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캠퍼스를 찾았다. 봄학기가 시작되어 학생들이 가득하다. 뺨 위에 얹고 온 벚꽃색 블러셔는 진짜 꽃봉오리 같은 후배들 앞에서 머쓱해진다. 회사 상사들이 나를 볼 때 이런 느낌이려나. 어느새 나도 학생이 부러운 직장인이 되었다.
약속한 술집에 친구들이 하나씩 도착했다. 정장을 입은 태가 다들 멀끔하다. 내가 알던 꾀죄죄한 모습들은 모두 사무실에 두고 퇴근했나 보다. 신입생 시절 우리가 공유했던 시기를 선명히 기억한다. 되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될 수 있을 것 같던 시절. 우리는 전공 수업을 빼먹는 대신 잔디밭에 둘러앉아 의리를 외쳤다. 공학물리 과목을 수강철회한 애와, 꼬박꼬박 출석하고도 D를 맞은 애와, 아예 시험에 불참해 F를 맞은 나 중에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해 얘기하던 시기였다. 그랬던 우리가 돈을 번다니.
다음날 친구의 자취방에서 눈을 뜬다. 가시지 않은 소맥의 여운에 뭉기적댄다. 퉁퉁 부운 눈 위로 햇빛이 비춘다. 오늘은 아침부터 화창하구나. 날 좋은 김에 학교나 보고 갈까. 컨디션을 주워 들고 캠퍼스 정문으로 향해본다. 한적한 주말의 고요한 공학관. 그 앞에 현수막이 걸려있다.
[변리사 시험 설명회]
6년 전, 저기서부터 내 수험생활이 시작되었지.
지적 감수성도 MBTI로 표현할 수 있다면 나는 파워 M(문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공계 선호 현상이 대한민국 입시계를 강타했을 때, 하필이면 나는 문이과를 선택할 시기인 고등학생이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등쌀은 핑계였다. 사실은 명문대 가기 쉽다는 얘기에 귀가 팔랑거려 이과에 진학했다. 나는 입시 트렌드에 영혼을 판 대가로 적성에 안 맞는 과학 공식에서 허우적댔다. 대신 학교가 파하면 활자 속으로 도피했다. 몇 안 되는 문과 친구들과 교내 도서실을 기웃거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다 고 3 때는 개발도상국에 댐을 짓는 사람들의 얘기를 읽고는 눈이 번쩍였다. 나도 공학계의 슈바이처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토목 공학과에 진학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전공을 택했다는 말이다.
대학생이 되고는 신나게 놀았다. 밴드 동아리에도 들어갔지만 잘생긴 선배의 가르침을 받아도 내 드럼 실력은 도통 늘지 않았다. 그래서 학술 동아리로 쫓겨났다. 나는 그곳에서 '학'은 못해도 '술'은 잘해서 홍보부장의 감투를 얻었다. 나름 임원이라고 신입 기수의 면접을 보기도 했다.
어느 봄학기, 면접을 보러 온 후배는 자신의 꿈을 말하면서 '변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나보다도 어린후배가 되고 싶은 직업이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충격은 뒤풀이 때 마신 술로 바로 잊혀졌지만.
어느덧 졸업반이 되고 친구들은 하나둘씩 진로를 정하기 시작했다. 원체 머리가 좋았던 애는 사무관 시험을 보겠다고, 부모님이 의사였던 애는 의전원에 가겠다고, 또 누구는 건설사에 이력서를 내겠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 역시 불안한 마음에 취업사이트를 들락거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을 나오는 길이였다. 재미없는 전공 공부를 하느라 마음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건물 앞에는 수많은 채용 공고들이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빼꼼, 변리사 설명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문득 '변리사'라고 말하던 후배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걔는 왜 변리사가 되고 싶었지? 변리사가 그렇게 좋은 직업인가? 후배는 공학물리 A를 맞은 모범생이었다. 나는 그렇게 변리사 설명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끌렸던 점은, 변리사 시험의 과목이 주로 '법'이라는 것이었다. 법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은 내 안의 잠재된 문과적 성향에 불을 지폈다. 수험생 풀이 대부분 공대생이니만큼 어쩌면 내게 유리한 시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나는 큰 고민 없이 그날로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볍게 시작한 것 치고는, 3년. 고등학교를 한번 더 다닌 셈이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