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리사 합격 발표가 나면 곧바로 바쁜 나날이 시작된다. 친구와 먼 친척에게까지 합격 소식을 전하느라 엄마의 핸드폰은 불이 난다. 내 카톡방도 쉴 새 없다. 금세 합격생 단톡이 만들어지고, 뒤이어 학교별, 나이별 톡방이 파생 상품처럼 줄줄이 생성된다. 수험 시절 동안 카톡친구라곤 스터디카페 사장님 밖에 없던 내겐 퍽 낯설다. 뒤이어 합격자 환영회도 열린다. 우상 같던 선배 변리사가 내게 '동료가 되어 반갑다'며 짠을 해준다. 벅차다. 은행에서는 곧바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준다. 월 몇십만 원 용돈으로 버티던 체크카드가 순식간에 한도 팔천의 신용카드로 업그레이드되는 순간이다. 짜릿하다. '찌질했던 내가 이 세계에서는 변리사?' 라이트노벨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곧바로 채용도 시작된다. 우후죽순 열리는 취업박람회에서 길 잃은 고양이마냥 쭈뼛대다가 언젠가 이름을 들어본 듯한 특허사무소 부스에 슬쩍 앉는다. "너무 늦게 지원하시는 거 아시죠? 다른 지원자들은 진작에 면접 일정까지 잡혔어요" 인사담당자의 엄포에 부랴부랴 이력서를 써낸다. 이 모든 게 합격한 지 삼일 만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러나 나는 예외였다.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 곧바로 취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처럼 대학생 신분으로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이들을 '학리사'라고 부른다. 학리사의 지갑을 열면 학생증과 신용카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가 공존한다. 이걸로 우리는 학생의 자유와 변리사의 여유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시간과 체력은 있는데 돈이 없는 게 청춘이라는 말은 학리사 앞에서 무력하다.
하지만 학리사는 코로나 앞에서 무력했다. 해외여행을 다니고 밤마다 클럽을 투어한 에피소드 따위는 없다. 물론 네 명 이하로 모여 밤 열 시 전에 헤어지는 만남도, 썰을 풀자면 A4 한 장은 거뜬하나 우리 엄마 밖에는 아무도 안 궁금해할 것 같아 생략한다.
1월에는 연수를 받는다. 총 6주 동안 대전에 모여 낮에는 교육을 듣고 밤에는 술판을 벌인다. 마치 대학교 신입생 시절과 비슷했다. 새내기가 첫 만남 때 '어느 전형으로 대학 왔냐'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처럼, 갓 합격한 변리사들은 '수험생활 몇 년 했냐' '어느 강사책으로 공부했냐' 따위로 유대감을 쌓았다. 그렇게 술병도 쌓였다. 대전에는 성심당만큼이나 칼국수 집이 많고, 그런 곳에는 보쌈이 또 별미이고, 보쌈에는 막걸리가 제격이라는 걸 배웠다. 다음 날 아침이면 칼국수 집만큼이나 유명한 국밥 집에 가서 아빠한테만 전해 듣던 해장술을 비로소 체험했다. 이런 일상이 평일 내내 이어졌다. 월요일은 나이, 화요일은 전공, 수요일은 학교, 목요일은 동아리 모임에서 술을 마셨다. 대학생 때보다 더욱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놀았다. 새내기와 달리 이제 삼십 대인 그들은 지금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놀 수 있는 시기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장을 샀다. 연수원 앞의 포토존에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대충 근엄해 보이는 자켓을 걸치고 '지식재산강국의 주역! 바로 당신입니다!' 더 근엄한 문구가 쓰인 돌멩이 앞에서 브이를 들었다. 이백명의 변리사가 들어있는 단톡방에는 모두가 돌멩이 프사로 통일되어 있었다. 도배되는 돌멩이에 누가 얘기하는 건지 구별도 어려웠다.
어느 수요일, 술자리가 파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심야 택시를 탔다. 내 돌멩이 프사를 찍어준 J 오빠와 함께였다. 그는 합격하자마자 취업해서 벌써 두 달째 근무 중인 수습 변리사이기도 했다. J는 내게 졸업 후 가고 싶은 특허사무소가 있는지 물어봤다.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그러자 J는 자기가 다니는 특허사무소가 왜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택시가 엑스포공원을 지나고 대전시청을 지나서 숙소까지 도달하는 동안 PR은 삼십 분째 이어졌다. 나는 사십 분쯤에 알겠다고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택시 기사님마저 이력서를 쓸 기세였다.
연수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옷장을 열었다. 새로 산 정장을 두 번째로 입어볼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