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비누 Dec 07. 2016

12월에는 이 영화와 이 음악을

<이터널 선샤인>과 <The Long and Winding Road>

12월만의 '추운 냄새'가 있다. 내게 이 '추운 냄새'는 '향'(Flavor)이 아니라 문득 떠오르는 '기억' 같은 거다. 이 '기억'은 신체의 오감을 충족하며 머릿속에서 재현된다. 가령 '차가운 새벽에 따뜻한 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영화를 보는 상황'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 추운 냄새를 뒤따르는 충실한 신하들이 있다. 이 신하는 나의 '기억'을 성냥개비 소녀의 성냥처럼 활활 타오르게 한다. 나의 추운 냄새를 뒤따르는, 나만의 것이지만 결코 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신하들 중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음악 'The Long and Winding Road'(Beatles의 원곡을 John Pizzarelli가 편곡한)를 소개하겠다.

John Pizzarelli - MEETS THE BEATLES

Beatles의 노래 중 유독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추운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처럼 그 효과를 John Pizzarelli가 느낀 걸까, 이 편곡 버전은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원곡과 달리 크리스마스 트리의 반짝이는 불빛처럼 피아노가 반짝반짝 빛나고, 투박했던 브라스 대신 하얀 눈 같은 포근한 스트링이 전체를 덮는다. 행복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밤이 생각나는 이 곡은 박자에도 숨은 효과가 있다. 아마 시시각각 바뀌는 템포에 박자를 맞춰 따라가려고 하면 길을 잃을 것이다. 이 곡은 정확한 틀에 박힌 박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컬의 유무에 따라 당겨지기도 하고 밀리기도 한다. 마치 '길고도 험한 길'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이 곡 제목을 걷는 발걸음 같다.


12월은 집에 돌아가는 길을 온갖 '기억'들로 바꿔준다. 12월이 오기 전에도 길은 항상 거기에 있었을 텐데 'The Long and Winding Road'로 타오른 이 '추운 냄새'는 지나온 '기억'으로 똑같은 길을 다른 장면으로 보여준다.

'이터널 선샤인'

"너와 함께한 시간을 다 없애고 싶어. 너무 힘들고 지치고 기억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12월만 되면 시간은 자꾸 역행한다. 우리는 올 해의 첫눈을 이미 1월에 보았는데도 12월에 내리는 눈을 보고 '첫눈'이라고 부른다. 망각일까? 12월의 '첫눈'은 1월과 2월, 겨울 동안 펑펑 날리며 말썽을 부린 그 눈들과는 '냄새'가 다르다. 영화 속 서로의 모든 기억을 망각한 두 남녀는 이별 앞에서 냉담했지만 잃어가는 '기억' 속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기억하려 애쓰고 발버둥 친다. 그렇다, 우리는 '첫눈'의 '냄새'처럼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도 다 망각되고 다시 '기억'되니까. 오히려 시간이 지나서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걸지도 모른다. '첫눈'이, '기억'이 그렇듯 사랑도 그럴 거다.


"너와 함께한 시간을 전부 다 기억하고 싶어. 그럴 수 없음을 이젠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이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바꿔 봤다. 우리는 잊히는 것이 아닌 기억하는 것으로 남아야 하니까.


작가의 이전글 바뀌지 않는 세상과 항상 변화하는 시대의 공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