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명세서 작성
회사에 돌아온 나는 컴퓨터를 켠다. 발명 미팅을 하고 왔으니 이제 명세서를 쓸 시간이다. 몇 시간 전 보고 온 발명품의 잔상이 잊힐세라 눈을 지그시 감고 복기해 본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미팅을 하며 녹음한 음성이 재생된다. 오늘부터는 빈지노의 꽂히는 랩 대신 발명자의 나긋나긋한 설명이 bgm이다. 나는 명세서 샘플 파일을 클릭한다. 십년차 선배가 클라이언트에게 극찬을 받았다는 명세서다. 작성자에 쓰여진 선배의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을 채워 넣는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시작이다.
명세서에 들어갈 내용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발명의 설명'이다. 말그대로 발명에 대한 설명을 쓴다. 냉장고를 예로 들자. 우리가 특허를 받고자 하는 발명은 냉장고 중에서도 '조명'에 대한 것이라도, 발명의 설명에는 냉장고의 구성이나 작동 원리 같은 전반적인 내용을 먼저 적는다. 그 후에서야 냉장고의 조명, 즉 우리 발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시작된다. 조명을 어디에 달려고 하는 것인지, 어떤 원리로 작동이 되는지, 무슨 부품을 사용하는지, 이로 인한 효과가 무엇인지. 나는 머릿속 지식을 영끌하여 우리 발명을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해 본다. 십년 뒤 냉장고에 달린 조명을 상상하며 우리 발명의 장점을 호소해 본다.
두 번째는, '도면'이다. 아무래도 발명의 설명은 글로 쓰이다 보니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럴 때 발명품을 직접 그려놓은 도면을 참고하면 이해를 쉽게 도울 수 있다. 도면을 그리는 것은 캐드작업을 요하기 때문에 사무소에 계신 도면사님이 도와주신다.
세 번째는, '청구범위'다. 앞서 말한 발명의 설명의 분량은 수십 장에서 수백 장 정도 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특허권으로 보호받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몇 문장으로 요악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을 특허로 청구하려는 범위, 즉 청구범위라고 한다. 특허권은 청구범위에 적힌 몇 문장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발명의 설명은 청구범위를 해석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될 뿐이다. 따라서 명세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청구범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청구범위를 쓰는 데 정답이 없다고는 하지만, 오답은 있는 듯하다. 내가 멋모르고 쓴 첫 번째 청구범위는 '발명의 특징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고 까였다. 쭈뼛쭈뼛 고쳐가자 이번에는 '권리가 너무 좁아질 것 같다'고 빠꾸를 먹었다. 세 번째에는 '타사 제품과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고, 네 번째에는 '영문으로 번역할 경우 표현이 어색하다'고 지적을 받았다.
마음에는 1도 들지 않지만 마감일이 임박해 어쩔 수 없이 청구범위를 확정하고 나면 이를 토대로 발명의 설명을 쓰고 도면을 만든다. 도면을 만들 때는 도면사님과 컨택이 이루어진다. 특허 사무소 내에서 몇 안 되는 협업인 셈이다. 수습인 나는 발명 파악도 아직 끝내지 못한 상태로 얼렁뚱땅 도면부터 맡겼다. 도면사님이 며칠 동안 공들여 도면을 완성하고 나면 '다른 각도로 다시 그려주세요' 힘 빠질 요구를 했다. 도면사의 야근이 확정될 때마다 나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청구범위를 여러 번 고치는 건 그냥 내가 그만큼 밤을 새우면 되니까 괜찮았다. 그런데 나 때문에 다른 직원까지 고생을 할 때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수많은 도움에도 불구하고 '명세서 최종본_진짜최종_진짜최최종.dox' 파일은 여전히 미흡한 것투성이다. 며칠만 더 주면 기깔나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해진 마감일은 야속할 뿐이다.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클라이언트에게 명세서를 송부한다. 이제는 내 손을 떠났다. 비로소 특허의 진짜 주인인 발명자가 읽어볼 차례이다. 생각보다 발명자의 반응은 다양하다. 명세서의 모든 부분에 빨간 밑줄을 치고 '이건 무슨 뜻인지?' 묻는 코멘트를 남기는 분도, 나조차 발견하지 못한 오타를 잡아주시는 분도 계신다. 그러나 대부분은 별다른 피드백이 없다. "변리사님이 알아서 잘 작성해 주셨겠죠.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야근과 카페인과 수많은 고민이 녹아있는 명세서는 스르륵 출원이 된다.
첫 명세서를 송부하고 나면 선배들은 축하한다고 술을 사줬다. 나는 그동안 했던 고생을 소주와 함께 털어 마시며 후련한 척했지만, 집에 돌아가니 기름 냄새와 함께 찝찝한 기분이 올라왔다. 일이 끝내지긴 했는데, 과연 제대로 끝낸 건지는 모르겠다. 냉장고 전문가인 발명자는 특허의 전문가인 나에게 알아서 진행해 달라고 맡겼다. 그러나 아직 전문가 타이틀에 자신이 없는 나는 일에도 확신이 없다. 수습 변리사는 클라이언트의 믿음을 받으며 마음이 무거워질 뿐이다.
또 새로운 발명이 나오고, 또 새로운 명세서를 쓴다. 도면사님에게 n번째 수정한 도면을 재차 맡긴다. 넉살이 좋지 않은 나는 용기 내 말해본다. "자꾸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자 씩 웃으며 말씀하신다. "원래 수습 땐 다 이래요. 변리사님의 선배들은 이거보다 더 심했어요." 나의 마음에는 파장이 인다. 명세서 샘플의 기준이 되고, 허접한 내 청구범위를 고쳐주는 나의 선배들. 클라이언트 앞에서도 당당하고 스마트한 모습을 보며 나는 존경심이 들곤 했다. 그러한 선배들도 모두 수습 시절이 있었구나. 수습 변리사의 어깨를 짓누르던 돌멩이 하나가 툭 하고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