어언 2년,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 약속이나 한 듯 남편과 나의 직장은 평택에서는 출퇴근이 불가능한 저 윗동네로 정해졌다. 남편의 이직이 이루어지자마자 남편의 새직장과는 반대 거리로 한참 내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는 나의 한줄기 삶의 낙인 도자기 공방을 접어야 하나 마나 하던 내게도 원래 나의 직군이던 회계 관련 직무로 3번째 러브콜이 왔고, 이번이 아니면 일할 기회는 영영 없어진다는 생각에 덜컥 잡 오퍼를 잡았다. [위쪽 지방의 하늘을 치솟는 물가에 남편의 직장 근처에서는 공방을 구할 생각도 못하던 찰나 투자금이나 벌어볼까... 하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논밭 위에 세워진 아파트에서 외로움을 견딘 지 2년이 지나니 슬슬 주변에 스타필드며 빌딩이며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제법 살만해졌는데 역시 뉴질랜드로 나간 이후부터 2-3년 만에 한 번씩 온 짐을 싸들고 돌아다녀야 하는 나의 역마살은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출퇴근 거리와 시간, 아이의 유치원에 위급상황 시 바로 출동할 수 있는 최단 거리 등 많은 변수들을 함께 어울러 최대한 잔머리를 굴려대며 정해진 장소는 하필 동탄이었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다가 엄마의 전화를 받고 들어가는 아이들의 연령은 보통 6-7세였다. "너는 몇 살이니?"라고 물으면 보통 "저 6살이요, 근데 저도 동생 있어요. 우리 동생도 3살인데." 아니면 "7살이요. 내년에 학교 가요."라던 애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기가 참 뭐처럼 맞물려서 평택 내에서는 어린이집에 자리가 1도 안 나던 시절에 옆 동네 안성으로 어린이집을 보낸 터라 자차로 항상 등 하원을 시켰고, 그런 터에 그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사적으로 친해질 시간이 별로 없었다. 엄마라도 좀 사회적이어서 동네 엄마들하고 꺄하호호하면서 즐겁게 지내면 동네 친구들이 많이 생겼을 텐데 이 어미는 지가 혼자 힘들다고 우울해하면서 자기 할 일 찾는다고 시간을 보낸 덕에 동네 엄마들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기껏 어린이집 근처에 사는 몇몇 엄마와 친하게 지내려고 시간을 보내봐도 이미 그 동네를 다 점령한 아이들 무리 틈에 내 아들은 주위를 겉돌았던 것 같았다.


물론 어려서 그럴 것이다. 이제 막 48 갤 다돼가는 아이가 무슨 그룹이 있으며 사회성이 있으랴. 하지만 이제부터는 정말로 환경에 따라 아이의 삶이 어느 정도 정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또래들과 동네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던 나의 어렸을 적 모습, 그리고 지금 동네 아파트의 아이들의 모습, 또 친구들 아이들이 다른 동 친구네 집에서 놀다 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나를 다시 아파트로 이끌었다.


내가 자란 동네는 아파트 촌을 아니었지만 그 빼곡한 주택촌에서 누가 어느 집에 살고, 뉘 집 엄마가 뉘 집 엄마를 알고 그랬었다. 동네애들이 같은 유치원을 가고 동네애들이 같은 학교를 다녔기에 하교 후 같이 놀다가 시간이 되면 집에 들어가고 했던 것 같다. 이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넓은 토지에 외딴집에서 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아들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빌라도 구하고 싶었는데 요새는 몸으로 움직일 거리도 차로 움직이는 시대에 아들이 차와 씨름을 벌이다 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결국에 답은 그나마 안전하고 어린이집 차도 데려다줄 수 있는 주거 밀집촌 아파트였다.




오늘만 해도 그 짧은 점심시간 안에 (물론 결과는 지각) 벌써 7채를 보았다. 어찌하면 다 다른 브랜드, 다른 동네, 다른 시공사인데도 구조 하나는 그렇게 통일되었는지. 어쩜 그렇게 자연과는 맞닿을 수 없게 탁탁 막혀있는 느낌인지. 살만은 한데 마음이 하나도 가지 않았다. 그나마 가격이 좀 괜찮아서 지나가던 길에 들러서 보겠다고 한 아파트가 탑층이었는데 천장에서 줄을 당기니 위에서 사다리가 등장을 하고 올라가니 서비스로 있는 다락방과 위 옥상을 전체를 우리 가족만이 쓸 수 있는 매물 하나가 잡혔다. 꼼꼼하고 깐깐하게 매물들을 체크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미 마음이 뺏겨 그렇게 수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물을 틀어보지도 않았다. 세입자가 있었음에도 궁금한 점 하나 생각을 못했다.


 Wiesbaden에서 남편이 결혼 전에 살던 집의 구조와 너무 닮았었다. 옥상 밖으로 나가 조명을 켜고 가끔 와인을 마시곤 했다. 그 밤공기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 추워지면 다시 방에 들어오곤 했다. 비가 오면 문을 열고 그 앞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힐링을 하곤 했다. 그나마 이 집에는 약간의 로망이 있는 듯했다. 내가 구할 수 있는 보증금을 넘어선 가격이었지만 집을 보고 나와서 부동산에 저녁까지 기다려달라 사정사정을 했다.


그나마 현실과 타협을 하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를 발견하고 나니 갑자기 비현실적인 자금을 구해야 하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몰려와 방부제 가득해서 유통기한이 1년 정도 되는 치즈케이크를 우걱우걱 먹으며 글을 쓰고 있다.


고작 25평 아파트 하나가 6억이라니. 전세가 4억이라니. 월세가 150이라니.

흙도 없고 풀도 없고 빗소리도 들을 수 없는데 말이야.






#나혼자거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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