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떻게 학교를 나와서 홈스쿨링을 하게 되었는지 먼저 이야기 해야할 것 같다. 첫째는 어릴때부터 많이 예민한 아이였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유난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3년을 꼬박 데리고 있다가 둘째도 태어나고 힘들다는 핑계로 아이를 기관에 보냈었다. 늘 가기 싫어했고 아침마다 보내는 일이 전쟁이었다. 그렇게 5~6년의 시간이 어찌어찌 흘렀다. 첫째가 7살이 될 무렵 복직을 해야겠다 싶어 복직을 한 후 워킹맘으로 지냈다. 다행히 남편이 육아휴직을 써서 나름 무난하게 하루하루가 흘렀던 것 같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한 어린이집 휴원으로 남편이 독박육아를 하며 고생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빠도 복직을 해야했다. 그래서 창원에 계신 할머니 찬스를 썼다.
가까운 작은 시골학교를 보내며 걱정 반 기대 반 했던 것 같다. 나름 교육에 유난?스럽던 나는 아이가 최선의 교육을 받기를 바랬다.(학습이 아닌 아이가 제대로 자연을 느끼며 놀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길 바랬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경제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공교육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던 나는 사립학교도 고민해보고 대안학교도 고민해봤다. 아이가 하나라면 무리해서 보냈을지도 모르지만 두 아이를 모두 보내기엔 재정적으로 여유치 않았다. 그나마 작은 학교라면 선생님의 조금 더 가까운 관심과 자연친화적 환경으로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시골동네에 살고 있었기에 가까운 작은 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시어머님은 멀리서 올라오셔서 아이를 잘 돌봐주셨다. 학교까지는 거리가 있기에 나는 출근하면서 첫째를 차에 태워 내려주곤 했다. 처음엔 학교앞까지 같이 갔고 나중엔 교문에서 내려주기도 했다. 그 작은 아이에게 맞지 않는 커다란 책가방을 맨 뒷모습이 늘 안쓰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내려주고 나는 엑셀을 밟아가며 회사로 출근하곤 했다.
아이는 학교를 가게 되면서 나름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학교는 가야만 하는 곳이고 엄마는 회사에 가야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로 적응해가며 일년을 보냈다. 이제 아이는 2학년이 되고 나는 좀 더 시내로 집을 옮겼다. 시골은 조용하고 좋았지만 편의시설이 없어 많이 불편했다. 학원 다니기도 어렵고. 그래서 시내로 집을 옮기면서 아이도 결국 동네 일반적인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게 어쩌면 불행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기회의 시작일수도 있지만..
한 학급당 25명, 11반까지 있는 큰 초등학교였다. 때마침 공사중이던 학교엔 이용할 운동장도 없었다. 시끄러운 기계와 가벽들 사이를 아이는 오고 갔다. 이때는 둘째도 학교에 입학할 시기였기에 나는 다시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들을 데려다주곤 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길은 늘 고역이었다. 1학년때도 아이를 윽박지르며 보내기는 했지만 이제 회사도 가지 않는 여유로운? 아침인데 나는 여전히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서두르줄 모르는 아이에게 화가 났던 것 같다. 늦게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옷까지 입고 집을 나서는데 과장해서 수십번은 말해야 진행이 되곤 했고 그렇게 반복해서 말하는 사이 나는 점점 더 화가 나 있었다. 아이의 발걸음은 늘 무겁고 느려서 나도 늘 속이 터졌다.
아이는 전학 간 첫날부터 적응하지 못했다. 줄서서 급식실로 가는 아이는 줄을 벗어나기도 하고 아이들과 말썽에 휘말리기도 했다. 첫 날 기록장에 글씨를 쓰는데 글씨가 엉망이라고 공책을 찢기는 수모도 당했다. 담임선생님은 우발적으로 그랬다고,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하셨지만 첫인상이 서로 좋을리는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2학년 생활동안 담임선생님은 거의 매일 톡으로 전화로 연락을 주셨다. 그 날 어떤 일이 있었고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가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물론 아이가 독특함을 인지하고 나름 애를 써주시기는 했다. 절대 나쁜 선생님은 아니었다. 다만 다수의 아이들 속에서 우리 아이만 챙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수업진행에 아이가 방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선생님도 힘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생각하면, 이대로 학교에 남아도 될까하는 의구심이 멈추지 않았다. 작은 학교로 다시 전학을 갈까 아니면 제주도에 있는 자유로운 학교로 갈까 여러 고민들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 속을 졸이며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아이는 교문 앞에 서면 늘 교실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교실쪽으로 바라보다가 정말 느린 발걸음으로 학교를 들어서는 일이 많았다. 학교 안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았다 들어가는 일도 잦았다. 그러다 전부터 다니던 사설 상담선생님께 아이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자신을 미워한다고 했다던가.. 뭔가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내 앞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던가 싶었다.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고, 아이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아무도 아이와 짝을 하려고 들지 않았고 센 아이들과 부딪히는 일들도 종종 생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아이가 가진 특성이었고 그로 인해 아이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야단만 맞았던 것이다. 내가 아이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에 이지경까지 왔구나 싶어 많이 힘들기도 했다. 아마 그때쯤부터 홈스쿨링에 대해 알아보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터졌다. 그즈음 아이는 학교에 강한 불신과 부정적 감정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엔 교과와 무관한 책을 읽었고, 수업시간에 이상한 소리도 낸다고 했다. 학교수업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아이의 반응이었을 테지만 교사 입장에서야 화가 나는 일이었을 테다. 그러다 수업지시가 되지 않은 아이는 교무실로 불려가 1시간을 보냈고, 다음 시간도 돌아가서 잘 있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아 2시간을 교무실에서 보내다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그 시기는 아이 수업을 2시간으로 줄였던 시기였다. 2시간만 보내고 집에 데려오겠다고 한 시기였는데 그 2시간을 교무실에서 보내다 온 것이다.
순간 아이를 학교에 보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고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하고, 아이들과 불필요한 갈등만 겪어 마음의 상처만 늘고 있던 터였다. 차라리 내가 가르칠 것만 가르치고 자유롭게 보내다가 가끔씩 아이들과 어울리기만 해도 학교에서보다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날 결심했다. 아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오기로..
아이는 학교를 그만 둔 뒤에야 이야기를 했다. 학교 가기가 싫어서 그렇게 터벅터벅 느리게 걸었고, 교실에 들어가는게 싫어 멍하니 서있다가 겨우 교실로 들어갔다고 말이다. 나는 그걸 몰라서 늑장부린다고 아이를 얼마나 타박하고 비난했던지.. 너무 미안해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 그만둬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이는 학교라는 틀을 벗어났다. 정해진 길을 가지 않는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틀을 벗어난 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정말 잘 맞는 일이었다.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아이다. 그 2년간 아니 유치원까지 생각하면 3-4년간 아이는 꽤나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때마침 시대도 변화고 있다. 학교에서 공부 잘 해서 취업 잘 하면 성공했던 시기는 지났다. 인공지능이 나타나고 학교 교육만으로 새로운 시대를 적응하기는 어려운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아이가 지닌 가능성과 선택의 힘을 믿기로 했다.
홈스쿨링을 시작하고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우리는 서로 적응해가며 하루하루 느슨하고 알차게 보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