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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14. 2022

베를린에 도착했다

24. '독일'하면 떠오르는 인물들

예정보다 1시간 30분 늦게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한숨이 나왔다. 좁은 입국장 안은 갓 만들어진 대피소 같았다. 수하물 벨트가 돌아가는 기계음은 들리지 않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음만 가득했다. 몇 안 되는 의자는 꽉 차 있었고, 바닥 여기저기 엉덩이를 붙인 사람들 때문에 기내용 가방을 끌고 들어온 도착객들은 구불거리는 길을 창조하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기사한테는 1시간 20분 정도 늦는다고 말했는데…….”


도착장 안을 메운 사람들을 둘러보며 질린 목소리로 일행이 말했다. 세 개의 수하물 벨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 하나의 벨트 위에는 두 개의 항공편이 표시된 전광판이 깜박였다. 그러니까 4편의 항공기에 실린 짐이 쏟아져 나와야 한는 말이다. 하지만 기계음은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늦어도 20분 안에는 나오지 않겠어? 2시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을 하자.”


일행이 바쁘게 문자를 보내는 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승객뿐이다. 유니폼 비슷한 것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벨트 위 항공기 편명이 적힌 전광판만이 이 공간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자, 독일이 어디있을까요, 찾아 봅시다!

15분 정도 기다리자 먼 곳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들렸다. 세 번째 벨트에서 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럴 일인가? 도대체 얼마나 기다렸으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사이 철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얼굴이 붉게 상기된 40대로 보이는 독일 남자가 씩씩거리며 수하물 벨트를 걷어차고 있었다. 아, 우리와 동행이셨군요. 당신의 마음을 이해는 합니다만 그래 봐야 들어줄 직원도, 해결해줄 사람도 없어요. 나는 바닥에 자리 잡고 핸드폰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이거 좀 큰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4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도착한 지 1시간 20분 만에 벨트 위를 돌아가는 짐과 만날 수 있었다. ‘혹시 짐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들 때쯤이었다. 항의를 하고 싶어도 직원이 없다. 게다가 밖에는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서둘러야 했다.


키가 2미터는 되겠다 싶은, 헌팅 캡을 쓴 렌터카 기사는 우리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추가 요금에 대해 말했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표정 없는 얼굴 탓이었는지, 간단한 영어로 대화하면서 생긴 내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네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그가 말한 액수를 군말 없이 건네고 차에 올랐다.


어둡고 어딘지 구별할 수 없는 거리를 렌터카가 달리기 시작했다. 자정을 향해가는 고속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도로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어둡고 단단하고 퉁명스러워 보였다. 확실히 아테네와는 다른 느낌이다.



‘베를린’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얼굴과 떠오른다. 하나는 허구, 한 명은 실존 인물이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그리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는 것 정도.


먼저 허구의 인물은 ‘한셀 슈미트’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1961년에 태어난 한셀은 동베를린에 살고 있었다. 그는 동독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해준다. 좁은 집, 부족한 자원, 재미없는 생활, 무뚝뚝한 엄마, 그 지겨운 생활을 버티게 해 준 한줄기 빛 같던 록 음악들. 어느 날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게 성전환 수술을 조건으로 청혼을 받는다. 한셀은 기꺼이 답답하고 견디기 힘든 현실을 빠져 나가기로 한다.


헤드윅이라면 조드윅이지.

엄마는 자신의 여권을 아들에게 준다. 그래서 바뀐 이름이 ‘헤드윅’. 그의 앞에 처음으로 희망의 대로가 펼쳐진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전환 수술을 받았는데, 아뿔싸.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남자의 상징이 1인치 남았다. 그렇게 헤드윅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몸이 되어 버렸다.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남편이 헤드윅을 떠난 날, 티브이 화면 속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는 헤드윅.




나는 뮤지컬 ‘헤드윅’을 세 번 봤고 영화도 봤다. 처음에는  헤드윅의 연애담으로 이해되던 이야기가 씁쓸한 인생 스토리처럼 들리더니 결국 실패한 ‘동독 자체'의 서사 내 기억 속에 남아버렸다.


‘헤드윅’(영어명 Hedwig and the Angry Inch)을 만든 존 카메론 미첼(John Cameron Mitchell) 감독은 동생의 베이비 시터였던 독일 출신의 헬가(Helga)를 모델로 이 뮤지컬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헬가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고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행이다. 극 중 헤드윅은 재능은 많지만 성격이 더럽고, 변덕스러워서 옆에 있는 사람의 혼이 빠질 정도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정도 인생의 굴곡을 겪었으면 그럴 법도 하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에 세워져서 1989년에 무너졌다. 얼마 전 이야기다.

헤드윅의 인생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미군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였을까? 성전환 수술이 실패했을 때였을까? 사랑하는 토미가 헤드윅의 모든 것을 가지고 도망가서 스타가 되었을 때였을까? 혹은 그 모든 것이 합해져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잘못된 길로 질주한 것일까?


그렇다면 독일, 딱 꼬집어 동독의 역사가 크게 틀어지기 시작했던 것은 언제였을까. 이건 답이 있다. ‘30년 전쟁(1618-1648)’이다. 물론 서독도 30년 전쟁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은 결국 극복했으니까.

30년 전쟁, 자크 칼로, 위키 펌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유럽 나라들이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30년만큼의 발전을 하는 동안 전쟁터로 사용된 독일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인구수는 급감했다. 기아와 전염병은 기본이었고 ‘어떻게 사느냐’라는 문제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에 집중하는 야만적인 생활 방식이 전쟁이 끝난 후 한참 동안 이어졌다. 중앙 권력은커녕 부르주아나 상인처럼 기존의 귀족 계급을 위협할 만한 새로운 세력도 생겨나지 못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독일의 학자 에두아르트 푹스는 그의 책 [풍속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장에서 '비분강개'가 느껴진다.

독일은 스페인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중앙 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30년 전쟁의 비참한 결과의 하나였다…… 독일은 한 사람의 군주 대신에 200 명의 절대군주를 받들게 되었다. 독일 국민은 200이나 되는 궁정의 탐욕스러운 입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에 비해서 정치권력에 전혀 참가할 수 없었으며 정치적 영향력도 거의 가질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30년 전쟁이야말로 독일을 완전히 파괴하고, 수백 년 동안 대소 전제군주들의 노리개로 전락시켰던 원인이었다.


이 상황은 ‘프로이센’이라는 독일 변방(프로이센의 원 근거지는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지금은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라고 불리는 곳이다)의 제후국에 불과했던 나라가 ‘독일 제국(제2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백성 혹은 시민들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무시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중심은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였다. 지금은 러시아 영토다.

독일에서도 자생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독일은 ‘마르크스’의 고향인데 말이다. 하지만 프로이센 정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 새롭게 생겨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누르고 억압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프로이센 왕국은 사라졌다. 바로 이어서 ‘나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끝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은 어떤 독일 정부와도 협상하지 않을 것이고 ‘무조건 항복’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공표했다. 즉 이후 독일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독일인의 의사’를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독일인들은 받아들였다. 너무나 초토화됐던 터라 가타부터 말할 힘도 없었다.


처음에는 독일을 분할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독일이 다시 힘을 내 이웃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할 수 없을 만큼 소국으로 만들자는 심산이었다. 30년 전쟁 이전의 독일로 되돌려 놓겠다는 말이다.


‘철과 피’의 프로이센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철’을 제거해버리자는 의견도 있었다. 즉 제조업의 기반을 빼앗아버리고 농업국으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당시 소련은 이미 공산주의 국가였고 동유럽 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독일을 견제하려고 작은 나라들로 쪼개 놓았다간 동유럽처럼 될 수도 있었다. 그 이야기는 곧 중부 유럽 전체가 고스란히 소련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곤란한 일이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3국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미국에서는 힘없는 독일과 강력한 독일을 주장하는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미국 재무부 장관이자 대통령의 개인적인 친구이기도 했던 헨리 모겐소 2세는 중부 유럽에서의 완전한 권력 공백이 ‘독일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 행정부 내 모겐소의 동료이던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과 국무부 관리들은 전체로서의 유럽이 회복되어 자력갱생하는 데에는 경제적으로 강력한 독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디트릭 올로의 [독일 현대사] 중에서


1945년 2월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베를린’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눠 점령하고, 나머지 독일 땅도 적당히 분할하기로 결정했다(‘얄타회담’의 결과) 베를린은 소련이 점유하고 있는 땅 한가운데 있었지만, 소련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그곳에 군을 주둔시키는 것에 합의했다.

베를린은 붉게 표시된 소비에트 지역 한가운데 있다. 그곳에 4개국이 군대를 주둔했다.


1945년 6월 5일 연합국들은 독일을 접수했다. 주거지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교통수단은 마비되었으며, 몇 백만의 난민이 떠도는 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급했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효과가 있을지 아는 나라는 없었다.


다만 이 엉망이 된 독일에서 배상금을 뽑아내겠다는 프랑스와 소련의 입장은 단호했다. 소련은 총 배상금 중 절반을 현물로 받아갈 마음을 품고 있었고, 프랑스는 자르 지역과 라인란트 전체를 수중에 넣고 싶어 했다. 상황을 파악하고 눈 앞이 캄캄해진 미국은 빨리  손을 털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러니 연합군 점령 지역의 상황이 좋아질 리가 없다.




영국이나 미국과 달리 소비에트는 특별한 행동 계획을 갖고 독일에 들어갔다. 심지어 교전이 멈추기 전에도, 러시아인들은 독일에 소비에트 군정청을 조직했고, 독일이 항복하자마자 군정청은 소비에트 지역에 내각 수준의 독일 부서들을 허가했다. 나치가 아닌 민간 공무원이 각 부서를 주도하도록 했으며, 독일인인 망명 공산주의자들을 이인자로 앉혔다.

- 디트릭 올로의 [독일 현대사] 중에서


소련의 움직임에 놀란 미국과 영국은 자신들의 점령지에 ‘공동통치지구’를 만들고 별도의 내각을 구성했다. 공산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이 이 즈음이다. 미국은 입장을 바꿨다. ‘마셜플랜’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미국과 영국의 점령지로 쏟아졌다. 원조를 받기 위해 프랑스도 자신들의 점령지를 내놓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련의 점령지와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의 점령지는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진다. 마침내 헤드윅이 태어나던 1961년 두 개의 영토를 가르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동독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 사이로 바라본 풍경


이후 40년 동안 동독은 소련 공산당과 관련있는 단체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동독의 정치 현실은 헌법의 문구가 아니라 동독 공산주의자들과 모스크바에 있는 그들 동맹이 해석한 대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처럼 실제로는 헌법에 의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동독 정치와 사회 시스템의 토대가 되어야 할 영속성 역시 부재했다. 당 노선이 변경되면 헌법도 함께 개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동독에는 각각 구분되는 4개의 헌법이 있었다.

-디트릭 올로의 [독일 현대사] 중에서


독일 정치에서 고유의 지역적, 역사적, 태생적 특성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소련이 맞다고 하는 이념'만이 중요했다. 마치 지금 나는 축구공이 필요한데, 테니스 용품만 가득 가져와서 생색내는 코치와 함께 연습했던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이렇게 동독은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민족주의도 그 무엇도 아닌 이상한 정치 체계 안에 갇혀 버렸다. 성전환 수술을 받았지만 ‘1인치’가 남아 남자와 여자 어느 곳에 어정쩡하게 머물러 버린 헤드윅처럼 동독은 ‘공산주의’를 내걸었지만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묘한 상태에 머물게 된 것이다. 덕분에 소련의 지도자가 마음을 바꾸는 대로 동독의 정책은 일관성 없이 추진되었다. 이런 ‘일관성 없는 정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1989년까지 이어졌다.


무대 위 헤드윅은 이렇게 노래한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도시를 두 개로 분리시킨 그 장벽, 냉전으로 갈라진 세상
그 세상의 상징이 된 혐오와 증오의 베를린 장벽
욕을 했다. 더럽혔다. 침을 뱉었다. 사람들은 그 장벽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라졌다.
사라진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여러분, 헤드윅이 바로 그 장벽입니다.
헤드윅은 지금 그 경계선 위에 서 있습니다. 동과 서, 속박과 자유, 남자와 여자, 위와 아래,
당신들이 원한다면 저 장벽도 부숴버려!


극의 마지막, 헤드윅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타협 가능한 안식을 찾는다. 동독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매우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불과 30년 전 이야기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 진행중이다.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실존인물은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1892년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지인들의 평가에 따르면 날카롭고 핵심을 볼 줄 아는, 천재 유형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1938년 발터 벤야민. 46세라고 하기엔 세월의 풍파를 너무 세게 맞은 표정이다.


1892년이라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수상이 막 실각한 이후다. 그를 해임시킨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어렵게 엮어 놓은 국제 외교를 다룰 정치력을 타고나지 못했다. 비슷한 인물을 구할 인복도 없었다. 꾸미고 앞에 나서서 연설하기 좋아했지만, 내용을 이해할 머리도 없었다. 프로이센은 방향타를 잃은 채로 1차 세계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발터 벤야민이 아무리 유복한 가정에서 뛰어난 머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한들 시대를 타고나지 못했다. 게다가 유대인이다. 발터 벤야민의 일생은 양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유대인들이 겪었던 전형적인 비극의 코스를 밟고 있다. 그야말로 시대를 온몸으로 쓸고 지나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우라’라는 개념은 사진과 영화 같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비평,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글을 통해 유명해졌다. 철학 전공자도 아닌 나 같은 무지렁이가 발터 벤야민 철학이 가진 심오한 깊이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쓴 문장들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사랑’과 관련된 것들이 그랬다.


아주 복잡한 구역, 여러 해 동안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도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하자 일순간 환해졌다. 마치 그 사람의 창문에 탐조등이 세워져 그 지역을 빛다발로 분해해 놓은 것 같았다.

– 일방통행로 [응급처치]


아름답지 않은가? 연인이 이사를 왔고, 이제는 그 거리는 이전과 같지 않다. 마치 환한 불을 켜 놓은 것처럼 빛난다. 말 그대로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다.


나는 여자 친구를 방문하러 리가에 갔었다. 그녀의 집, 도시, 언어가 내게 모두 생소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나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홀로 두 시간 동안 거리를 걸었다. 나는 거리들을 그런 모습으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 집집마다 현관문에서 화염이 솟구쳐 나왔고, 모든 모퉁이에서 불꽃이 튀어나왔으며, 전차는 소방차처럼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 여자 친구는 집에서 나와 모퉁이를 돌아 전차에 앉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와 그녀, 우리 둘 가운데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먼저 상대를 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 시선의 도화선을 내게 놓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탄약 창고처럼 폭발해버렸을 테니까

– 일방통행로 [무기와 탄약]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잔뜩 기대에 부풀어 달려가는 사람이 떠오른다. 거리는 특별하고 아름답다. 아마 그 사람은 이 길을 지나 저기 어딘가에서 버스를 탈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상상하며 ‘탄약고처럼 터져버릴 듯한’ 기분이 되어 걷는 사람. 아름답지 아니한가. 탄성이 절로 나오는 문장이다.


발터 벤야민 평전을 읽은 것은 한참 후였다. 그때까지 내게 발터 벤야민은 감수성 예민하고 글을 잘 쓰는 철학자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의 평전에서 이 글이 “33살의, 처자식도 있는 발터 벤야민이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기혼 여성의 집에 연락도 없이 찾아가면서 쓴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낭패감이란…….


벤야민이 사랑했던 그녀, 아샤 라치스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고,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벤야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정직하게 쓴 평전을 읽으며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좋아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니 발터 벤야민에 대한 낭패감은 이쯤에서 접어두자. 그는 [기술복제시대와 예술작품]이란 글에서 파시즘과 전쟁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그 가공할 양상을 두고 볼 때 엄청난 생산수단과 이 생산수단을 생산 과정 속에서 충분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 사이의 괴리(바꾸어 말하면 실업과 판매 시장의 결핍)때문에 생겨난다……. 기술은 강의 흐름이 나아갈 운하를 파는 대신 인간의 흐름을 전쟁의 참호 속으로 흘러들어 가게 하고, 또 비행기를 통해 씨를 뿌리는 대신 화염 폭탄을 도시에 뿌리고 있으며, 아우라를 새로운 방식으로 없앨 수단을 가스전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세계대전이 경제문제 때문에 벌어졌음을 정확히 집어냈다. 나치는 자신들의 문제를 숨기기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비난했고, 파시즘을 경멸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 관련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고,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기도 했다. 나치에게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고, 나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납치, 고문, 테러 등이 발생하자 벤야민은 프랑스로 탈출한다. 목숨은 건진 것 같았지만 먹고살 길은 막막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손을 벌리며 겨우 연명하는 망명 생활이 이어진다. 건강은 나빠지고, 우울감에 휩싸인다. 마침내 프랑스도 나치의 손에 떨어진다.


그는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는 미국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돈은 떨어졌고, 프랑스에 계속 있으면 잡혀서 독일로 이송될 수도 있었다. 이미 미국으로 탈출해 있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비자를 손에 넣은 벤야민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국경을 통해 탈출할 마음을 굳힌다.


마침내 도착한 스페인 국경 세관 사무실에서 ‘프랑스 불법 난민의 입국을 금하는’ 조치를 시행한다는 말을 듣는다. 벤야민과 일행은 작은 호텔로 이송되어 감시를 받는다. 만약 프랑스로 돌려보내 진다면, 결국 독일의 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다. 견딜 방법이 없다. 발터 벤야민은 그날 밤 음독자살한다.


발터 벤야민의 캐리커쳐

다음날 스페인 국경은 개방된다. 애초에 왜 국경이 봉쇄됐던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루만 기다렸다면 발터 벤야민은 스페인 국경을 빠져나가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20세기 초 유대인의 삶이란 이렇게 허망하고 비참했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나 [베를린 연대기]를 통해 그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글을 남겼다. 어린 시절 자신의 집, 학교, 어머니와 걷던 길 등이 유려한 문체로 적혀 있다. 글을 읽으면 바로 그 광경이 떠오를 만큼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나의 베를린 여행에는 도움되지 않을 것이다. 1900년의 베를린이라니,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차가 천천히 멈췄다. 햄버거와 맥주를 파는 펍과 불 꺼진 상점이 늘어선 대로변이다. 내리라고 말하는 렌터카 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이곳이 처음이야. 여기 아무래도 이상해. 이 번지가 맞는지 확인을 좀 해주겠어? 그는 말없이 혼자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우리를 불러 핸드폰 불빛을 작은 대문에 비춰 지번을 확인해주었다. 그 옆 초인종에 적힌 비앤비 건물의 이름까지도. 그는 이곳이 정확하다며 다시 한번 우리를 안심시킨 후 가방을 내려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간결하다. 공항에서부터 화가 났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준 후 그가 떠나갔다.


작은 대문을 들어서면 큰 정원이 있던 비앤비 숙소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 방까지 짐을 올리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작은 대문으로 들어오면 제법 커다란 중경이 있는 집이었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다.


“유럽에서는 에어컨을 쓰지 않아. 선풍기도 필요 없어. 창문을 열어.“


방을 안내해준 매니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까? 이곳은 아직 여름이 아닌가? 우리가 그리스의 더위에 너무 시달려서 마음을 졸이는 것일까? 지친 는 궁금한 것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둔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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