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소를 다닌 지 세 달쯤 되니, 드디어 명세서 작성 업무가 배정되었다. 명세서란 쉽게 말해 '특허 문서'이다. 특허란 현금, 부동산, 금과 같이 재산권의 일종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따라서 무형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이를 문서화하여 문서에 쓰인 글을 바탕으로 권리를 인정한다. 그 문서가 바로 명세서이다. 명세서를 쓰는 일은 변리사의 가장 대표적인 업무이다. 명세서를 토대로 특허 등록이나 소송 같은 모든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변리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업무 역시 십중팔구 명세서 작성이다. 고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OA가 힘들다고 찡찡댈라 치면 먼저 입사한 동기들이 '명세서가 백배는 더 힘들다'라고 허세를 부리곤 했다. 그래서 수습시절 명세서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존재였다.
나에게 처음 배정된 명세서는 냉장고에 관한 것이었다. 클라이언트가 보내준 자료가 도착했다. 이를 토대로 미팅을 준비하라고 한다. 파일을 열어보니 냉장고 사진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우리 발명은 냉장실 조명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냉장고 안에 조명이 있는지조차도 몰랐던 나에게는 별나라 이야기다. 대충 자료를 훑어보고 미팅 준비를 끝냈다고 팀장님께 말씀드리니 발명자에게 물어볼 질문은 없냐고 하신다. 발명이 워낙 좋아서 없겠는데요? 팀장님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한다. 나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간다. 호기심 장착 렌즈를 눈에 갈아 끼운 채로 자료를 빤히 바라보니 질문이 한 열 가지는 나오는 것 같다. 첫 번째 질문을 작성한다. "내상(linear)의 뜻이 뭔가요?" 다시 또 빠꾸를 먹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냉장고의 내상이란 내부 케이스를 의미하는 용어였다. 핸드폰 발명에 대고 '액정의 뜻이 뭔가요?'라고 묻는 것과 동급인 셈이었다. 무식하니까 당당한 나는야 수습.
발명자 미팅을 하러 가는 날. 사무소에 첫 출근할 때의 마음처럼 정장을 꺼내 입고 버스에 올랐다. 미팅장소에 도착하니 발명자가 먼저 나와있다. 나는 전날 팀장님이 일러줘서 겨우 챙긴 명함을 주섬주섬 꺼낸다. '** 특허 사무소 / 백고므 변리사' 엄마 앞에서 자랑했던 거 빼고는 공식적으로 처음 건네보는 명함이다. 발명자가 내 명함을 빤히 쳐다본다. '수습인 거 들켰나' 나는 괜히 찔려 딴청을 부린다.
발명자의 설명을 듣다 보니 대학교 전공수업에서 봤던 똘똘한 선배들이 떠오른다. 기존 시제품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냉장실과 냉동실의 위치도 버벅이는 나에게 친절한 발명자는 냉장고의 작동원리부터 개발 히스토리까지 설명해 준다. 끄덕끄덕. 이런 것이 전문가의 포스인가. 나는 음오아예 따위의 리액션 밖에 할 수 없어서 머쓱했다. 대략 한 시간 정도의 미팅이 끝나고, 발명자는 '변리사님 잘 부탁드린다'며 꾸벅 인사를 한다. 곧바로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저는 변리사긴 한데 아직 쪼랩이에요. 심지어 이게 처음 쓰는 명세서에요. 멀어져 가는 발명자 등 뒤로 고해성사를 하고 싶었다. 회사로 돌아가는 내내 걱정이 들었다. 내가 이 발명을 맡아도 될까? 이렇게 똑똑하신 분이 만든 제품을 내가 망치는 게 아닐까? 야심차게 꺼내 입은 정장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