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리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선포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의외로 미적지근했다. 전문직이 되겠다는 기특한 마음을 왜 반겨주지 않냐 물어봤더니 "너 공부하면 힘들까봐" 그렇단다. 엄마 아빠는 나를 어리게만 본다고 투덜대며 서울로 상경했다. 물론 그래놓고 자취방 월세며 학원비에 교재비는 몽땅 엄마 카드로 결제했다. 고맙습니다.
나의 수험 생활은 단순했다. 중앙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온종일 공부만 하면 됐다. 죽기보다도 쓰기 싫었던 -6.00 도수의 두꺼운 안경을 껴야 하는 건 덤이었다. 그래도 수험 생활의 초반부는 꽤 할만했다. 오랜만에 펜을 잡은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열정도 있었다. 시험을 치겠다는 결정 자체도 오롯이 나의 의지인 데다가 24시간을 마음대로 계획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확실히 중고등학교 때의 수동적인 시절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평일에 빡세게 공부를 하고 나면 주말에는 맥주를 마셨다. 천 원짜리 필라이트가 내겐 천국의 맛이었다. 몽롱하게 취한 상태로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시간이었다.
변리사 시험은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모두 붙어야 최종 합격하게 된다. 내가 1차 시험을 준비하며 법조문을 외우는 동안 초등학생 때부터 키웠던 강아지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몇 달 뒤에는 할머니도 떠났다. 외국에서는 이상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이름도 생소한 중국 도시에서 발견됐단다.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 안에서 정지한 채로 2차 수험생이 되었다. 첫 번째 시험을 낙방하고,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면서는 꽤 열심히 했다. 다행히도 예상처럼 법공부는 재밌었다. 나름 적성에도 맞는 듯했다. 하지만 흥미와 적성도 못 이기는 것이 시험의 압박감이었다. 나는 바깥 사정이 어떤지도 모른 채 마스크를 쓴 채로 가끔은 울면서 공부했다.
'돌아보면 다 아름다울 시간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가 되면, 이 순간들을 미화할 것이다.' 책상에 붙여놓은 포스트잇 문구였다. 나는 그 앞에서 쪽잠을 자며 순간들을 버텼다. 초반에는 하루에 열 시간 넘게 공부했다는 사람들을 보며 주눅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시험이 다가오자 내 스톱워치에 찍히는 시간도 열두 시간이 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와 공부 오래 했네'하고 뿌듯했는데 나중에는 보람마저 둔해졌다. 이렇게 했는데도 시험에 떨어질까 봐 무서운 마음이 더 컸다.
취하면 특허법 판례를 읊는 술주정이 생겼다는 것을 친구들로부터 듣게 되고, 영화관뿐만 아니라 시내버스에도 조조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에너겔 볼펜심을 한 번에 다 쓰는 데는 세 시간이면 충분함을 알게 되고, 그렇게 글씨를 오래 쓰면 손가락에 염증도 생기는 걸 안 지 삼 년이 지났을 때.
[변리사 시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변리사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가족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고 아직 포스트잇이 붙여진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기쁨보다는 안도감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