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그런 날

by 기빙트리


11월 첫째 주 일요일.

해가 짧아졌다는 말을 괜히 실감하게 되는 계절이다.
평소처럼 11시에 문을 열고, 커피머신 전원을 켜고, 첫 잔을 내렸다.

책방의 하루는 제법 카페 같은 소리로 시작된다.

에스프레소 추출 소리, 우유 스팀 소리, 은근한 진동. 그 소리들을 BGM 삼아, 뒤뜰에 도시락을 펴 놓았다.

일요일 초반은 대개 고요하니까.


막 한 수저 뜨려던 순간, 또렷한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중년의 커플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황급히 도시락을 접고 카운터 앞으로 나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첫 손님을 맞이하고 나니, 무언가 흐름이 바뀌었다.


이상했다.
늦은 오후가 다 되어 가도록, 책방에 사람들이 계속 채워졌다.
매일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가던 나였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첫 손님은 어반 스케치를 하시는 아마추어 화가 분들이었다.

두 분이 나란히 앉아 2시간이 넘도록 우리 책방을 그렸다.

진동하는 커피향과 책장 넘기는 소리 사이로,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잔잔히 섞였다.

창가의 빛, 나무 책장, 책방 중정의 모습이 한 장의 그림 안에 담겨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순간, 그들이 말했다.
“12월 전시 끝나면, 이 그림은 책방에 기증해 드릴게요.”


너무 고마워서 “정말요?”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 말은, 손님이 남기고 간, 그림 한 장 이상의 의미였다.


오후 3시를 넘기자, 이번에는 9명 정도 되는 무리가 뒤뜰로 들어왔다.
또 다른 그림 모임이었다.


뒤뜰 의자와 테이블이 금새 채워지고, 화구들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오늘은 책방과 중정 그리고 이 골목이 ‘모델’이 되는 날인가 보다.

중정 사월의 창가모습. 오월방의 모습, 그리고 책방 전면풍경까지 각자의 시선이 그림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가끔은 이런 날들이 있어야, 내가 붙잡고 있는 이 일이 헛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평소 무덤덤이 기본값인 내 얼굴에도, 모르게 뿌듯함이 번졌다.


해가 짧아져서 4시만 넘어도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그 시간에도 책방은 여전히 나만의 조용한 아지트가 아니었다.
그게 오늘은 좋았다.


이 공간을 나만 알고 싶은 마음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오래 서성이다가,

결국 뒤뜰에 이름을 하나 붙였다. ‘모드니’.
모든 이가 잠시 머물다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렌탈 플레이스 온라인에도 그 이름으로 올려두었다.


그런데, 오늘 또 하나의 이상한 일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웹사이트를 통해 예약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곧 웃음이 났다.
‘아, 누군가 어딘가에서 우리 공간을 또 보고 있구나.’
조금 복잡한 시스템마저 오늘만큼은 호의처럼 느껴졌다.


북적이고, 소란스럽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언젠가 한 번 갈게요” 하던 말들을 미루던 사람들이
마침내 약속을 지키러 찾아온 것만 같은 하루.


매일 그저 그런 날들 사이에서,
오늘은 분명히 그런 날이었다.


혼자 놀기의 달인이 잠시 자리를 내어주고,
사람들 틈에서 커피를 나르고, 컵을 정리하고,

그림이 되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날.


아마 이런 날이,
내가 책방을 계속 열어두는 이유중 하나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오래 기억하고 싶은 11월의 그런 날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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