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의 상부장에서 그릇을 꺼내고, 문을 열어놓았다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힌다.
바닥에 접시를 떨어뜨려 깨뜨린다.
커피를 타다가 커피가루를 떨어뜨린다.
침대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딪힌다.
바쁘게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방에 들어가다가 문 틀에 새끼 발가락이 부딪힌다.
이런 실수를 할 때마다 나는 씩씩거리며 분노한다.
그 상황에서, 가족이 누구 하나 옆에 있기라도 하면, 화풀이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저녁 상을 차리다가... 싱크대 문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기라도 하면, 워킹 맘이라 바쁘게 저녁을 차리다가 이렇게 머리를 부딪혔다며 비애를 느끼고, 차려주는 대로 아무거나 먹지 않아 내가 이렇게 매 끼니를 분주하게 준비해야 되니 아들 아이를 원망하고, 누구는 가사도우미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데, 나는...이렇다며 한탄하고,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는 머리대로 아프고... 눈물까지 쏟으며 내 운명을 한탄하기까지 한다. 사소한 실수에 대해 지나치게 분노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일이 잘못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 운명에 이런 상황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완벽함으로부터 자유하기로 했다.
나에게도 일명 '재수없는 일'이 생길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수없는 일'이 생겼을 때, 나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짜증내지 않기로 했다.
나도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럴 땐, 무조건 달콤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며, 과감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마흔이 된 나에게 카라멜 마끼아또란...
완벽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달콤함과 어설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