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고민을 늘 하곤 했다. 재발을 자주 겪다 보니 병원에 한번 들어가면 일주일인데 회사에 눈치가 보였다. 진단을 받았을 때는 워낙 상태가 심각했기에 회사에서도 몸 상태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겠지 했을 것이다. 그 당시 병가보단 법적으로 쓸 수 있는 육아휴직을 썼다. 직장생활을 오래 할 생각에 병가로 이력이 남는 건 싫었다. 그리고 그때는 몸의 회복이 우선이기에 퇴원하고 나서도 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3개월을 휴직하고 복직했다. 그때부터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뭐라도 배우면 낫겠지 싶어 민간으로 운영되는 문화센터에 등록을 했다. 먼저 배운 것은 POP글씨였다. 글씨는 잘 못쓰지만 손글씨 쓰는 걸 좋아해서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분야다. 준비사항도 부담 없었다. 스케치북과 유성펜만 준비하면 된다.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그렇게 몇 개월 배우고 나니 다른 과목에도 눈이 갔다. 이번엔 리본아트다. 딸아이도 있으니 배우면 좋겠다 싶었다. 만들어서 팔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도 있었다. POP와는 달리 재료비가 들어갔다. 손재주가 없는데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따라 하니 예쁜 핀이 완성됐다. 어린 딸아이에게 갖다 주니 엄마가 만든 거 이쁘다며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리본아트를 배우는데 옆에서 예쁜 인형을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피부색과 비슷한 천을 바느질해 그 안에 솜을 넣었다. 그러면 사람 모습이 뚝딱. 예쁜 천을 골라 다시 바느질을 하면 인형이 입을 옷이 완성됐다. 컨츄리 인형 만들기 수업이었다. 완성된 인형의 모습에 반해 무작정 등록했다.
리본아트와 마찬가지로 재료비가 들어갔다. 바늘과 실은 기본이고, 옷을 만들 천들과 부자재들, 얼굴을 그려낼 펜들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인형이라 재료값이 더 비쌌다. 그래도 재밌었다. 거의 동시다발로 배우고 있었는데 배우면서도 어떻게 활용해볼까 고민은 늘 있었다. 단순히 취미로 시작했다기보단 추후 다른 일을 하고 싶기에 시작한 취미활동이었다. 다른 일을 하는데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전적으로 봐줄 사람이 없으니 아이들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했다. 그에 있어서 POP, 리본아트, 인형 만들기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집에서 만들어 팔면 되니 말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는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라는 직업을 염두에 두었다. 그랬기에 다양한 과목들을 이수하면 취업하는데 더 유리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 2년 만에 재발이 되었다. 충격이었다. 치료받고 좋아진지 이제 2년인데 또다시 아프게 되니 한동안 우울감을 크게 느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어린애들을 생각하니 이대로 또 주저앉을 순 없었다. 또다시 뭘 할까 싶었다. 배웠던 것들을 활용하기엔 아직 실력이 충분치 않았다. 그렇다고 더 열심히 하기엔 이미 내 흥미 밖에서 멀어져 버렸다. 배우는 것을 좋아해 이것저것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꾸준함이 없는 건가 자책도 해봤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누군가 새로운 것을 얘기하면 무언가를 하다가도 그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새로운 일이 더 좋아 보였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다 슈가 케이크를 알게 됐다. 말이 케이크이지 베이킹 능력은 그렇게 필요치 않고 슈가 공예만 알아도 충분했다. 이 일이라면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나중에 베이킹까지 배우면 금상첨화겠다 싶었다.
이전에 배웠던 것들과 달리 슈가 공예는 전문적인 학원에 등록을 해야 했다. 수강료가 꽤 비쌌다. 필요한 도구들이 있는데 그것마저 비쌌다. 슈가 공예는 유렵에서 넘어온 거라 도구들이 다 수입품들이었다. 2번째 재발을 했을 때도 병가로 회사에 휴가를 내지 않았다.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끝날 무렵엔 연월차 남은 휴가까지 다 써서 꽤 오래 쉴 수 있었다. 이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몸상태가 호전되고 나서 학원에 등록했다. 비싼 수강료는 그동안 조금씩 모아두었던 비상금을 털었다. 신랑에게 말하기 미안해 저렴하다고 얘기했었다.
휴직이 끝날 무렵 복직 후 근무 장소를 집과 먼 곳으로 발령이 날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대적인 인사이동이라고 얘긴 하지만 그건 핑계였다. 자꾸 휴직을 내는 직원이 못마땅한 것이다. 얼마든지 가까운 곳에 근무할 자리는 있었다. 신랑과 상의 끝에 이참에 회사를 관두기로 결심했다. 10년을 넘게 다닌 직장이었는데 아쉬웠지만 내 몸과 아이들이 우선이기에 결정한 일이었다. 마침 슈가 케이크 과정도 끝나고 이제 제대로 한번 해보자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때 받은 퇴직금 일부로 슈가 케이크 도구들을 해외 직거래로 사들였다. 비싼 도구들이기에 여유가 있을 때 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뒤로 8년이 흘렀다. 계획대로라면 그 당시 배웠던 것들 중에 하나라도 활용하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슈가 케이크는 이미 시장에서 빠진 지 오래다. 더 다양한 것들이 그 시장에 대체되었다. 문화센터에서 배웠던 것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POP보단 캘리그래피가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엔 아직까지 슈가공에 도구들과 POP에 관한 책자들, 수료증 등이 있다. 슈가공예는 비싼 도구들이라 수납함에 두어 부피가 크다. 이사 갈 때도 어쩌지 못하고 일단 가져왔었다. 그때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처분해도 됐었다. 하지만 비싼 도구 그것도 새 제품 들이라 돈이 아까웠다. 중고라도 팔고 싶었지만 이미 슈가 공예가 점점 비중을 작아지는 추세였다. 책자들도 마찬가지다. 책장 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어 처분해야 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배웠던 것들의 흔적들이 이제는 짐으로 남아버렸다. 무작정 버리기엔 돈이 아깝기도 했지만 신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배울 당시엔 ‘다 투자다. 이 정도 투자는 기본이지. 이거 배워서 나중에 일해 돈 많이 벌 거야’ 큰소리 뻥뻥 쳤었다. 그런데 하나도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더 아쉽고 미련이 남았다. 자꾸 말 뿐인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 뒤로는 결과물이 어느 정도 나와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듯하다. 신랑에게 시작하는 데 있어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얘기해봐야 또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는 좀 당당해지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마치 그 물건들과 내 쪼그라든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당해지는 날 이 물건들을 처분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