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열세 번째 밤

텅 빈 시간의 밤

by 숨결
텅 빈 시간의 밤



안녕하세요 K.

시간이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잠시 멍하니 있다보면 하루가 지나버리고 유난히 심심하다 느껴지면 일주일이 지나있습니다.

거울을 보다 머리가 길었구나 싶으면 한 달이 훌쩍 지나있습니다. 이러다보면 하나의 계절이 지나있겠지요.

그러고보면 당신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세 번의 계절을 만났고 조금만 더 지나면 네 번째 계절을 맞이하게 되겠습니다.


그동안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알량한 얼마간의 돈을 남긴 일 말고는 당신을 떠나보낸 시간 이후 무얼 했는지 기억조차 흐릿합니다. 그저 침대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고 한 잔의 술로 잠을 청했던 밤들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지나갑니다.


더 나이가 들고 푼푼한 추억하나 없는 늙어감이 두려워 뒤늦게나마 할 일을 많이 만드려고 해봅니다.

새로운 일도 찾아야 하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공부도 해야하고 내 재산과도 같은 자료들도 만들어나가야하고 당신을 그리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해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어쩌면 나는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임무이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해야 나의 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겁니다. 당신과의 헤어짐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내가 떠나온 행성에 어느 높으신분의 깊은 고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래서 원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이 많은 일들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내가 가진 시간들을 임무에 쏟아부어야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하는 이 밤이 텅 비어있습니다. 주변 십리 안에 아무도 거닐지 않는 해변에 버려진 커다란 드럼통을 파도에 밀려온 두꺼운 나뭇가지로 세차게 내리쳐 '텅텅' 소리가 울려퍼지는 공허함입니다. 거친 파도 소리와 드럼통의 불협화음을 싫다고 말하는 갈매기 한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애달픈 공허함입니다. 하고픈 일이 하나도 없는 이 시간들에 해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채워가는게 당연한 일이고 어쩔수 없는 일이어야만 하나요.


아. 그래도 하고픈 일 하나는 남아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 마음인 K 당신을 그리워하는 일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번씩 이 또한 하고픈 일이 아니라 해야만하는 일이 아닐까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어보려고 합니다. 이 텅빈 시간으로 가득찬 밤에 쓰러져 어둠에 녹아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불빛 하나가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고 또다시 일을 할 것입니다.

새로 준비하는 쇼핑몰의 상품을 기획하고 강의자료를 준비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장소를 찾아보기도 해야합니다. 어느것 하나 신나는 마음이 일어나진 않는다지만 오늘 또 하루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써내려가는 이 편지 한통을 버팀목삼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떠날 준비를 하는 겨울 밤.

당신을 그리는 옛사랑으로 부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열두 번째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