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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고므 변리사 Oct 07. 2023

수고하셨습니다, 백고므 변리사

#12 이직과 퇴사

어느 날 이직의 바람이 내 마음에 불어왔다. 현재 사무소에서 맡은 주된 업무는 발명에 대한 명세서를 작성하는 일인데, 이것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흥미가 없는 일을 잘하기 위해 밤을 새우는 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나는 즉흥적으로 연차를 내고 평소의 출근길과 다른 곳을 향했다. 포멀한 블라우스를 입은 채였다. 그렇게 다른 사무소에 면접을 봤고, 호기롭게 붙어버렸다. 합격하고 나서야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곳인가?' 나는 그 회사의 면접에서도 열정러의 가면을 쓰고 이 한 몸 바쳐 워커홀릭이 되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터였다. 다음날 전화를 걸어, 입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깨달았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대입부터 취업까지 써냈던 자기소개서가 무수하지만, 내 진실된 모습을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단점인 척하는 장점 말고 진짜로 내가 누구인지 직면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들으면 입 벌릴 만큼 좋은 네임밸류의 회사를 다니고 싶은지, 그런 거 없어도 나만 즐거우면 만족하는지. 돈을 많이 벌고 싶은지, 그보다는 건강을 더 챙기고 싶은지. 그에 맞는 일터는 어디일지 생각해야 했다.


역동적이고 발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서 VC 심사역에 지원하기도 했고, 어려서부터 내재했던 문과적 기질을 이제라도 발휘하기 위해 상표 변리사에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결국 변리사의 전형적인 업무 중 하나를 택하였다. 우리 사무소가 국내 클라이언트를 담당했다면, 역으로 해외 클라이언트를 담당하는 이른바 인커밍 특허사무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회사가 힘들다는 생각 일 년, 나는 어떤 일이 맞을까 하는 고민 일 년, 그러나 퇴사와 이직이 결정되는 것은 단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를 회사에 통보하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상사들은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였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 쪽은 나였다. 선배들은 퇴사할 때마다 '퇴사 통보를 하고 나면 그때부턴 후련해진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퇴사가 결정되자 마음이 더욱 힘들어졌다.


힘든 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친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맞는 일도 참으면서 하는데, 왜 나만 견디지 못할까. 이직처에 대한 선택이 옳은 것인지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 업무를 받고 마지막 출장을 가던 날, 하필이면 늦여름 날씨가 산들거려 '이 길도 마지막이겠구나' 센치한 마음에 잠겼는데, 면담하는 발명이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IML 공법이어서, '역시 이 일은 내게 맞지 않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퇴사 통보 후 멋쩍은 마음에 요리조리 팀장님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은 단 둘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팀장님은 말씀하셨다. 나쁜 선택이란 없다.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해라. 문득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쌩뚱맞은 토목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것,  졸업하며 잘 알지도 몰랐던 변리사를 선택한 것. 모두 중요한 선택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더 좋은 쪽으로 혹은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를 살아내는 것은 결국 나다. 어딜 가서도 잘하면 된다. 부담이 되는 말일 수 있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출근일, 족히 백 명은 될 직원 분들께 인사를 돌았다. 눈인사만 주고받았던 분들도 덕담과 함께 그동안 수고 많았다는 말을 건넸다. 그 예의상의 말이 내게는 또 찡하게 다가왔다. 왜 평소에 더 다가가지 못했을까, 조금 더 용기 내 볼 걸. 나는 아마 새로운 회사에 가서도 언젠가 똑같이 할 후회를 해보았다. 사무장님은 '새로운 회사는, 백고므 변리사가 있어서 너무 좋겠다'라고 하셨다. 그 말은 노랫말처럼 내 마음에 들어왔다. 두둑한 퇴직금을 담은 봉투에 예쁜 캘리그래피로 쓰인 글귀 같았다.


떠나는 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주말마다 출근해도 질리지 않던 양재역, 온갖 마감을 알리는 포스트잇으로 도배된 내 자리.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치열한 일을 하던 나의 첫 회사 생활. 이 역시 나의 호시절임을 직감했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워드를 연다. 이곳에서 웃고 울었던 기억을 저장하고 싶다. 키보드를 두드린다. 제목은 뭘로 하지. 특허 사무소에서 지냈던 나의 일상들. 나는 그중에서도 어린 변리사였으니까. 

저년차, 변리사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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