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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셍지 Sep 23. 2021

쏜애플 정규 3집 [계몽]을 듣고

조금은 씁쓸한 성숙

*앨범명은 []로, 콘서트 명과 곡 명은 <>로 표기하였습니다.




쏜애플 정규 3집이 나왔다. 2 [이상기후] 이후로 5, EP [서울병] 이후 3년만의 소식. <매미는 비가 와도 운다> 돌려 듣던 중학교 3학년 여름의 내가 3 여름을 맞아 <장마전선> 흠뻑 빠지고(당시 입시생이던 나는 정말로 서울-병에 걸려 있었다), 대학교 3학년의 여름을 맞기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찰나인 시간 동안의 가시 돋친 순간들을 쏜애플과 함께했다. 그래서 쏜애플을 떠올리거나 노래를 들을 때면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나를 마주한  마냥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이처럼 나는 과거를 그들의 노래와 함께 기억했고,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듯 쏜애플의 노래를 기다렸다. 그렇기에 이번 정규를 결코 가벼이 들을  없었다. 7 4 앨범이 발매되고, 진지하게 밤낮으로 노래를 돌려 들은  펜을 잡았다. 몹시 주관적인, 끼워맞추기식 감상평임을 미리 알린다.



쏜애플 [계몽], 2019.07.04


정규 3 타이틀은 [계몽]이다. 이전에(17년도로 알고 있다) 열린 콘서트 타이틀이 <계몽>이었다. 발매되지 않은 미공개곡 4(수성의 하루, 로마네스크, 넓은 , 알레르기) 등을 공연했고, 이번 정규에는 알레르기를 제외한 3곡이 수록되었다. 쏜애플도 오랜 기간 준비하고, 팬들도 오랜 기간 기다린 앨범임을   있다. 앨범아트는 다른 앨범들과 비슷하게 기괴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세기말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나니아 연대기' 하얀 마녀가 떠올랐다. 앨범을 여러  돌린 지금도 같은 생각인데, 언제   비교글을 써도 재미있을 듯하다.


앨범명 '계몽'은 주된 메세지에 가깝고, 전반적인 무드는 오히려 '마술'을 연상케 한다. 환상적인 '마법'의 이미지보다는 주술적이고 토속적인 '샤먼'의 느낌이 강하다. 또한 신화적인 요소들을 많이 차용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번 정규 3집 발매 기념 콘서트 타이틀은 <마술>이다.(저번콘이랑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 크겠지) 앨범 초반에는 지금까지의 쏜애플이 생각나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쏜애플이 던지는 새로운 메세지를 담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대표되는 이미지는 역시 '우주'이며, 은하, 별, 밤 등이 주요 키워드로 등장한다. 이들이 '계몽'이라고 칭하는 것들은 타이틀곡에서 더 두드러진다. 3집 [계몽]의 타이틀곡은 <2월>과 <은하>로, 더블타이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술

개인적으로 나는 앨범의 첫 곡, 혹은 초반 트랙을 좋아하는 편이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가 들어있거나, 전체 무드를 리드하는 곡이 수록돼있기 때문이다. 이 앨범도 마찬가지로 첫곡인 '마술'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표현하고자 하는 무드가 집약되어 있다. 처음 들으면 어떤 아프리카 부족이 떠오를 수도 있다. 통에 재료를 잔득 넣고 휘젓는 마녀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가사를 보면 '계몽'이 제시하는 메세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여기 밑에 가라앉은
것들을 건져내어
별들을 낳을 테야

까먹은 이름과
열매 맺지 않는 풀
온종일 비가 내리는 하루

스쳐간 피부와
저녁에 옮았던 꿈
죄다 녹여서 휘저어야지

어스름이 쌓이네
머리 끝이 가려워
뿔이 돋아 나오네


까먹은 이름, 열매 맺지 않는 풀, 스쳐간 피부, 저녁에 옮은 꿈들을 모두 녹여 휘저어 별을 낳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까먹은 이름과 스쳐간 피부는 '노래가 되지 못한 이름들'과 같이 인연이 되지 못하고 스쳐간 이들을, 열매 맺지 않는 풀과 저녁에 옮은 꿈은 언젠가 자신의 꿈이었을지 모를, 결실 맺지 못한 일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의 경험, 혹은 실패들을 통해 별을 낳겠다 한다.


그 결과로서 계몽의 증표인 '뿔'을 얻게 되는데, 개인적 의견으로 이 뿔은 쏜애플의 '쏜'과 비슷한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가시'는 이전까지의 쏜애플을 대표하는, 어떠한 처절함과 고통의 이미지였다면, '뿔'은 계몽을 통해 이뤄낸, 가시보다는 조금 더 무딘, 성장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후 <기린>이란 곡에서 이와 같은 뿔의 상징적 이미지를 다시 마주할 수 있다.




수성의 하루

[서울병]EP의 <어려운 달>에 이어, 아물지 못하는 <수성의 하루>. 앨범이 갖는 우주적 이미지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드러난다. 이 곡은 전주만 들어도 쏜애플 곡임을 알 수 있는 곡으로, 일전에 콘서트에서 공개된 바 있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팬들이 발매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기린될 뻔)


아물지 못하는 어제를 끌어안고
썩어버린 채 말이 없네
작아진 발을 보고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한 걸음을 떼자마자
숨이 씨근거려

들켜버릴까 숨만 죽이는
비겁한 하루를 바랐던가?

오래전 놓았던 자그마한
불씨가 어딘가를 태워도
좀처럼 나에겐 옮겨붙지를 않고
그림자만 길어지네.

그저 나 이렇게
숨만 쉬고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아물지 못하는 오늘을 끌어안고
모든 것은 내일의 몫으로


무한한 우주에서 수성은 한정된 궤도를 반복해 돈다. 수성의 특징으로는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는 행성', '빠른 공전속도', '가장 찌그러진 궤도', '지구의 2/3밖에 되지 않는 산소의 양', '약한 중력', '관측의 어려움'등을 들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수성의 특징은 곡의 가사와 대응된다. 한 걸음을 떼자마자 숨이 씨근거린다든지, 그림자만 길어진다든지. 하지만 이 곡의 제목과 연관돼 가장 두드러지는 수성의 특징은 바로, '매우 느린 자전'일 것이다. 수성은 자전이 매우 느린 행성으로, 수성의 하루는 1408시간에 해당한다. <수성의 하루>는 화자가 느끼는 '변화의 어려움'을 수성의 '몹시 긴 하루'에 빗대며 자조적인 질문을 던지는 곡이다.


"비겁한 하루를 바랐던가?"

"숨만 쉬고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그렇게 아물지 못하는 어제를 끌어안고, 썩어버린 채 아물지 못하는 오늘마저 끌어안은 채 모든 것을 내일의 몫으로 남겨둔다. 성숙과 변화에 어려움과 매너리즘을 느끼는 수성은 마치 과거와 현재의 쏜애플을 상징하는 듯하다.




2월

더블타이틀 곡 중 하나인 <2월>이다. 곡의 분위기가 쏜애플 치고 로맨틱하게 느껴져서 사랑노래구나 싶었다. 가사를 보니 혹시나가 역시나. 하지만 마냥 행복하고 로맨틱하기만 한 곡은 아니다. 특히나 이 곡에는 주옥같은 구절들이 많은데, 소름돋는 상징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수많은 팬들이 <2월>을 최애곡으로 꼽게 했다.


새사람을 만나기까지는
매번 이틀 정도가 모자란데

유난히도 길고 길었던 계절의 끝에
악당조차 되지 못하고
내게 봄은 없겠지 시들어만 가겠지.

어느덧 꽃은 지고 벌레를 보고 놀라
시월을 그리워하는 오월을 앓다
주르륵 녹아내리겠지

언제였던가 감춰진 세상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던 날이 있었어.
이제는 억지스러운 희망을 발명해
악당조차 되지 못하고

목을 꺾어 뒤를 봐요
잊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 있어.
몸을 돌려 앞을 봐요
하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 있어.


이 곡에서 화자는 '2월'로 상징된다. 2월처럼 길고 긴 계절의 끝에 위치하기도 하고, 새사람을 만나기에 이틀정도가 모자라기도 한다. 끝이 없는 듯한 겨울의 끝에 위치한 채 봄을 염원하지만, 동시에 '내게 봄은 없겠지'라고 말하는 회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봄이 오지 않는 2월은 시들어만 간다.


어느덧 꽃이 지고, 벌레를 보고 놀라는 여름을 맞는다. 시월을 그리워하는 오월을 앓다, 결국 여름을 맞은 2월은 녹아내리기만 한다.


가을을 그리는 봄을 사랑하는, 겨울의 끝인 화자는 결국 악당조차 되지 못하고 그 마음이 닳아 없어져버릴 것 같음을 느낀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곡의 마지막 부분이다.


"목을 꺾어 뒤를 봐요. 잊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 있어.

몸을 돌려 앞을 봐요. 하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 있어."


목을 꺾은 채 몸을 돌려 앞을 보면, 고개는 앞을 보고 있지만 몸은 여전히 뒤를 보고 있다. 나는 이 구절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변화의 지향과 성숙. 그리고 그 이면의 좌절감과 미련. <2월>이 그저 안타까운 사랑노래에 그치지 않는 이유이다. 2월을 닮은 화자가 앓는 봄은 대체 무엇일까? 그 봄이 오기는 하는가?




로마네스크

정말 좋아하는 곡 중 하나. 역시 이전에 공개되어 사랑받은 곡이다. <아가미>가 생각나기도 하는, 참 쏜애플스러운 곡이다. 곡의 제목이 '로마네스크'인 게 마음에 쏙 들었는데, 대체 왜 로마네스크인지 궁금했다. '로마네스크'는 크게 세 갈래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한데, 첫째는 건축 양식, 둘째는 음악 사상, 셋째론 문예 용어로서다. 가장 그럴듯한 건 문예용어로서 해석이다. '현실적 논리를 초월해 상상력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공상적, 정열적 성격 그 자체.' 하지만 로마네스크 건축을 찾아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곡 제목은 '로마네스크'다. 이 제목이 아닌 로마네스크는 상상할 수 없다. 의미는 밑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누구 하나 잡을 수 없어
목을 놓다 잠든 밤에도
나는 날 안아줄 수 없었네

오늘도 낮이 다 새도록
질려버릴 만큼 줄곧 잠만 잤구나

난 하루에도 몇 번씩
어딘가로 사라질거야
그저 말뿐인 미지근한 예감

날 좀 더 읽어내줘요
아니 그냥 덮어줄래
혹시 끝까지 봤다면
꼭 태워주고 가요

날 좀 더 괴롭혀줘요
아니 그냥 안아줄래
혹시 떠나갈 거라면
꼭 문은 닫아주고 가요

누가 나의 혀를 자르고
그저 곁에 있어준대도
나는 날 좋아할 수 없을 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김이 서린 창문을 열고
떨리는 두 팔을 감싸
안아


곡의 분위기가 음울한 것에 대응하듯, 가사 또한 엄청나게 자조적이며, 관계에 대한 불신이 기저에 깔려있다. 하지만 역시 양가감정의 면모가 드러난다. 사실 안아주기를, 나를 읽어내주길 바라면서 혹시 나의 바닥까지 본 그대가 떠날까 두려워 그냥 덮어달라고 말하는 모습. <백치>에서 가지 말라고 찢어질 듯 울부짖던 화자를 기억하기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날 떠나면 죽어버릴 거라고 울부짖던 화자는 이내 떠날거면 문은 닫아주고 가라 한다. 성숙보다는 체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숨을 거둔 바람이

다시 한 번 내게 불어준다면

나는 온 세상을 끌어안으리"


그에게 성숙이란, 또 계몽이란 '끌어안는 행위'이지 않을까?


덧붙여 로마네스크 양식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는 10세기에서 12세기에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육중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며 두꺼운 벽, 둥근 아치, 단단한 찬벽, 커다란 탑 등을 특징으로 한다. (실크로드 사전, 정수일, 2013)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이 곡에서 로마네스크의 두꺼운 벽과 커다란 탑은 화자의 마음의 벽과 탑에 가까워 보인다.


배경을 알아보면 더욱 흥미롭다.


로마네스크 예술 양식을 낳은 세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한마디로 폐허의 세계였다. 그 건물들은 대부분 쓸쓸하고 황량해 보인다. 수백 년 동안 아무도 빗장 걸린 그 작은 창문 안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모든 로마네스크 예술에 드러난 신경과민적 요소는 종종 기괴한 양상으로 흐르는데, 이것은 전면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다. (반 룬의 예술사, 헨드릭 빌렘 반 룬, 들녘, 2008)




위에서 그러했듯이 아래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미스테리한 느낌이 드는 곡이다. 쏜애플 노래 속에는 절대자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꽤나 심심찮게 등장한다. 나는 대표적으로 <장마전선>이 그러한 곡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곡 또한 장마전선과 비슷한 느낌의 상징을 사용하기에 그렇다.


위를 걸어가네 아래에서는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네

떨어지게 두소서
놈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오
한 점씩 나눠먹으면
더러움이 씻겨져
외로움도 사라져

배를 바짝 붙이고 엎드려라
우리는 하나같이 너의 왕이니
마침내 질려버렸네
남은 뼈들은 저기
개한테 던져줘


이 곡에서 화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불분명한 위아래. 권력을 가지면 누구나 악에 가까워진다는 것.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는 위. 하지만 ‘아래’의 세계에서는 ‘아래’가 곧 '위'다. 결국 위아래가 불분명해진다. 이렇듯 모든 이는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잔혹해진다.


두 번째로는 삶과 죽음과 관련한 해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해석이 조금 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장마전선>과 비슷하다고 말한 이유도 이 해석에 의거한다.


"요란한 믿음이 새어 들어와 예정에도 없는 문을 열었네"

:모두의 탄생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앞에 놓여진 아슬한 외다리. 위를 걸어가네"

:삶, 즉 인생을 의미함. 아슬한 외다리이자 ‘위’로 대표되는 공간


"아래에서는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네."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의 삶.


그렇다면 죽음의 공간인 ‘아래’에서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본 곡에서는 삶보단 죽음의 공간인 ‘아래’의 상황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아래'의 상황에서는 떨어진 ‘위의 존재’를 나눠먹고, 이를 통해 더러움이 씻겨지고 외로움이 씻겨진다고 믿는다. 그렇게 왜곡된 믿음은 만신창이가 된 이를 계속해 짓밟게 한다. 행위에 질려버렸다고 끝이 아니다. '남은 뼈마저 개한테 던져주는 모습'은 끝없는 '아래'의 잔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이 화자가 말하는 ‘아래’다. 하지만 곡의 제목이 ‘위에서 그러했듯이 아래에서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상 이 곡의 제목은 ‘아래에서 그러했듯이 위에서도’에 가깝다. 죽음의 공간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무지막지한 짓밟기의 행위는, 아래에서 그러했듯 위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 삶의 공간인 ‘위’가 죽음의 공간인 ‘아래’와 다름없이 혼란스럽고 잔혹함을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장마전선>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한 건 이 곡 또한 <장마전선>처럼 예기치 못한 탄생,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린

그나마 이 앨범에서 가장 투명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이란 제목에 걸맞게 등장한 신화적/ 전설적 소재 중 하나로, '기린'은 동양의 전설 속 상상의 동물을 의미한다. 그에 맞게 조금은 토속적인, 몹시 아스트랄한 곡이다. 기린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기린은 수컷을 '기'라고 부르고, 암컷을 '린'이라 부른다. 암컷인 린은 이마에 뿔 하나가 난다. 서양의 '유니콘'과 비슷한 존재라고 보면 된다. 기린의 뿔은 겉에 살가죽이 덮여 다른 생물을 해할 수 없게 되어있다고 한다. 이러한 뿔은 쏜애플의 '가시'와는 다르다. 싫든 좋든 가까이 하면 찔리기 마련인 가시를 가진 사과가 아닌, 멋진 뿔의 기린. 이게 쏜애플의 궁극적 이상향 아닐까?(첫 곡인 '마술'에서의 뿔과 특성을 같이한다.)


아무래도 이 세상이
이제 곧 끝나버릴 것 같아

완전한 원을 그리다 보면
잡을 수 있을까?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잡을 수 있을 거야
너의 울음소리에다
아껴둔 말들을 씌울 거야

어쩌면 너는 그냥 처음부터 없었나?
함부로 나오지 말 걸 그랬나?


뿐만 아니라 '기린'은 성인이 태어날 때 그 전조로 나타난다는 전설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곧 끝나버릴 것 같은 세상을 언급하며 '기린'의 등장을 희망하는 화자는 '한 걸음 더 가면 잡을 수 있을거야', '너의 울음소리에다 아껴둔 말들을 씌울거야'라며 기린을 염원한다.


화자는 왜 기린을 염원하는 걸까? 신화에 따르면 기린의 울음소리는 음악의 음계와 일치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기린'이 쏜애플의 '음악적 이상향'을 말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특히나 '음계에 아껴둔 말을 씌워 노래하는 것'이 말이다. 기린을 잡길 원한다는 건 이런 자신의 이상향에 도달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첫 트랙인 ‘마술’에서 언급한 것처럼 ‘뿔’을 가졌다는 특성 또한 화자의 이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린의 뿔에서는 강한 주력(주술력)이 나온다고 한다. 화자는 계몽을 통해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을 ‘기린’이라는 전설의 동물을 통해 구체화한다. 하지만 기린을 좇는 과정에서 회의감 또한 느낀다. 기린은 전설 속의 동물이자 말 그대로 '이상향'이기에. “사실 처음부터 이것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했나?”, “함부로 나오지 말 걸 그랬나?” 결국 이 노래는 “잠이나 잘 걸”이라고 중얼거리며 끝을 맺는다.




넓은 밤

'넓은 밤'은 더블타이틀인 <2월>과 <은하> 사이에 있는 곡이다. 실제 곡 위치도 그러하고, 던지는 메세지 또한 그 사이에 있는 듯하다.


가라앉지 않도록
허우적거리는 우리들

그 꼴이 우스워 이를 다
드러내고서 여물어진 동백

너와나 너와나 너와나
사이에는 오직 넓은 밤이

얼어붙지 않도록
서로를 핥아주는 몸짓

겁도 없이 새파란 꽃을 따러
어두운 산에 가야지

가사에 등장한 ‘동백’과 ‘새파란 꽃’이 갑작스러워서 의미를 찾아보았다. 동백은 특이하게 경칩쯤 되어야 피기 시작하는 다른 꽃과는 다르게 경칩이 되기 훨씬 전부터 핀다. 대략 11월 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2~3월에 만발하는 편이다. 새가 꽃의 수정을 돕는 조매화기 때문에 향기가 없으며 꽃도 빨갛다고 한다.


여기서 <2월>을 떠올렸다. <2월>에서 겨울이란 긴 계절을 지낸, 2월로 상징되는 화자는 봄을 염원한다. 하지만 오월은 시월을 그린다. <넓은 밤>의 동백은 어쩌면 화자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봄일지 모른다. 11월에 꽃을 피우기 시작해 2월에 만발하는, 어쩌면 화자와 가장 닮은 꽃.


하지만 역시 2월은 봄을 맞을 수 없는 듯 보인다. '너와 나 사이에는 오직 넓은 밤이' '우주는 그저 머리 위에'라는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 빨간 동백이 여물었음에도 화자가 새파란 꽃을 따러 어두운 산에 가는 이유는 이 때문일까?




뭍은 사운드 위주로 구성된, 짧은 가사를 가진 곡이다. 여기서 '뭍'이란 지구의 표면에서 바다를 뺀 부분을 의미한다. 이 곡은 앨범 내에서 전위적인 역할을 하는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을 기점으로 앨범은 '과거'의 이미지에서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로의 탈피를 꾀한다. 바다에서 나와 뭍에 다다르는 것처럼. 제목은 뭍이지만 노래는 역설적으로 물 속에 잠겨 일렁이는 듯한 사운드로 가득 차 있는 게 곡의 특징이다.


어느새 밀려와
닿은 바닷가

머리를 말려도
기어오르는 물의 기억

한 발을 들고서
몸을 기울여
귀를 털어내도
멈추어지지 않는 파도

오늘 세계가 막
시작된 것처럼
물살이 빠르다


물에서 나와 머리를 말려도, 몸을 기울여 귀를 털어내도 물의 기억은 기어오르고,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이는 물에서의 기억을 갖고 뭍에서 새로이 출발함을 의미한다. 뭍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물살은 빠르다. 물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속도감이겠지.




은하

명불허전 내 최애곡이다. 듣는 내내 정말 오열하고 싶었다. 노래가 답지않게 담담해서 더 씁쓸하고, 더 울컥했다. 쏜애플의 필모그래피를 따라 그리며 찢어질 듯 울부짖던 그의 모습을 함깨했던 팬이라면 분명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매번 곧 죽을 것만 같이 노래하던 쏜애플이 이젠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듣는 나는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도심 한복판 고층빌딩 옥상에 누워 보는 캄캄한 밤하늘이다. 은하라고 했는데 하늘에는 별 하나 안보이고 아래를 내려다 봤더니 서울의 불빛과 도시 소음, 경적 울리는 자동차가 있다. 서 있는 옥상만 다른 세계인 듯 고요하다. 내가 생각한 은하는 초록빛 오로라, 사막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도 아니다.


아무리 걸어도 밤은 끝이 안 보이고
여전히 사람들은 달이 어렵기만 해
나는 이제 아무것도 빼앗고 싶지 않아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
믿지 않으면 미움은 싹이 트지 않아
거리에 가득 차 있는 비겁한 가르침으로
날 걸어 잠그네

아주 먼 길을 돌아가다
누군가 울음을 참는 소릴 들을 때
잠시나마 혼자가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잠을 참고 기다리고 있어요
어디론가 데려가줘요
나날이 저무는 나의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어요

그대가 흐르는 밤을
아주 긴 노래를 부르다
오래전에 잊은 마음을 찾아낼 때
함께 시간을 녹여줘요

잠시나마 커다란 밤이
줄어들 것만 같아

아 그대 나의 별이 되어 날 이끌어 줘요
아 그대 나의 별이 되어 날 이끌어 줘요

우리가 머무는 우주가 끝날 때까지
잠을 참고 기다리고 있어요
어디론가 데려가 줘요

나날이 저무는 나의 목소리여
그대에게 닿아라
슬픔이 세상을 삼키기 전에
나와 함께 떨어져 줘요

나날이 저무는 나의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어요
그대가 쏟아지는 밤을


쏜애플 곡들의 메세지가 전부 집약돼 있는 곡이다. 전의 쏜애플을 보면 작은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적 역량의 얘기가 아니라, 마음의 문을 닫고 괴로움을 부르짖는,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섬에 있는 것 같은. 근데 이 곡에서 이들은 어디론가 데려가 달라고, 나와 함께 떨어져 달라고 말한다. 난 그래서 벅찼고, 그게 내가 이 곡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베란다>에서 오늘도 밤이라며 쓸쓸히 말하던,

우리는 서로 너무도 <어려운 달>이라고 말하던,

<도롱뇽>에서 이제 잔다며 날 깨우지 말아달라 말하던,

<아지랑이>의 좋은 시절들은 왜 항상 끝나냐 묻던,


너와 나 사이에는 오직 넓은 밤이 있다며,

우주는 그저 머리 위에 있다던 <넓은 밤>의 그는

<은하>에 이르러 결국, 잠시나마 커다란 밤이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별이 되어 날 이끌어달라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우주 속에 머물게 된다.




검은 별

에필로그 느낌이 강한 곡이다. <은하>의 무드를 이어간다. 역시나 아스트랄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 곡에서도 <기린>처럼 신화를 차용한 부분이 눈에 띈다. <기린>이 동양의 전설을 소재로 했다면, 여기서는 그리스 신화의 요소를 엿볼 수 있다. 변주되는 부분이 정말 말도 안되게 좋다.


"모든 게 시작된 날부터 아이들을

차례대로 삼켜버린 아버지가

나를 찾고 계시네"

:그리스신화 속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의미한다. 그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은 죽음 혹은 시간이 다 됐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아 이 몸은 영원히 잃어만 가는데"

"아 이 몸은 영원을 셀 수가 없는데"

:'이 몸'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는 다르게 영원을 셀 수 없다. 내가 가진 영원은 '영원히 잃어만 가는 것' 뿐이다.(인간의 한계) 여담으로 크로노스(시간)은 물과 땅 사이에서 태어났다. <뭍>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잠시 난 모든 것을 잊어

언제도 없고

어디도 없는

지금 여기

난 모든 것을 끌어안네"

:이 앨범에서 말하는 쏜애플의 '계몽'이 잘 집약되어 있는 구절이다. 그들에게 계몽이란 궁극적으로 시간, 장소를 잊은 ‘끌어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전까지 쏜애플에게선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처절한 고통이 강하게 느껴졌다. 말 그대로 Thorn apple. 유약한 사과와 뾰족하게 돋친 가시였다. 하지만 3집 [계몽]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띈다.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긴다. 물론 희망찬 삶과 그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또한 전까지의 곡에서는 '물'이나 '늪'과 같은 하강의 이미지를 가진 상징이 주로 사용됐다면, 이번 앨범은 건조하게 불타는 상승의 이미지가 주로 사용됐다. 이는 <계몽>이 주는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의 주된 요인일 것이다. 변치 않는 것도 있다. 지워지지 않는 ‘죽음’의 이미지인데, 하강의 이미지가 상승의 이미지로 변했다 한들 그것이 불타 없어져버리는 '소멸'임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멸이 과거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마지막 순간에 웃고 있을 것만 같아서이다.


기저에 깔린 체념, 회의, 자조의 정서를 완벽히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공감이 가고, 그들을 응원하게 된다. 과거를 외면하려 하지도, 잊으려 하지도 않고, 그것들을 그대로 둔 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은 쏜애플의 성장을 짐작케한다. 쏜애플의 양가감정적 특성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목은 꺾여 앞을 보고 있는데, 몸은 아직 뒤를 보고 있다. 쏜애플의 성숙이 불완전해 보이는 동시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이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머리는 앞을 지향하지만, 몸뚱이는 뒤를 보고 있다. 몸이 마음을 닮았다면, 우리 모두가 그런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음악 평론가 배순탁씨의 의견을 조금 빌리자면, 쏜애플의 노래는 추상과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질적인 형용사들도 가득하고. 노래를 구성하는 음계에서도 이런 어긋남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와 같이 노래의 소재들도 극단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낮, 사막, 남극, 적도와 같이 극단적인 시간과 위치를 가진 곳이 이에 해당한다. 이번 앨범에서는 ‘은하, 별, 밤’등으로 대표되는 우주가 그렇다.


변화와 성숙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지점은 타이틀곡이다. 쏜애플의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담고 있는 이번 앨범이지만, 타이틀곡으로 선정된 2곡을 보면 그들의 지향점이 확실히 보인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변화, 희망, 그리고 더 이상 기형적이지 않은 ‘함께’. 그들의 성숙이 불완전한 한편, 과거를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계몽이기에 더 마음에 와닿았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이질적으로 드러낸, 여전히 좋은 쏜애플의 표현력이었다.이들과 같이 자꾸만 말을 더듬고 잠드는 법도 잊었던 열여섯 여름의 내가 어느새 몸도 마음도 자라,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는, 이들의 씁쓸한 성숙에 고개를 주억이는 스물 둘의 여름을 맞았다. 쏜애플의 계몽에 울컥하고, 그들의 은하에서 함께 시간을 녹이길 자처하는 이유는, 역시 나 또한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며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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