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바람기억



아침 산책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생각들은 단편적이기도 하고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서로 연관을 맺고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산책을 마치고 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증발해 버린다. 산책을 할 때는 분명 기억해두고 있다가 글로 적어야지 하는데, 심지어 첫 문장까지 생각하는데, 산책을 마치고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하다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몇 번인가 메모를 해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 메모한 것을 들여다보면 아침 산책할 때의 그 기분이 아니다. 메모해 둔 것은 그대로 이야기로서의 힘을 잃고 만다. 그래서 나는 메모하는 습관을 언젠가부터 고수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 아침 산책은 몹시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몹.시.가.라.앉.은.기.분. 이라고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오늘 내가 생각한 첫 문장이다. 그리고 이어 어제 좋았던 일이 떠올랐다. 장사를 하다 보니 주변의 상인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궁금한 게 많다. 어떻게 해서 장사를 하게 되었는지, 수많은 음식 중에 왜 이자카야인지, 혹은 오코노모야끼인지, 횟집인지 국밥집인지. 모두 우리 가게 주변에 마주하고 있는 음식점들이다. 장사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이었는지, 수많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나갔는지 등등, 아마 내가 지금 여러모로 생각이 많고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다. 사업도 삶도. 그래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순도 100퍼센트의 어떤 호기심과 힘이 발동한다.


얼마 전 우리 가게 옆구리에서 오랫동안 이자카야를 하신 사장님이 점심장사를 개시했다. 다른 상인들 같으면 저녁 술장사도 모자라 점심 장사 손님들마저 빼앗아 가냐고 하는데, 나는 노노. 이자카야 사장님이 만드신 정갈한 술안주를 이미 한 번 먹어본 터라, 사장님의 점심 메뉴가 무척이나 궁금하고 맛보고 싶었다. 망설임 없이 남편과 사장님 가게로 들어가 점심 메뉴를 주문해 놓고 3시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예상대로 사장님의 점심메뉴는 훌륭하다 못해 소문을 내고 싶을 정도였고, 내가 과연 이런 식으로 계속 장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좌절감마저 들었다. 나는 빈 그릇을 깨끗이 씻어 사장님께 돌려드리면서 나의 본심을 있는 그대로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이렇게 대접받는 기분은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가격까지 착하니 저는 아무래도 장사를 접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대접받은 한 끼에 대한 답례로 동네 소문난 빵집에서 산 밤 식빵을 사장님께 내놓으며 말했고, 사장님은 몸 둘 바를 모르며 고마워했다. 무엇보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이 음식 맛을 칭찬하니 힘이 나셨던 것 같다. 실제로 나도 그렇다. 손님들 칭찬보다 오코노모야끼 사장님의 칭찬이, 국밥집 사장님의 칭찬이 그리고 슈퍼마켓 식구들의 칭찬이 슈퍼 울트라 메가급으로 힘이 나고 입꼬리가 헤벌쭉 찢어진다. 맛있다는 말이, 맛이 변함없다는 한마디가. 그런 말이 힘난다는 걸 알고 건넨 건 아니었는데, 진짜로 정갈하고 대접받은 기분에 있는 그대로 얘기했는데, 이자카야 사장님이 어제 아이스크림 4개가 든 봉지를 들고 쭈뼛쭈뼜 우리 가게로 들어와 쑥 건네주고 가신다. 나는 또 함박웃음이 되어버린다. 이런 소소한 마음이 나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고맙다. 공교롭게도 그 전날에는 우리 가게 엉덩이 쪽에서 상담을 하시는 상담사 선생님께서 남편과 먹으라고 아이스크림 두 개를 주고 가셨다. 상담 선생님은 왜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셨을까?를 놓고 남편과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지만 우리 가게 타르타르샐러드 돈가츠에 대한 답례가 아닐까라는 답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 가게 샐러드 돈가츠가 맛있다고 여러 차례 얘기를 하신 적이 있어서기 때문이다. 아니면 상담 선생님께도 밤 식빵을 드려서 그런가? 나는 고마운 분들께 밤 식빵을 드린다. 밤이 잔뜩 들어있고, 빵이 페스추리고 맛있고 혼자 먹기 아깝고 고마운 분들께 드리기 딱 좋은 크기와 가격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가 준 밤 식빵과 함께 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시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왜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고 슬플까? 손톱과 발톱 끝까지 퍼진 무기력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재료를 소분하고 있는데 남편이 점심으로 콩국수를 먹잖다. 나는 오늘 콩국수 필이 아니라 남편 것만 사러 바로 옆 국밥집으로 들어가 콩국수를 시킨다. 나의 국밥집 최애 메뉴는 황태해장국과 굴국밥이지만 오늘은 콩국수만 사기로 한다. 나는 가게에 만들어놓은 카레를 먹기로 한다. 콩국수가 포장되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사장님이 출근하셨다. 사장님께 반갑게 인사하고 황태해장국과 굴국밥에 대한 내 생각을 또 줄줄이 얘기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내가 엄청 오지랖 같은데 그렇지 않다. 나는 말수가 없는 편이다. 단지 해야 할 말이 생기면 정말 기운차게 성의를 다해 열심히 말할 뿐이다. 머리를 굴리며 진지하게 얘기하는 모습 때문인지, 사장님들도 말이 길어진다. 나나 사장님들이나 사실 하고 싶은 말들이, 나누고 싶은 마음들이 많은 거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각박한지 어깨를 마주하고 함께 장사하는데도 다들 경쟁하고 견제하느라 급급하다. 어쩌면 그래야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내가 장사 생리에 맞지 않는 사람인 줄은 알지만, 어쨌든 나는 진즉에 그러기를 포기했다. 옆 가게가 장사가 잘되면 ‘좋겠다, 나도 힘내야지!’가 전부고, 옆 가게 장사가 안 된다 싶으면 슬쩍 아이스크림이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같이 ‘아이고, 아이고!’ 하고 ‘에휴, 그래도 버텨 봐요 우리’, 하고 홀롤로 가버린다. 국밥집 사장님과도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 황태해장국과 굴국밥을 묶어서 조금 고급진 상차림으로 한정식 집을 론칭해 보아도 좋겠다고 내 생각을 넌지시 건네 본다.

“아리랑이나 고궁 같은 느낌으로 말이에요. 사장님네 굴국밥이랑 황태해장국은 진짜로 맛이 너무 고급지거든요. 분당이나 판교에서라면 진짜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콩국수 그릇을 들고 잘 먹겠다 인사하고 또 홀롤로 가버렸다. 가게로 돌아가 콩국수가 담긴 용기 뚜껑을 열고 남편이랑 늦은 점심을 먹을 준비를 하는데 국밥집 사장님이 우리 가게로 불쑥 들어오더니 또 아이스크림 두 개를 카운터에 턱 놓으시고는 휙 가버리신다. “아이고, 사장님! 안 주셔도...!”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님은 사라졌다. 나와 남편은 카운터에 놓인 아이스크림 두 개를 냉동고에 넣으며 이미 냉동고에 자리 잡은 아이스크림 8개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졸지에 아이스크림털이 부부가 되어버렸다.

점심을 다 먹고 저녁 장사 준비를 마치고 잠시 짬난 시간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 어제오늘 일을 생각한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동시에 마음속에 슬픔이 자리 잡는다. 상담 선생님, 이자카야 사장님, 국밥 사장님, 그리고 오코노모야키 사장님, 슈퍼 식구들, 지하 주차장의 관리소 부장님과 정신의학과 간호사 아가씨, 원무과 부장님, 당구장 손님 1, 2, 3, 입시학원 학생, 스크린골프장 사장님, 커피숍 사장님... 모두 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인연들이다. 깊지도 않고 너무 얕지도 않은 관계를 맺으며 나는 하루하루 살아나가고 있다. 좋은 인연, 좋은 사람들, 마음도 여리고 정도 많은데, 사느라고 다들 자기만의 갑옷을 두르고 있기에 이 관계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더 깊이, 진하게 우러날 수 있을지, 당장에 나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일까 이 슬픔은. 사람을 만나는데도, 온전히 마음을 줄 수 없음이 슬픈 것인지, 모든 것은 결국 한결같지 않다는 진실 때문에 슬픈 것인지, 내게 온 인연들을,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만든 인연들을 내 손으로 직접 깨버리는 것은 아닌지, 내 안에 있는 슬픔 때문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명치 깊숙이 찌르는 아픔을 달래 본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매장에 흘러나오는 나얼의 <바람기억> 노랫말이 마음에 소금을 들이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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