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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작가 Oct 14. 2022

여름의 봉선화

처음 가꾸는 나의 작은 정원

 아이 학교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문득 봉선화 물을 손톱에 들여주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도심에도 지천에 봉선화가 여기저기 심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길이 예쁘게 닦여 있고 대부분 잔디와 수목이 가지런히 가꿔져 있어서 잡초 같은 봉선화를 쉽게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씨앗을 사다 작은 화분에 심기로 했다. '설마 이런 것도 인터넷에 팔까?' 싶어 검색을 했는데 흙과 씨앗이 함께 들어있는 봉선화 키트가 있었다. 키트는 아이 방학식 때 맞춰 집으로 도착했고 학교에 다녀온 후 함께 발코니에 나가 작은 화분에 정성스럽게 심고 예쁜 팻말도 꽂아 주었다. 씨앗을 심기 전 설명서에 보니 봉선화는 원래 봄쯤 심어야 하는 식물인데 나는 이미 여름이 오고 봉선화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봉선화에 대해선 꽃잎으로 손톱에 물들이는 것 말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이미 늦은 건 어쩔 수 없고 자라는 모습이라도 봐야겠다 생각했다. 일주일쯤 지나 하얀색 화분에서 작은 새싹이 나오고 하루가 다르게 줄기가 쑥쑥 올라왔다. 그런데 다른 화분에 심었던 씨앗은 전혀 올라올 기색이 보이지 않더니 결국 씨앗을 심은 자리 위로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근처에 씨앗을 파는 곳에 가서 봉선화 씨앗 여러 개를 사 와 화분 여기저기에 여러 개 콕콕 박아놨다. 새로 사 온 씨앗은 생명력이 어찌나 강한지 여러 개의 싹이 한꺼번에 쑥쑥 올라왔다. 


아이 방학과 동시에 여름은 점점 짙어져 갔지만 봉선화의 줄기가 길어질뿐 꽃은 전혀 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동네 지인이 시골 친정집에 다녀오면서 봉선화 꽃잎과 잎을 잔뜩 따다 주었다. 우리 집 봉선화 화분은 꽃을 피우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 지인이 준 꽃잎으로 아이와 함께 손톱 물을 들였다. 

꽃과 꽃잎을 주면서 백반도 함께 넣어 줘 봉지에 든 재료를 그대로 작은 컵에 넣어 빻았다. 집에 절구가 따로 없어 도톰한 아이의 연필을 가져와 열심히 빻았다. 곱게 빻은 꽃과 잎을 조금 덜어 아이 손에 올려주고 물이 새지 않도록 거즈로 덮고 비닐로 감쌌다. 오랜 시간 꾹 참아야 예쁘게 물이 드는데 아이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답답해했다. 아이는 결국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묶어 놓은 거즈를 풀었고 예쁘게 물든 손톱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아이 손에 물을 들여주고 있으니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할머니와 함께 큰고모네 놀러 갔다 하룻밤 자고 온 적이 있다. 저녁이 되어 고모가 준비해준 봉선화를 손톱에 올리고 쿠킹포일을 작게 잘라 칭칭 감아 실로 꽉 묶어 물을 들였다. 실을 너무 꽉 조이는 바람에 자려고 누웠는데 피가 통하지 않아 손가락에 쥐가 날 것 같았고 좀이 쑤셨다. 그래도 손톱이 예뻐진다고 하니 꾹 참았던 것 같다. 



손톱에 물을 들이고 여러 날이 지났다. 여름방학이 끝나 아이는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고 여름의 기운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아침 기온이 낮아져 새벽에는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올해는 유독 가을비가 많이 내려 더운 날과 추운 날이 여러 번 반복하더니 이제는 반팔을 모두 장 깊숙이 넣고 얇은 긴팔부터 시작해 겨울에 입을 도톰한 긴팔도 미리 꺼내 놓았다. 7월 말에 심었던 봉선화 화분은 잊지 않고 자주 물을 주고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두었다. 10월쯤 무심결에 발코니 쪽을 보니 여러 개 올라온 봉선화 줄기 중 한 줄기에 연한 분홍색 꽃이 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제 피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서늘한 10월에 꽃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한송이 피어서 물을 다시 들일 수 있을까? 싶어 그냥 관상용으로 시들 때까지 두려고 한다. 여름이 다 끝나고 여름에 피었어야 할 꽃을 보니 묘한 생각이 든다. 


아이와 함께 물들였던 내 손톱의 봉선화 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겨울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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