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Jul 20. 2020

어떤 일 좋아하세요?

- 오늘의 조언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에서 90세의 전직 건축가 슈이치 씨가 전화를 받는다. 상대의 요청을 다 들은 후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건 거절하겠습니다…… 저도 이제 90세라 가능한 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텃밭으로 향한다. 슈이치 씨 부부는 백 종류가 넘는 야채와 , 나무를 키우고 있다. 그것들을 심는 것도, 돌보는 것도, 심어 놓은 것들의 자리를 잊지 않도록 팻말을 세우는 것도 그의 일이다. 소중한 것들에게 아무 이름표나 줄 수는 없다. “여름밀감, 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프리뮬러, 봄이 왔네요”처럼 재치 있는 문구들이 노란 펫말 위에 쓰여 있다.


그가 좋아하는 생선을 파는 상점에 엽서를 보내는 일도 해야 한다. 아내와 그의 모습이 케리커쳐로 담겨 있는, 좋은 식재료를 공급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엽서다. 손녀와 장난감도 만들어야 하고, 계절에 맞게 집도 손봐야 한다. 상관없는 내가 봐도 바쁘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할 틈이 없다.



내게도 당신에게도 슈이치 씨에게도 24시간은 똑같다(우주에 나가 계신 분들은 빼기로 하자). 매력적이지 않은 일은 무시해 버려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


슈이치 씨와 나의 차이라면 그는 그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나는 마음속으로만 투덜거리며 눈 앞의 일들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내게도 변명거리는 있다.


그는 으나마 연금으로 생활이 가능하고, 나는 그렇지 않다. 부양가족이 있으니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자면 원치 않는 일도 해야 한다. 출근을 해야 하고, 회식도 참석해야 하고(아, 요즘은 회식 없습니다. 코로나 정국의 최대 이득이라고 제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별로인 사람들의 경조사에도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


'도대체 이 일을 시키는 이유는 뭐야?'라는 커다란 의문부호가 떠올라도 굳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시간과 신경과 종이의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내키지 않은 일을 하는 속상함 까지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슈이치 씨가 보시지 않아 다행이다.


어른들도 항상 말씀하신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느냐"고. 행복을 주는 말은 아니지만 위안을 삼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코로나 휴직을 거치며 '그것이 전부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원하는 것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 것이다.


장시간 외출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나자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직원들이 의외로 많았다. 40대 이후 직원들에게서 꽤 많은 빈도수로 관찰되었다. "회사에 나가지 않으니 심심해."라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경우를 꽤 보았다. 뭐지? 그럼 출근하면 재미있다는 거야?


오랜만에 출근해도 썩 즐겁지 않은 내가 약간의 비난을 섞어 묻자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말이야......"


몇 번의 질문 후 내린 결론은 "뭘 해야 재미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취미 생활이 없는 편일수록 출근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등산도 골프도 하루 이틀이지, 그걸 어떻게 매일 하냐."


"뭔가 집에서 하는 취미는 없어? 책을 읽는다던가, 요리를 한다던가? 영화를 보거나?"


"뭐라는 거야......"


갑자기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강제 외출'을 권고당한 직원도 있었다.


"아내가 자신에게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주일에 두 번은 어떻게든 외출을 하라고 하더라고. 마스크 하고 뒷산에 올라 귀가 시간을 기다리는 기분을 알아?"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어렵지만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일도 결코 수월하지는 않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가 아닐까. 좋다, 지금은 바쁘니 괜찮다고 하자. 그러면 10년 후에는? 더 이상 출근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벌써 100세 시대를 떠든 지 한참 되었다. 의학적 승리가 이끌어줄 미래가 '뭘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많은 시간'으로 귀결된다면 너무 슬프다.


역시 다큐멘터리 영화인 <뚜르 : 내 생애 최고의 49일>에서 26세 암 환자인 윤혁은 '뚜르 드 프랑스'를 완주하고 싶어 한다. 아프기 전에도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게 생긴 욕망이다. 몇십 번 반복하던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떠난다. 쉬운 것은 없다.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넉넉하지 않은 예산과 일정 때문에 매일이 고난이다. 2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를 몇 개씩 넘어야 하는 경로가 쉬울 리가 없다.


"지옥이 이런 데인가 싶다"면서도 그는 웃는다. '영혼의 동반자인 노래와 함께' 페달을 밟는 것에만 집중하던 그에게도 미래에 대한 걱정, 병에 대한 두려움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아직은 자전거를 탈 수 있지 않나. 그러면 자전거를 타는 것에 집중하자."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현재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만 제대로 집중할 수 있다. 시험공부하는 한 시간보다 연인과 있는 한 시간이 훨씬 빨리 지나가는 경험을 나만 갖고 있을 리가 없다.



<인생 후르츠>의 슈이치 씨가 기꺼이 맡은 마지막 작업은 병원 증축 설계였다. 자연을 최대한 거스르지 않고, 슈이치 씨의 조언을 귀담아들으려 하는 병원 관계자들에게 완성된 설계도와 함께  편지를 보낸다.


"저도 이제 90세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일을 만나게 되었네요. 사례금이나 설계료 등은 모두 사양하겠습니다. 안심하시고 상세히 상담해 주세요.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결국 슈이치 씨는 공사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가? 그 일이 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는 인생에 대해 말하고 누군가는 사는 것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마치 계절이 가고 오는 것처럼.


오늘의 조언 :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전제로, 어떤 일을 할까 말까 고민된다면, 그냥 하세요.

이전 02화 골프를 쳐야 하는 나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