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고므 변리사 Jul 06. 2023

변리사가 디지털 노마드였다니

#6 플렉서블 근무/재택 근무

대부분의 특허사무소는 플렉서블 근무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정해진 시간 없이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또 세부적으로는 각 사무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하는 듯하다. 우리 사무소는 오전 중으로 출근해서 9시간을 일하고 각자 퇴근하면 되는 구조이다. 어떤 곳은 근무시간과 관련해서 아예 터치를 안 하는 곳도 있다. 


처음 입사했을 때 팀장님은 플렉서블 근무제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서, 그래도 수습기간 동안에는 9시 반까지 회사에 도착할 것을 제안하셨다. 9시도 아니고 10시도 아닌 애매한 시간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것이 팀장님의 출근 시간이라는 사실은 입사한지 하루만에 알게 됐다. 


나는 겁이 많았다. 드라마 미생으로부터 사회생활을 배워서 그런 것 같다. '상사가 정해준 출근시간보다는 더 일찍 와야겠다.' 나는 한 시간이나 더 일찍인 8시 반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회사로부터 꽤 먼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따릉이와 지하철과 버스라는 3종 교통수단을 갈아타면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난 셈이다. 그렇게 출근해서 일하고 아직 업무에 익숙지 않아 쩔쩔매다 보면 야근하고, 다음날 피로가 가시지도 않은 채 또다시 새벽에 일어나고. 업무 효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무대포로 다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열정은 몇 달 만에 가셨다. 수습 변리사에게 중요한 일은 회사 말고 또 있다. 바로 친구들을 만나는 것. 생애 처음 받는 월급을 쓰느라 바쁜 술자리가 이어졌다. 이때부터 나는 플렉서블 근무제를 flex하게 이용하게 되었다. 술 마신 다음날은 푹 늦잠을 자버렸다. 철야 근무를 한 날은 알람을 맞추지도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나의 근태는 들쭉날쭉했다. 때로는 낭만으로 쓰이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유난히 하늘이 맑으면 나는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조깅을 하러 나갔다. 구두를 신고 지하철로 걸어가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집에 와 찬물 샤워를 하고 나서, 아직 고요한 도서관에 들러 책까지 빌리고 나면 성공한 전문직이 된 것 같았다. 


1년 넘게 프리한 출근을 하다가 요즘은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하고 있다. 일상의 변주보다는 루틴의 중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올빼미보다는 아침형 인간에 가까운 듯하여 웬만하면 일찍 출근하려고 한다. 회사에 도착하면 미리 와있는 얼리버드 변리사들과 함께 모닝커피 타임을 가진다. 내 입맛엔 블루보틀보다 맛있는 3천원짜리 카페라테를 들고 업무를 시작한다. 퇴근도 출근만큼 일찍 하려고 하는데, 아직 요거는 잘 못 지킨다.


변리사는 재택근무도 꽤나 자유롭다. 예전에는 몇몇 사무소들만 재택을 허용하였지만, 코로나 이후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우리 사무소 역시 대세에 거스르지 못하고 주 1회 재택근무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카누를 탄 채로 집에서 일을 해보려다 침대의 중력에 패배한 뒤로, 근처 도서관에 출근하기도 했다. 그러다 요즘은 카페에서 일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토닥거리다 보면 진짜 디지털 노마드가 된 느낌이 든다.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면 평일 오전에도 핫플 카페의 명당자리에 앉아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이 정도면 재택근무라기보다는 재'카'근무 같지만, 요즘 내 낙이 이번주 재카근무는 어디서 할지 고르는 것이다.


이렇게 업무 환경이 자유로운 것이 변리사의 큰 장점 같기도 하다. 남들과의 협업이 크게 필요하지 않고 문서 작성이 업무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특성상,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육아를 하는 변리사들은 이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요즘은 재택근무 또한 복지의 일환으로 여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어느 특허사무소는 전면 재택근무를 내세우기도 한다.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당장 노트북을 들고 지방에 있는 본가에 내려가고 싶다. 가족들과 함께 퇴근하고 같이 저녁 차려먹는 평일의 일상을 공유해보고 싶다. 제주도 한 달 살기도 해보고 싶다. 동네 토박이만 안다는 맛집에서 점심을 사 먹고 바다에 가서는 비수기 요금으로 서핑을 배우고 싶다. 미국에서 살아보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한 꿈만은 아닌 것 같다.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지.




이전 05화 수습별의 첫 업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