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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Sep 04. 2024

"오늘은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

‘배움’을 넘어 ‘생각’을 키우고 싶다면

  봄은 가장 여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계절 중 가장 용감하다. 다들 차디 찬 겨울 공기에 익숙해져 있는 속에서 홀로 ‘계절의 변화로 가는 길’에 과감히 발을 내디딘다. 그리곤 겨울을 영차영차 밀어내며 그 자리를 자신의 색깔로 채운다.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기가 산뜻한 이유는 아마도 봄이 즐거운 마음으로 변화에 임해서가 아닐까?
   봄이 계절을 바꾸기 시작하는 3월, 우리 집 꼬마들도 큰 변화를 맞았다. 라온이는 갓 초등학생이 되었고, 로운이는 유치원 여섯 살 반으로 진급했다. 녀석들이 변화를 대하는 자세가 봄과 같았다. 익숙한 것과의 이별을 아쉬워하거나 낯섦에 대해 무서워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환경에서의 배움을 즐겼다. 집에 오면 그날 보고 들은 바를 엄마에게 전해주려 앞다투어 재잘거렸다. 봄에 볼 수 있는 꽃, 화장실 이용할 때 지켜야 하는 약속, 지구가 아픈 이유 등등…….
   나의 귀염둥이들이 해주는 새롭고도(?) 놀라운(?) 얘기에 나는 격하게 호응해준 뒤 물었다.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좋은지를. 주저 없이 “응!”이라고 답하는 어린 눈동자가 영롱했다. 호학(好學), 즉 ‘배움을 즐기는’ 사람의 눈빛다웠다. 부디 평생토록 그 눈빛을 간직하길 바란다. 단, 학문적 지식뿐 아니라 지혜, 교훈, 기술 등 그 무엇이건 어엿한 한 인격체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만한 모든 것에 눈을 반짝이길.
   나는 아이들이 호학(好學)을 간직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하여 지금까지는 녀석들이 배운 바를 내게 신나게 자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줘 왔다. 그런데, 문득 ‘과연 그게 최선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때마침 유대인 부모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음과 같이 묻는다고 한다.
  
   “오늘은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3초 정도 얼음이 됐었다.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오늘은 학교에서 뭘 배웠니?”가 익숙한, 한국인인 나에게는. 내가 익숙했던 질문은 ‘배움’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러면 자칫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보고 들은 바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것에 머물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 부모의 질문은 ‘배움’을 넘어 ‘생각’에 무게를 둔다. ‘질문’이라는 것은 ‘생각’이 선행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식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이끌어 온 것이다. 그들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두각을 보이는 게 이해 간다.
   유대인의 방식은 호학(好學)으로도 연결된다. 배운 바를 자신만의 생각 터널에 통과시킨 후 질문을 하면, ‘나만의 배움’이 생긴다. 질문을 많이 할수록 ‘나만의 배움’이 쌓여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유대인 부모의 질문에 관한 이야기는 첫째를 임신 중일 때 들었었다. 그 당시는 ‘나도 내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엄마가 되겠노라.’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지금껏 잊고 지냈다. 이제부터라도 챙기고 싶어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와 유치원에서 알게 된 바를 신나게 전해 준 아이들에게 물었다.
   “혹시, 그 내용 중에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기도 했어?”

  “아니.”

  “아, 그랬구나. 선생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기억하는 건 아주 좋은 자세야.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저건 왜 그런 거지?’, ‘저건 뭐지?’ 이런 식으로 궁금한 것이 생기면 더 좋아. 그걸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고. 그러니까 다음에는 질문도 해보도록 노력하자.”

  “엄마, 근데 궁금한 게 없으면 어떡해?”

  “오호! 라온아, 아주 좋은 질문이야. 바로 이거야. 방금 엄마 얘기를 듣고 이렇게 물어봤지? 학교에서도 이러면 되는 거지. 무언가를 배울 때, 더 알고 싶은 게 생기거나 ‘저건 왜 그런 거지?’ 같은 생각이 들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어. 자꾸 연습하는 게 좋아. 그러다 보면 궁금한 게 생기게 돼.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있어. 선생님도 질문하는 학생을 아주 기특하게 여기시지.”

  아이들은 눈을 껌뻑이며 나를 응시했다.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좋은 건지 감을 못 잡는  얼굴이었다.

  “음……. 라온이가 어제 학교에서 배운 노래가 좋다고 엄마한테 틀어달라고 했었지? 그런데 우리가 끝내 못 찾았잖아. 그럼 선생님에게 그 노래 제목이 정확히 무언지 물어보면 어때?”

  “아! 좋아.”

  “우리 로운이도, 유치원에서 궁금한 거 있으면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좋아.”     


  다음 날, 나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물었다.

  “얘들아, 혹시 오늘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궁금한 거 뭐든 물어봤니?”

   “아니.”

  하긴…… 전날의 짧은 대화만으로 변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질문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이왕이면 녀석들이 솔깃해할 만한 방식으로 알려주고자 나의 이야기 공장을 빠르게 돌렸다. 전날 놀이터에서의 비눗방울 놀이를 떠올리니 도움이 됐다.

  “있잖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주 중요한 장치가 있어. 바로, 물음표 비눗방울을 만드는 장치야.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건 이 장치가 작동해서 그런 거야. 어떤 사람은 물음표 방울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도 그냥 두고, 어떤 사람은 그걸 터뜨리려고 하지. ‘질문’을 해서 그 궁금증이 풀리면 물음표 방울이 터지는 거야. 우리 라온이랑, 로운이는 물음표 방울이 생기면 그냥 둘 거야? 아니면 터뜨릴 거야?”

  “터뜨릴 거야.”

  “다행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서 해결해야 머릿속의 물음표 방울 장치가 점점 성능이 좋아져. 더 많은 물음표 방울들을 만드는 거지. 반대로 궁금한 게 있어도 질문을 안 하면 물음표 방울을 만드는 능력이 점점 사라져.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물음표 방울을 아예 못 만들지.”

  진지하게 듣고 있던 로운이의 표정을 보니 머릿속 장치가 재빨리 물음표 방울을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호기심이 강한 여섯 살 배기는 곧바로 터뜨리려 했다.

  “엄마, 그런 사람이 엄마야?”

  “엄마냐고? 엄마는 다행히 그 장치를 잘 써서 물어보는 것도 잘하는 편이야.”

  “아니, 머릿속에 물음표 방울 만드는 장치가 망가져서 물어보지 못하는 사람이 ‘엄.마.’냐고.”

  “아아…… 혹시 이 ‘노신화 엄마’ 말고 그냥 ‘엄마들’이 그러는지 묻는 거야?”

  “응.”

  조금 뜬금없었다. 왜 ‘엄마들’이라고 생각한 걸까? 내 머릿속 물음표 방울도 곧바로 터뜨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화가 샛길로 새면 안 되니까.

  “정말 좋은 질문이야. ‘엄마들’ 중에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어. 그리고 엄마들뿐 아니라 어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안타깝게도 아이들 중에도 질문을 하지 않아서 그 장치가 망가진 아이도 있어. 우리는 뭐든 궁금해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물어보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그러니까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질문을 하는 건 물음표 방울 만드는 장치를 튼튼하게 하는 데 도움이 돼.”

  “엄마! 나 유치원에서 선생님에게 뭐 물어봤어.”

  “그래? 우와. 뭘 물어봤어?”

  “내가 색종이 두 장 달라고 했어.”

  여섯 살에게는 ‘질문’이나 ‘요청’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야! 그랬구나. 좋아. 물음표 방울 장치가 더 튼튼해지게 하려면 어떤 것에 대해서 ‘저건 왜 그런 거지?’, ‘저건 뭘까?’ 하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하는 것이 필요해. 혹시, 그런 질문을 한 게 있을까?”

  로운이가 뜸을 들이는 사이 라온이가 눈을 번쩍 뜨고 흥분하며 말했다.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저번에 배웠던 노래 제목이 뭔지 물어봤어. ‘축복합니다.’래.”

  “우와, 그랬구나. 그렇게 물어보고 제목을 알아내니까 기분이 어때?”

  “좋아.”

  “앞으로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도록 하자. 머릿속 물음표 방울 장치 성능이 엄청 좋아지게 하자.”

  “응.”
 
   라온이와 로운이는 나와 대화할 때면 질문을 곧잘 한다. 그런데 왜 학교나 유치원에서는 다를까?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하나라도 흘리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은연중에 내가 그런 생각을 심어줬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학교에서 뭘 배웠니?”에 익숙했던 사람이니까.
   앞으로는 ‘질문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말은 녀석들에게는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행히 거부감이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기대감을 품은 것도 같았다.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봄 같은 아이들이다.
   내 아이들이 질문 요정으로 거듭나면 좋은 일들이 생길 것만 같다. 혹시 아는가! 녀석들이 언젠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위대한 질문들을 만들어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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