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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y 18. 2020

이혼 많은 시대의 인사법

-오늘의 질문

회사 버스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하면 마지막엔 반드시 셔틀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움직여야 했다. 누군가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얼굴만 알고 지내는 옆 사무실 남자 직원이었다. 사번 상으로는 내가 훨씬 위이지만 나이는 비슷한 뭐 그런 직원.


오랜 옛날 영어책에서 본 것 같은 대화가 오갔다. 이런 식의 인사 있지 않은가? ‘하이? 헬로우? 하 와 유? 파인 땡 큐, 앤드 유?’


“안녕하세요?”


남자가 먼저 인사를 했다. 내 시선이 창밖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지요?”


내가 대답했다. 팀에 있는 남자의 동기들과 내가 꽤 친했던 탓에 이것저것 전해 들은 것은 있었지만, 대화는 처음이었다.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남자의 동기들과는 반말이 난무하고 있었지만 초면인 그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HELLO’ 다음에는 모름지기 ‘How are you?’라는 말이 따라오는 것이라고 초등 영어책에 적혀 있었단 말이다. 그다음은 Fine Thank you, and you. 안 Fine해도 대답은 같다.


“네, 요즘 편안하신가요? 남편 분도 잘 계시지요?”


창 밖으로는 미처 셔틀에 오르지 못한 직원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고, 꽉 막힌 길을 따라 걷는 것보다 조금 나은 속도로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도, 지금도 흔히 받는 질문인데, 대답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상대가 한번 보고 말 사람이면, “네”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비슷한 질문으로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시나요?”라는 것도 있는데, “회사원이에요.”라고 대답한다. 끝.


두 번째. 여러 번 볼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감정을 싣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한다. “이혼했어요. 남편 같은 것 없답니다.” 여기서 ‘감정’이란 ‘아, 귀찮다’라는 것이다. 상대의 다음 반응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케이스 때문에 가끔 ‘거짓말쟁이’가 됐다. 한 번만 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몇 번 더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좀 난감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확률 상 오해를 받는 경우보다 스쳐 지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두 번째는 쓸데없이 당황하는 상대방에게도, 늘 그 반응이 지겨운 나에게도 못할 짓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혼했어’라고 팩트를 전한다. 남편 잘 있다고 말한 후 한참 지나 ‘사실 그때는 거짓말이었어.’라고 하기는 우습다.


그날 상대는 내가 예상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빼곡한 통로로 시선을 옮겼다. 말없이 앉아 있기에 10분은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조금 더 친한 사이였다면 ‘내가 이혼했는데 당신이 왜 죄송해?’라고 말해줬겠지만, 그런 반응은 초급 영어책에 나오지 않았다.


그 날 이후 그와는 오가며 고개만 숙였을 뿐, 특별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몇 년 후 그는 퇴사했고, 이 장면은 ‘누군가 가족관계에 관해 물어보면 해야 하는 대답’의 예시문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챕터에는 ‘이혼했다는 말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하니 삼가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둘 다 알고 있는 직원의 경조사 자리였다. 그도 그 아침의 통근버스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술도 몇 잔 들어갔고, 이제는 직장에서 선후배 관계로 만날 일이 없으니 편하게 말을 하던 중이었다.


“내가 이혼했는데 네가 죄송할 건 뭐야?”


“아, 당연히 내가 죄송할 것은 없지. 그런데 그렇게 다들 말하더라고.”


“응?”


그랬다. 나는 ‘초급 영어책’의 인사법만 알고 있었는데, ‘고등 사회생활 책’에는 다른 예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이혼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별스럽지도 희한하지도 않은데, 인사법은 안 바뀌더라.”


“당황한 것 아니었어? 아무 말없이 회사까지 갔잖아.”


나는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 주기 위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왜 당황해? 이혼한 것은 넌데. 그런데 '죄송합니다'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더라고. ‘죄송합니다’ 까지는 기본인데, 그다음은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거야. ‘그럼 지금 남자 친구는 있으세요’도 우습잖아?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회사던데 뭘.”



그랬다. 다들 사정이 다른 거였다. 덕분에 그날 이후로는 ‘이혼 커밍 아웃’에는 좀 더 대담해졌다. 그 친구 말마따나 이혼이 너무 상례화 되어 있어서, 가끔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도 나도’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오래전 ‘축 결혼’이라는 연주음악을 작곡한 이병우가 자신의 콘서트에서 ‘요즘은 이혼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축 이혼’이라는 노래를 다시 작곡하던지, ‘축 세 번째 결혼’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은 변하고 대화법도 변한다. 이런 변화에 빠른 대처가 필요한 것은 상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나뿐인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내가 제일 걱정이다. 아, 그리고 이병우 선생님. 아직 노래 안 나왔던데, ‘축 이혼’ 노래, 빨리 부탁합니다.


-오늘의 질문 : 상대를 당황시키는 질문,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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