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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시야간숙소 Jan 18. 2022

서희의 외교담판 비틀어보기

고려 전기 대외관계 서사구조 비판

기존의 역사 서사에서 고려 시기 대외관계는 국난극복과 자주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거란의 경우 거란의 침입 때 서희가 외교담판을 통해 말만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영토가 확대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여기서 거란은 ‘멍청하게도’ 서희에게 속아 그냥 돌아간 것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서희가 약속했던 ‘교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송과 교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란의 뒤이은 2차, 3차 침입 역시 ‘계속 송과 교류하던’ 것을 문제 삼아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쳐들어온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고려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통해 이를 막아냈고 재침을 방지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쌓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나라는 ‘멍청하거나’ 혹은 ‘오랑캐로서 문화수준이 낮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서희는 그 과정에서 말만으로 거란을 물리치고 오히려 영토를 확대시킨 고려 역사상 최고의 통쾌한 외교로 평가된다. 


2015 개정교육과정 한국사 교과서 中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있다.     

1) 서희가 약속했던 친선관계는 ‘사대관계’를 의미하며 실제로 서희의 외교담판 이후 송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며 성종은 거란의 책봉을 받는다.


2) 따라서 실제로 외교사절이 오갔으며 강동 6주는 서희가 약속한대로, ‘거란과 고려’의 ‘합의’ 하에 설치된 ‘사신이 다니는 길 = 조공로’였다. 거란은 멍청하게도 서희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쌍방이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다.(고려는 거란의 회군, 거란은 고려와 사대관계)


3) 거란의 2,3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으로 거란의 책봉을 받았던 목종이 폐위되고 거란의 의사와 상관없이 현종이 즉위했기 때문에 거란이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4)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후 천리장성을 쌓음으로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고 거란과의 적대관계가 여전히 유지되는 것처럼 하지만 현종이 책봉되고 계속해서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2,3차 침입의 승리는 현종이 ‘친조’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됐을 뿐이다.


5) 거란이 흥기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 중 고려와 적대시했던 기간은 100년도 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사대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했던 시기가 더 길다.(그런데 교과서의 지도(10세기 ~ 12세기)에는 거란-고려가 대립구도로 표현되어 마치 내내 대립한 것처럼 되어있다.)     


이러한 서사 구조 뒤에는 어떤 의도가 깔려있다. 거란과의 사대관계를 숨기고 서희의 외교담판을 왜곡하면서 고려는 거란의 회군, 거란은 고려와 사대관계를 서로 교환했다고 하더라도 서희의 외교는 충분히 실리적으로 칭찬받을 수 있는 요소임에도 국난극복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만들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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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 성종 13년(994)] 거란의 통화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 작년 거란의 침략행위를 보복하기 위해 원욱을 송나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북방 국경이 가까스로 평안해진 마당에 경솔한 군사행동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일 이후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1010)] 거란 임금은 신하들에게, “고려의 강조는 임금을 죽인 대역 죄인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고 선언했다. 거란이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윤을 보내 전 왕이 죽은 정황에 대해 힐문했다.     


[고려사 세가 문종 12년(1058)] 왕이 장차 송나라와 교통하려 하자 내사문하성에서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 “거란에 영영 등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왕이 이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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