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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한갈색 Aug 18. 2021

빈츠

 대학교를 졸업하고 갖게 된 나의 첫 작업실은 좁고 허름했지만 나름의 낭만이 있는 곳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3년간의 대학생활을 끝마치고 나는 예술을 하겠다며 작업실을 찾아 나섰다. 원래는 함께 꿈을 나누던 친구와 작업실을 공유할 계획이었지만 크고 작은 이유로 우리는 멀어지게 되었다. 내 잘못이 컸다. 졸업 후의 내 삶은 그리 쉽게는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상황을 적절히 원망했다. 그리고 과하지 않게 후회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나니 그제야 썩 올바른 정신이 되돌아왔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더 이상 어떤 행동을 취해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른 대안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작업실의 다양한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 탓에 함께 할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작업실을 공유할 인원을 구하던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고, 원만했던 관계 덕에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초콜릿 쿠키를 곁들여 먹을 때처럼 쓴 맛과 단 맛을 번갈아 느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영등포 공구상가 중심부 건물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비록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군데군데 낡아있던 곳이긴 했지만 크기와 위치가 나름 괜찮았다. 가성비가 오묘하게 좋았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햇빛이 은밀하게 잘 드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 점을 특히나 좋아했다. 화장실의 부재와 내부의 낡은 생김새는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하다고 해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뭐랄까, 공간이 가진 선천적인 재능 같은 것이다. 아마 나를 제외한 친구들도 비슷하게 생각했으리라. 우리는 각자의 적당한 선호로 그곳을 택했다.


 조촐한 이사가 끝나고 곧바로 첫 작업실에서의 생활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삶의 모든 모습이 그렇듯 처음과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한 친구는 모두에게 별 상의도 없이 무턱대고 떠나기도 했고, 나는 초반보다 많은 의지를 상실하기도 했다. 풍부했던 의지를 잃어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나마 매일같이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던 햇빛이 나의 몇 없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언제나 낮이 왔음을 알려주었던 희망찬 햇빛. 그것은 작업실의 벽채와 선반에 선명한 빛 자국을 남기며 영역을 점점 넓혀가다가, 갑작스레 좁아지면서 사라져 버리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따라 희망적인 사람이었다가도 아닌 사람이 되곤 하며 실낱같이 꿈을 연명했다.


 이따금 비가 잔뜩 내리던 날에는 작업실에 햇빛이 들지 않았는데, 나는 그때마다 작업실 입구 건너의 테라스 비슷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빈약한 나무 막대기들이 지붕 역할을 해주던 곳으로 우리 작업실의 또 다른 별미였다. 다른 친구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먼저 떠나버린 친구와 나만은 그 테라스 비슷한 곳을 특별히 여겼다. 풍경이라고는 지저분한 모텔촌과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상가들 뿐이었는데도 비가 오고 눈이 오면 그럴듯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특히 비가 매력적으로 내리는 날이면 그곳의 빗소리와 습도는 영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을 정도로 신비로운 곳이었다.


 비가 우수수 내릴 때 그곳에서 즐겼던 인스턴트커피는 정말이지 맛이 좋았다. 거기에 싸구려 과자 몇 봉지를 함께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었다. 내 자리에는 제철과일처럼 매번 다른 종류의 값싼 과자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빈츠가 잔뜩 마련되어 있었다. -빈츠는 커다란 동전처럼 생겨서는 초코가 절반 정도 묻어있는 과자다.- 아마도 "어린 시절에는 참 많이도 먹었었지, 근데 요즘은 도통 맛 본 기억이 없네." 하며 과자 할인점에서 한가득 사두었던 것 같다.


 나는 바람 없는 폭풍우가 내리치던 어느 날 신비로운 기운이 맴도는 테라스 비슷한 곳에서 빈츠와 인스턴트커피를 즐겼다. 언제나 인스턴트커피에 과자를 곁들였었지만, 그날은 정반대로 인스턴트커피를 과자에 곁들여 먹었다. 빈츠 한 봉지에 커피 두세 모금씩. 그때 먹었던 빈츠에서는 고귀한 맛이 나서 옆에 있던 인스턴트커피가 한없이 초라해지곤 했다.


 첫 작업실을 추억할 때마다 나는 그날의 빈츠를 우선적으로 떠올린다. 내 시간의 일부는 그때에 강력하게 얼어붙어있는 듯하다. 당장 집 앞 편의점으로 달려 나가 빈츠를 양껏 사서 그날을 재현해보자는 계획을 세워보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흉내 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떤 수를 써도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이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서 깨닫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그때 빈츠를 더 많이 사두고는 시간을 들여 더욱 열심히 먹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빈츠를 추억하는 일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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