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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12. 2022

안녕하신가요, 바이런 경.

23. 아테네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한낮 아테네 거리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우쳤기 때문이다. 한낮의 그리스 햇빛은  깎은 창 끝 같다.


버스를 타고 아크로폴리스 역에 내려 제우스 신전으로 향했다. 기원전 6세기에 짓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완공된 것은 기원후 2세기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이다. 황제는 제우스 신전 앞에 문도 하나 만들었다.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일명 ‘하드리아누스의 문’이다. 이 문은 ‘나는 로마식 건축물입니다!'를 온몸의 아치로 드러내고 있는데, 지금은 비둘기 주거지로 변한 듯한 인상이다.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117년에서 138년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던 ‘로마 5 현제’ 중 한 사람이다. 트라야누스 황제 당시 로마는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서쪽 메소포타미아부터 동쪽 영국까지 전부 로마의 영토였다. 이렇게 넓어서야 통치가 잘 되지 않는다. 명령을 해도 전달되지 않고, 곳곳에서 반란도 일어난다.




하드리아누스는 결단을 내렸다. 적당한 선에서 먼 곳의 영토는 포기하고, 안쪽으로는 장벽을 쌓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두 번이나 영토를 순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속주를 대하는 자세도 ‘고압적’인 것보다 ‘유화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테네에 제우스 신전을 지어주고, 자신의 이름을 딴 문을 만든 것도 그런 방법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로마 점령 시기 그리스는 단순한 속주 이상의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지성 때문이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스의 말과 사상은 좁은 자국 내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과 정복을 통해 아드리아 해에서 유프라테스와 나일 강까지 멀리 확산되었다. 아시아 곳곳에도 그리스 도시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면면히 이어 온 마케도니아 왕가 통치의 영향이었다. 그 무렵 그들의 호사스러운 궁정에서는 그리스의 우아한 기풍과 동방의 사치한 기풍이 절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은 라틴어권과 그리스어권으로 나누어졌다.  


기번의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안티누스' 때문에 그리스에 좀 더 마음이 간 것 아닐까 하는 개인적 의심도 든다. 역사책에 적혀있는 일들은 심각한 의도와 거대한 이유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작고 하찮은 이유가 동기가 되어 생긴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지는 정치면, 사회면의 뉴스가 들춰보면 종종 말도 안 되는 시작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안티누스 상. 위키 펌.

비니티아 출신의 그리스 청년 ‘안티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애인으로 유명하다. 하드리아누스가 가는 모든 곳에 동행했는데(네, 그의 부인은 로마에 있었다고 합니다), 함께 이집트에 시찰하러 갔다 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슬픔에 빠진 하드리아누스는 청년을 신으로 만들었다. 역시 애도의 스케일도 황제급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누스가 사망한 자리에 신전을 짓고 조각상도 제작했다. 델포이 박물관에도 그의 조각상이 남아 있다.


이런 하드리아누스의 포용정책이 먹혀들지 않았던 유일한 곳이 ‘예루살렘’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다. 예루살렘에 유대인 거주가 금지되면서 ‘디아스포라’로 이어졌다. 복잡하고 안타깝게 꼬인 역사의 시작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있다.




다른 모든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제우스 신전 안에도 돌기둥과 떨어진 조각들이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게 한다. 9시가 안 된 시간이지만, 커다란 물통을 옆구리에 낀 관광객들은 그늘진 주위만 빙빙 돈다. 해가 내리쬐는 유적에 다가갈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 신전 한쪽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들이 전부 제 자리를 찾기를 바란다. 모든 문화제가 제자리로 돌아와 예전의 빛나던 시간을 증언해 주길…..


제우스 신전은 공사중이다


신타그마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때 그리스의 왕궁이 있던 곳, 지금은 국회가 자리잡은 곳이다. 벌써 관광객들을 가득 태운 시티투어 버스가 대로를 질주한다. 그리스 기념품 자석을 팔고 있는 가판대 옆에서 어떤 이유인지 화가 난 노숙인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 천천히 길을 따라 걷다 바이런의 동상을 만났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영국의 귀족이자 상원의원이고 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어 평가할 말은 없지만(사실 읽어본들 평가할 만한 주제가 못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시인으로, 잘생김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인 것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국립정원 인근 바이런 동상


1789년 프랑스 절대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프로이센의 ‘시계 같은 남자’ 칸트마저 열광시킨 전 유럽적인 사건이었다.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낸 프랑스혁명은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의미를 잃었지만, 그 정신은 유럽에 영향을 끼친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가 1791년 ‘아이티 독립 전쟁’을 벌인 것이 단적인 예다.


또 하나의 예가 그리스에서 발생하는데, 1821년부터 그리스는 점령국 오스만 튀르키예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시작한다. 유럽 각국은 자신들의 일로 분주했다. 프랑스처럼 왕정이 날아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각국은 자신들의 나라를 단속하는 한편, 그리스의 일은 그저 ‘동방의 일’ 이라며 외면했다.


1822년 오스만 튀르키에군이 키오스 섬의 주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키오스 섬의 주민들이 독립전쟁에 가담했다고 의심한 것이다. 12만 명의 섬 인구 중 8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해되거나 고문 당해 죽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려 갔으며, 살아남은 그리스인이 2,000명도 되지 않을 정도의 잔혹한 사건이었다.


키오스 섬의 학살, 들라크루아, 위키 펌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는 이 사건을 작품으로 남긴다. 바이런은 직접 그리스 편에서 독립전쟁에 참가하기로 마음먹는다.


1823년 독립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그리스로 건너온 바이런은 전투에 한번도 참가하지 못한 채 앓아눕는다. 말라리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생각해보면 허탈한 일이다. 하지만 영향력은 엄청났다. 유럽인들은 ‘그리스’와 ‘자유’, ‘독립’ 같은 낯선 단어들을 '바이런'이라는 당대의 아이콘의 죽음과 함께 떠올렸다. 유럽인들이 그리스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보야, 문제는 동방이 아니야, 바이런이야! 뭐 이렇게 된 것이다.




자, 이렇게 말하면 천재 시인 ‘바이런’에 의해 그리스의 운명이 한순간에 변한 것 같지만, 역사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늘 그렇듯 국제 사회는 힘으로 움직인다. 일은 이렇게 풀렸다.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키예는 대제국이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다. 그 나라가 갑자기 힘을 잃으면?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유럽 각국은 ‘지금처럼 놔두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스만 튀르키예 점령지에서 터져 나오는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외침이나 그리스도교 인들의 바람 같은 것은 무시했다.

예전의 왕궁. 지금은 국회의사당

하지만 같은 정교회에 속한 러시아는 입장이 조금 달랐다. 그리스 정교회의 끝없는 요청에 몸을 움직일까 고민하게 된다. 이 상황을 영국이 알아차린다. 어차피 오스만 튀르키예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었다. 만약 러시아가 그리스를 돕는다고 전쟁에 참여했다 승리한다면, 오스만 튀르키예의 넓은 땅에 러시아의 입김이 들어갈지 모른다. 영국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고 나선다. 그러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진행된 ‘빈 체제’로 인해 갑갑함을 느끼던 프랑스가 그리스를 지지한다. 자, 그리스인들을 위해 그리스를 지지한 나라는 아무도 없다. 다 그런 것이다.


오스만 튀르키에는 같은 종교의 영향 하에 있던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1827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함대가 투르크, 이집트 함대를 상대로 승리한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승리를 기뻐하며 그리스 인들에게 ‘앞으로 잘해봐’라고 한 후 쿨하게 떠났으면 멋있었겠지만, 그럴 리가. 1828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은 포로스 섬에 모여 ‘그리스의 독립’을 확인한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그리스 왕’을 모셔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후 그리스와 관련 없는 독일인 왕을 모시는 그리스의 지난한 왕정 세월이 시작된다.


어쨌든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전쟁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리스인들은 그에게 고마워한다. 그의 동상은 아테네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국제 정치가 얼마나 험악했든, 얼마나 자국 중심으로 돌아갔든 바이런 경의 낭만적이고 따뜻한 마음은 기억할 만하다.




신타그마 광장 초입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무리의 경찰들과 마주쳤다. 왠지 눈치를 보게 된다. 이곳에 시위가 있나? 모르겠다. 하지만 경찰과 시위를 자연스럽게 연결짓는 과거를 나는 거쳐왔다. 경찰과 군이 자국민을 상대로 무기를 겨누는 국가에서 살아 남는 일은 너무 힘들고 아프다. 각자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해주길 바란다. 경찰은 국민의 치안을 살피는, 군은 국민지키는 그 임무 말이다.




신타그마는 그리스어로 ‘헌법’이라는 의미다. 1843년 그리스 최초의 헌법이 이곳에서 공표된 기념으로 이름이 붙었다(바이에른 출신 초대왕이 이곳에서 헌법을 발표했다. 성난 군중과 독립운동가 출신의 군대가 군집한 앞에서). 국회 앞에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뜨거운 돌바닥 위에 앉아 있고, 어떤 이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자리를 찾아 기웃거린다. 무명용사의 비 앞에서 벌어지는 교대식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교대식이 시작되었다

10여분 기다리자 과장된 걸음걸이의 군인들이 걸어 들어온다. 교대식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올 이유까지는 없겠지만, 지나다가 기회가 되어 볼 수 있다면 볼만한 광경이다. 덕수궁이나 경복궁에서 매일 되풀이되는 수문장 교대식이 떠오르지만 그리스 나름의 격식과 각이 잡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타그마 광장 맞은편에 그랜드브레타뉴 호텔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군 본부로 사용되고, 데켐브리아나 때는 정부 각료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다는 호텔이다. 데켐브리아나 때 군이 발사한 포탄도 박혔다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마놀리스 글레조스가 폭탄을 설치한 곳이 바로 이 호텔이다. 그 폭탄이 터졌다면 어땠을까? 처칠이 그곳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 아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방향으로 역사는 흘러갔겠지. 정확한 것은 그 어떤 방향도 ‘그리스 만을 위한’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강 위에 출렁이는 배처럼 움직였을 것이다.


그랜드브렌타뉴 호텔

과거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러시아와 중국의 남하를 막는 저지선으로 사용되었다면, 과거 그리스는 소련의 지중해와 중동 진출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 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한다면, 3년 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들에 맞서 싸운다면, 저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프레시안, <'군복 입은 테언즈' 미국을 만든다> 기사 중


국토가 여기 있고, 어쩌다 보니 내 선조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뿐이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여기에, 혹은 그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외교에서 갖춰야 하는 것은 힘이다. 미국과 같은 절대적인 군사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조상을 잘 만나지 않는 한 얻기 힘들다(모든 사람의 조상이 왕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다른 힘도 있다. 적절히 균형을 맞추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교력일 수도, 정치력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우리나라로, 그리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메테오라 가이드님이 알면 또 말렸겠지만, 프라페를 두 잔째 사 마시며 길을 걸었다. 오늘은 그리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 프라페를 마음껏 누릴 것이다. 살은 내일의 내가 어떻게 해주겠지, 뭐.


플라카 거리를 한 번 더 구경하고, 모나스티라키 벼룩시장을 찾았다. 작은 기념품을 몇 개 챙기고, 천천히 시장 안을 걸었다. BTS가 가슴팍에 새겨진 티셔츠도 있다! 와! BTS가 제작한 티셔츠일 리는 만무하다. 나는 지적 재산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소속 회사가 티셔츠의 상표 도용에 문제 제기를 해야 할만큼 중요한 사건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문제고, 나란 사람은 그저 너무 신기해서 그 티셔츠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BTS아래 방탄소년단이라고 한자로 적어 놓았다. 이 봐, 가능하면 한글로 방탄소년단이라고 좀 적어주면 안 돼? 구시렁거리며 거리를 걷다 튜닉처럼 보이는 원피스를 파는 상점에 들렀다.


“물건을 그렇게 가지고 다니면 안 돼. 하나에 다 담아. 밖에 집시가 많아. 소매치기당해. 큰일 나.”


현금으로 계산하면 20퍼센트를 깎아준다는 주인의 상술에 넘어가 지갑을 열자 사장이 말했다. 봉투 두 개를 들고 있는 손을 가리키며 한 봉투에 담아서 가슴에 꼭 안는 시늉을 했다. 벼룩시장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것은 세계 공통의 룰이다.


“여기 집시 많아. 엄청나게 조심해야 해.”


그녀의 말대로 짐 정리를 한 우리를 보고 다시 한번 다짐의 말을 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유럽 여행의 단골 멘트는 ‘집시를 조심해’다. 유럽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집시’는 소매치기고, 도둑이고, 거지이고, 부랑아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내 여행 경력에서 집시에게 화를 입은 적은 없다. 오히려 현지인의 바가지나 인종차별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을 뿐. 소매치기를 당할 때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행동을 한 현지인이 떠오를 뿐 집시는 기억나지 않는다. ‘집시’는 유럽인들에게 ‘마음 놓고 차별해도 괜찮은 인종’의 한 종류인 것 같다. 입맛이 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집시로 보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저기 봐.”


일행의 바쁜 손에 끌려 눈을 돌리니 경찰의 모습이 보인다. 한 명은 오토바이에 앉아 길을 내려다보고 있고, 다른 한 명은 그 옆에 서서 날카로운 눈길로 오가는 사람을 노려보고 있다. 혹시 누군가 촬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를 돌아볼 만큼 ‘연극적’인 시선이긴 한데, 귀엽다. 신타크마 광장 초입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


“여기 경찰은 얼굴 보고 뽑나 봐.”


낄낄거리며 내가 말하자 일행도 동의한다. 오토바이 위에 앉은 남자 경찰도, 그 옆에서 골목을 노려보는 여자 경찰도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듯 아름답다.


“사진 찍자고 하면 안 되겠지?”


일행이 묻는다.


“뭐, 그리스 유치장 구경할 셈 치고 한번 해보시던가.”


소매치기를 찾는 날카로운 눈빛이건, 도둑을 잡자는 과장된 몸짓이건 자국민을 위하려는 시선이면 괜찮다. 다들 수고하세요.


제우스 신전에서는 아크로폴리스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저가항공은 염려대로 연착됐다. 출발 시간이 다 되어서 비행기가 느릿느릿 탑승구 앞으로 굴러왔다. 안에는 도착객을 가득 싣고. 손님을 내리고, 기내를 청소하고, 필요한 비품과 가방을 싣자면, 가만….. 그럼 도대체 언제쯤 출발하는 거지,라고 생각할 때쯤 게이트가 열렸다.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듯 한가하게 비행기 문 앞으로 다가선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정확히 15분 뒤, 그러니까 도착 편 승객이 다 내린 지 5분도 되지 않아 쓰레기가 담긴 커다란 비닐봉지를 든 승무원이 밖으로 나오면서 탑승이 시작되었다. 청소는 사치였나보다.


빈 좌석을 찾을 수 없는 좁은 기내에는 가방을 들고 탄 승객이 대부분이었다. 짐 값을 따로 계산하는 저가 항공의 정책 탓에 어지간한 짐은 다 들고 탑승하는 것이다. 덕분에 승무원들은 차력사처럼 승객의 짐을 올렸다 내렸다, 자리를 이쪽으로 옮겼다 저쪽으로 옮겼다 정신이 없었다. 우리나라 항공사의 기내 승무원이 안전 업무보다 기내 서비스 업무를 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유럽 저가 항공의 기내 승무원들은 안전 보다 탑재 업무를 주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출발 예정 시간이 20분 지난 후 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제로 인해 40분 이후에 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티켓에 적혀 있는 시간보다 1시간 10분 늦게 비행기는 출발했다.




그 사이 비행기에 탑승한 10여 명의 어린이 손님들의 칭얼거림이 이어졌다. 좁고 답답한 기내에서는 어른도 버티기 힘들다. 덥고 숨 막히고 짜증 난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비행기가 이륙을 마치고 기내 승무원들이 음료를 파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그런 존재다. 어색하고 힘든 일을 처음 접하고 그래서 짜증을 내고 그렇게 익숙해지며 어른이 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어두운 창 밖으로 그리스 시내의 불빛이 빛난다. 아마 곧 바다가 보일 것이다. 




미노스의 다이달로스는 왜 아리아드네의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자신의 조국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미궁으로 밀어 넣는 짓을 그만하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미노스 왕에게 발각되는 순간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 것인지 예감하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간다. 프라페를 먹을 것이냐, 물을 먹을 것이냐와 같이 단순한 선택도 있지만 ‘내게 이로운 일’과 ‘내게 이롭지는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내게 이롭지는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이곳에 와 있다. 부와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의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평안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희생이 쌓인 나라에 나는 살고 있다. 다만 그 결과는 너무 더디게 나타나고, 때로 완벽한 모습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선택 위에서 역사는 흐른다는 사실 자체를 잊으면 안 된다. 힘이 있다면, 그 결과를 좀 더 빠르게, 제대로 된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일에 힘써야 한다.


안녕, 그리스

공주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떠나버린 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를 높은 탑에 가둬버린다. 화풀이를 제대로 한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그곳에서 날개를 두 벌 만든다. 자신이 한 벌을 달고, 아들에게 나머지 하나를 달아준다. 그리고 말한다. '날개를 붙인 곳이 녹아 떨어질 수 있으니, 너무 높게 오르지 말라'고. 하지만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말을 잊는다. 신기해 하며 태양으로 근접하던 이카루스는 결국 날개를 붙인 자리가 녹아 땅으로 떨어져 버리고 다이달로스만 탈출에 성공한다.


나는 훨씬 튼튼한 날개 안에 타고 있다. 그리스를 탈출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 이제 안녕. 잠시 후 비행기가 베를린 공항에 도착한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이제 프로이센의 도시, 베를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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