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리사는 서로를 '변리사님'으로 호칭한다. 그걸 보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귀여운 버전으로는 '별'이라고도 부르나 나는 스타를 운운하기에도 항마력이 부족했다. 같은 전문직인 의사나 회계사가 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로를 선생님으로 부른다는데, 우리는 왜 직업 자체로 호칭하는 것인가. 과잉된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시니컬한 척은 다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별 수 없었다. 일반 회사와 달리 특허사무소 내 변리사들은 직책이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생을 보며 틈틈이 예습한 위계질서와 그에 따른 호칭은 써먹을 필요가 없어졌고, 그 대신 나는 사십 대 상사이건 이십 대 동기이건 이름 뒤에 '변리사님'을 붙이는 데에 적응했다. 쓸데없는 고집은 입사한 지 한 시간 만에 꺾였다.
따릉- 책상에 놓인 전화기가 울린다. 받아야 되나 망설이지만 내 책상에 놓인 것이므로 저 전화의 수신처는 나일 테다.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전화기 작동이 잘되나 확인차 걸어본 팀장님이었다. 동기들은 뒤에서 킬킬 웃는다. '쟤 방금 여보세요 란다' 얼굴이 빨개진 나는 재빨리 신입사원 전화예절을 지식인에 검색한다. 자기 이름과 직위부터 밝히라는 태양신 답변에 눈이 질끈 감긴다. 이제는 남들 뿐 아니라 나를 지칭할 때도 '변리사'라는 발음을 해야 한다. 으악.
나, 백고므 '변리사'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OA 대응이었다. OA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특허의 전반적인 프로세스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발명을 해서 특허청에 접수하는 것을 '출원'이라고 한다. 곧바로 특허 등록되면 참 좋겠지만, 대부분 거절된다. 이렇게 특허청에서 날아오는 거절에 대하여 'Office Action', 줄여서 OA라고 부른다. 변리사는 OA에 굴하지 않고, 특허를 등록시키기 위하여 특허청을 설득할 문서를 작성한다. 이것을 OA 대응이라고 한다.
나에게 맡겨진 OA는 에어컨에 관한 것이었다. 일단 OA를 분석하기 위해선 발명 파악부터 해야 한다. 에어컨에 관해서라면 여름철 설정온도는 18도가 국룰이라는 것 밖에 모르던 나는 냉매의 원리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루가 다 갔다. 둘째 날은 다른 회사의 에어컨에 대해 파악하느라 온 시간을 썼다. 특허청은 보통 OA를 발행하면서 '당신이 출원한 A 발명은 기존의 B 발명과 비슷해요'라는 취지의 거절을 하게 된다. 따라서 변리사는 우리의 A 발명뿐만 아니라 타 회사의 B 발명도 분석하고 차이점을 주장해야 한다. B 발명의 문서를 열어본다. 아뿔싸, 영어로 써져 있다. 나의 빛바랜 토익점수를 뒤로 한채 구글 번역기에 도움을 청한다. 셋째 날, 발명의 분석을 마친 나는 특허청의 거절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는 보고서를 써 내려간다. 해당 거절이유는 부당합니다, 솰라솰라 어쩌고.. 수험생 시절 끼고 살았던 판례집을 들춰보며 반박문을 완성한다. 그리고 넷째 날, 클라이언트에 보고서를 송부했다.
일주일 뒤 클라이언트에게 답변이 왔다.
[백고므 변리사님, 보내주신 의견안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수정해서 재송부 바랍니다.]
클라이언트에게 까임과 동시에,
그렇게 낯간지러워했던 변리사 호칭을 공적으로 처음 불린 순간이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서로를 '별'이라고 부를 때는 못 느꼈던 진짜 변리사가 된 기분이었다. 클라이언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와서 변리사가 되었다. 백고므 변리사는 비장한 마음으로 보고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다시 에어컨의 작동원리를 공부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으니, 내 뒤로 상사가 슬며시 에어컨을 켜주고 퇴근한다. 야근의 첫 단추가 꿰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