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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16. 2022

베를린 시장 구경

25. 마우어 피크 마켓과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밖이 너무 밝다.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여 보려다 포기하고 일어났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아침 공기에서 더위가 느껴졌다. 이런 여름을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이 견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숙소 옆 레스토랑은 이미 일을 시작한 것 같았다. 앞치마를 두른 직원들이 바쁘게 문을 오간다. 8시가 지나자 테이블 위에 세팅이 시작되었다. 브런치 인가. 베를린의 아침은 일찍 시작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어지간한 상점이나 가게는 다 문을 닫는 일요일이다. 대신 벼룩시장이 열린다. 베를린 여행 일정은 짧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지하철 역에서 9유로 티켓을 구입했다. 독일은 2022년 6월부터 8월까지 한시적으로 9유로 티켓 제도를 만들었다. 한 달에 9유로만 내면 버스, 지하철, 트램 등 모든 대중교통을 구간에 상관없이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1회 짧은 구간을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싼 티켓이 3유로인 것을 감안하면 파격을 넘어 획기적인 조치다. 자국민과 여행객이 동일한 혜택을 받고 지역도 상관없다. 베를린에서 산 티켓을 며칠 후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사용했다.


나를 기쁘게 한 9유로 티켓. 보라색으로 가린 부분에 내 사인이 있다. 검문 당하면 보여드려야 한다.


COVID 19과 에너지 비용 상승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을 위한 대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해서 전체 자동차 이용률을 낮출 수 있다면 환경보호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6월 첫 달에만 2100만 명이 구매했다고 한다. 이미 표가 있었던 정액권 사용자들 1000만 명을 고려하면 독일에서 1/3 이상의 시민들이 9유로 티켓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독일교통협회와 독일 철도(DB)의 설문조사 결과 9유로 티켓 이용자의 88%가 만족스럽다고 대답했고, 39%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기 위해, 70%는 가격이 저렴해서 이 티켓을 구입했다고 답변했다…… 독일 연방교통부는 9유로 티켓을 3개월간 운영하면서 발생한 25억 유로를 부담했다.

- 프레시안 <1만 원에 대중교통이 무제한!... 독일의 실험 그 이후> 기사 중 발췌


독일에서 경험한 것 중 최고는 '9유로 티켓'이었다. 외국인인 내가 이 정도니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느꼈을 체감 만족도가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 대중교통 할인 정책은 독일만의 것이 아니다. 스페인은 ‘무료 기차 여행’이라는 제도를 내놨고, 오스트리아도 하루 3유로로 대중교통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기후 티켓’ 제도를 도입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교통이 모두 무료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독일의 9유로 정책은 유로존 전체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나는 평소 내 차를 이용해 출퇴근한다. 출근시간이 오전 6시인데 회사 방향이 종점과 가까워서 그 시간에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이 없다. 대신 오후나 야근 출근 때는 절반 정도 버스를 이용한다. 9유로 티켓과 비슷한 정책이 도입된다면, 나 역시 잘 이용할 것 같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도시를 제외하면 대중교통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하는 지역이 존재한다. 오전 출근에 내가 차를 가지고 가는 이유처럼 말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누적될 적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야 할 것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돈’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돈보다 심각한 기후 위기 문제가 있다. 후손의 지구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걱정할 단계인 것이다. 한 번쯤 이런 문제를 공론화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벼룩시장이 열리는 마우어피크는 베를린 장벽 공원 근처에 있다. 지하철과 트램을 두 번 갈아타고 마우어피크에 도착했다. 햇빛이 심상치 않다. 12시가 안 된 시간임에도 온도가 30도를 넘었다.


“오, 저거 봐. 귀여워.”


짠, 암펠만을 소개합니다!

베를린의 상징 암펠만 신호등을 보고 일행이 비명을 질렀다. 암펠만(Ampelmann)은 신호등이라는 뜻의 Ampel과 사람 Mann을 합성해서 만든 단어라고 한다. 중절모를 쓰고 가열차게 걷거나, 하늘로 날아갈 듯 서 있는 모습이다. 귀엽다. 베를린에서만 볼 수 있는 신호등이다. 암펠만을 모델로 하는 기념품도 많다. 베를린 역부터 관광지 여기저기에서 기념품 숍을 찾을 수 있는데, 가격은….. 귀엽지 않다.


이 신호등맨은 1961년 동독의 교통심리학자였던 카를 케글라우(Karl Peglau)에 의해 태어났다. 당시 빨강, 녹색의 단조로운 신호등을 사람들이 무시하면서 교통사고가 늘어나자 사람 모양의 심벌이 들어간 보행자 신호등을 제안했고,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신호등맨 캐릭터를 디자인하게 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사라져야 했던 수많은 구동독의 사물들처럼 신호등맨 또한 거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1994년 독일 정부가 동독의 신호등맨을 교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신호등맨 구제를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 폐기를 막았다. 결국 독일 정부는 무릎을 꿇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여전히 모자 쓴 신호등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월간 디자인 [독일 문화의 아이콘, 신호등 맨] 중에서


‘신호등맨 구제를 위한 위원회’라니, 이름도 귀엽다. 그러니까 암펠만은 교통사고율을 낮추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정부를 상대로 벌인 시민운동 승리의 성과인 것이다. 흠 그렇다면 귀여운 것으로 그치면 곤란하겠다. 귀엽고, 씩씩한 암펠만 씨.




물건도 사람도 많은 마우어피크 시장

커다란 차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시장이 서 있었다. 한쪽은 물건을 파는 상점만 조금, 맞은편은 물건을 파는 노점과 간단한 음식을 파는 상점이 섞여 있다. 파는 물건들은 귀걸이 같은 소품들, 오래된 레코드, 골동품, 티셔츠, 가방 등 다양하다. 직접 제작하는 것을 구경할 수도 있고 가게마다 고유한 물건을 팔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발이 주렁주렁 걸린 곳도 있고, 집에서 만들어 나온 잼 종류를 파는 곳도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집으로 가는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만큼 다양하다.


한참 구경을 하다 음료를 파는 가판대를 만났다. 콜라와 맥주를 함께 판다. 맥주에 컵은 사치다. 당연하다는 듯이 병을 통째로 준다. 아, 그래, 여기 독일이었지….. 음식을 고르기 위해 가판을 기웃댄다. 핫도그, 스테이크, 다꼬야끼 등 파는 것도 다양하다. 베를린에 왔으니 ‘커리부어스트’를 먹어야지. 우리는 맥주와 콜라, 갓 만들어진 커리부어스트를 가지고 임시 천막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갓 튀긴 감자와 소시지가 맛없기는 힘들지만, 한 여름 햇빛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이렇게 통째로 똬악 주시면 당황스럽잖아요!
베를린의 트레이드마크인 길거리 음식 카레 소시지, 즉 커리부어스트(Currywurst)의 ‘발명’에 대해서는 1949년 9월에 시작되었다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헤르타 호이버(Herta Heuwer)라는 여성이 서베를린의 칸트 가에 있던 판매대에서 그때 처음 이 음식을 소개했다. 그녀의 창작품은 미리 초벌구이를 한 육질 좋은 돼지고기 소시지를 그릴에 한 번 더 구운 후 토마토퓌레와 카레가루, 우스터소스로 만든 소스와 함께 서빙했다. 1959년 호이버는 칠업이라는 이름으로 이 음식을 특별 소스로 특허 등록했다. 하짐만 그에 대적하는 주장으로 커리부어스트는 그보다 2년 전에 함부르크에서 발명되었으며 케첩과 커리는 한 여성이 미군에게 받은 기초 식량이라는 설이 있다.

– 우어줄라 하인첼만, [독일의 음식문화사] 중에서
커리부어스트. 예에~

그러니까 커리부어스트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거나, 우아하게 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햇빛이 이글거리는 천막 아래에서 먹는 것이 제격일지도 모르겠다. 독일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기근’, ‘배고픔’, ‘기아’ 같은 단어가 유독 눈에 띈다. 30년 전쟁 이후 특히 많다. 귀족들이야 알아서 잘 챙겨 먹었겠지만 나 같은 시민들은 감자가 삼시 세끼 주식이던 때도 있었다. 하루 세 끼가 감자라니, 좀 생각해볼 일이다.


다른 유럽 국가처럼 독일에서도 감자는 ‘관상용’으로 도입되었다. 감자의 모양을 생각하면 ‘관상용’이라는 사실이 좀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보는 것은 ‘꽃’이었다. 감자 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예쁘다.


감자꽃. 예쁘죠? 한국농정 펌

부유층의 관상용으로 도입된 감자는 꽃을 감상한 뒤 동물의 먹이로 사용됐다. 1700년 무렵까지 독일에서 감자는 대충 이런 식으로만 사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근처인 네덜란드나 좀 떨어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미 식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용병으로 이런 나라들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식품으로서의 감자’를 독일에 다시 소개했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랬던 감자가 대중적인 음식으로 변한 것은 역시 ‘전쟁’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알려져 있죠)는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은 인물이었다. 46년 치세 동안 7년 전쟁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당연히 강력한 군대를 원했다. 군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병이나 무기도 필요했지만, ‘보급’을 담당할 국민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왕은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레이더에 잡힌 것이 바로 ‘감자’였다.


감자밭을 시찰하는 프리드리히 2세. 위키 펌


프리드리히 2세는 농부들에게 씨감자를 나눠주고 군인들을 동원해 감자 밭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지휘관을 불러 조용히 말한다.


"누가 물어보면 지킨다고 말하고, 밤엔 자. 괜찮아."


그 상황을 본 근처 농부들은 ‘뭘 심은 걸까? 뭔가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 심어져 있나?' 같은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왕이 지키라고 했다잖아.' 이런 말들을 수군거린다. 이 대왕님, 마케팅이 뭔지 제대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상대로 농부들이 몰래 밭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줄기만 가져갔다. 심어도 안 된다. 좀 더 대담해진다. 다음번엔 뿌리채 몽땅 캐간다. 자신의 밭에 심어본다. 성공이다! 농부도 성공이지만, 대왕의 계략도 성공이다. 브라보!


왕은 자신이 감자 밭을 조사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도 유명인이 입었던 옷이나 가방이 다음날 완판 되는 상황이고 보면, 왕이 보여준 행동들이 감자 보급에 얼마나 공헌했을지 짐작이 된다. 18세기 후반 독일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감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감자가 없었으면 독일의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처럼 빨리, 아니면 그처럼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감자는 노동인력의 급증을 뒷받침해주었다. 감자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랐으며 땅에서 파내는 즉시 먹을 수 있었다. 곧 가난한 사람들은 빵을 포기했다…….. 1842년 브라운슈바이크 구빈원의 식단계획은 1인당 한 끼에 감자 1 킬로그램과 콩류 130그램을 권장했다. 하얀 콩과 감자가 일요일, 월요일에는 통보리와 감자, 화요일에는 당근과 감자,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렌틸콩과 감자, 목요일에는 완두콩과 감자, 금요일에는 스웨덴 순무와 감자가 나왔다.

– 우어줄라 하인첼만, [독일의 음식문화사] 중에서


이쯤 되면 감자가 감자를 먹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시장을 나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이동했다. 여행 동선 치고는 좀 멍청한 루트이지만 본격적인 투어를 하기 전 버스를 타고 도시를 둘러보자는 심산이었다. 베를린이 큰 도시이고, 대중교통에 에어컨 시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구글의 날씨 정보는 오후 기온이 34도까지 치솟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그림들을 다 돌아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날씨다. 시원한 곳에 들어가 잠시 쉬면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틀렸다. 가는 길에 만난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는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고, 노점 카페에 에어컨이 있을 리 없다.




알렉산더 광장에서 강 쪽으로 걷다 보니 벽화가 그려진 긴 장벽이 나타났다. 벽 뒤로는 유람선이 떠다니고, 주말 낮술을 드신 승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손마다 맥주병이 들려 있다.


여기서부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입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남아 있던 베를린 장벽에 그림을 그리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1990년에 각국 작가들이 참여해 1.3킬로미터에 걸쳐 105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 공사와 인근 아파트 건설 때문에 갤러리의 일부가 철거되거나 옮겨지는 일도 있었고, 벽화의 그림 위로 낙서가 덮이는 비극도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신이여, 이 치명적인 사랑으로부터 저를 구원하소서>이다.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호네커 동독 서기장이 키스하는 장면을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그렸다. 그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한다. 그 앞에만 그렇다. 가이드와 함께 택시를 타고 와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관광객도 있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았는가 하면, 너무 지쳐 갤러리 반대편 그늘 아래 음료수 병을 끌어안고 퍼져버렸기 때문이다.


“여기 원래 이렇게 더워요?”


옆에 앉아 있던 현지인에게 물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다니…… 역시 제 정신이 아니다. 셔츠는 벗고, 바지는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그늘에 앉아 있던 독일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세살쯤 되어 보이는, 붉은 원피스를 입고 뛰어노는 딸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맨발의 씩씩한 아기는 지치지도 않고 조형물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형물에 손이나 발이 닿으면 뜨거운 지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대단한 체력이다. 느릿느릿한 말투로 그가 대답했다. 더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야. 이거 이상기후야. 미쳐버릴 것 같아.”


선글라스를 벗으며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는 ‘어디서 왔어?’라고 묻는다. 예의상 묻는 거 너무 티 난다. 뜨거운 돌바닥 위를 맨발로 걷던 붉은 원피스의 아가가 성큼성큼 기념품 숍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 가게를 향해 뛰어갔다. 그래, 이런 날씨라면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어. 아무리 전기 요금이 비싸다고 해도.


왼쪽이 1979년 사진 원본, 오른쪽이 벽화의 그림. 맞다니까, 진짜 했다니까!!!


“아무리 봐도 좀 흉물스러운 포즈야.”


<신이여, 이 치명적인 사랑으로부터 저를 구원하소서>를 보던 일행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거 실사도 있어.”


일행이 선글라스를 벗고 나를 바라봤다. 좀 째려보는 건가 싶기도 하다. 맞다. 저 그림은 1979년 건국 30주년을 맞아 동독을 찾아온 러시아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동독 서기장 호네커가 진짜 한 키스다. 환영의 의미였다는데, 몹시 격하다. 하긴 호네커 입장에서는 브레즈네프에게 키스보다 더 강렬한 환영을 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1950년부터 서독은 소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는 장벽도 없을 때다. 이런 소식을 동독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다. 동독과 서독이 분리된 후부터 베를린 장벽이 세워질 때까지, 그러니까 1949년에서 1961년 사이 250만 명의 동독인이 베를린 시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난민의 절반 이상이 헤드윅처럼 25세 미만이었다. 가장 활발하고 생산적인 인구의 감소가 이어졌던 것이다. 이 상황을 개선하려면 동독 경제를 나아지게 할 묘책을 찾아냈어야 했지만, 당시 독일의 당서기장이던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는 베를린 장벽을 세운다는 ‘단순하고 쉬운’ 결정을 내린다. 멍청한 정치는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당시 동독의 가장 큰 기업을 비롯한 200여 개의 대형 회사가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소련 수출만을 목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200개 회사라니….. 당연히 동독에서는 생활 필수품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상점 진열대는 텅텅 비고, 노동자의 생활비는 배급 같은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여기에 1952년 겨울부터 식량 부족 사태까지 겹친다.


이 정도에서만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놨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멍청한 정권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울브리히트 정권은 노동 할당량을 10% 늘리는 정책을 실시한다. 오른 물가를 감안한다면 실질적으로 대폭의 임금 삭감이 일어난 것과 같다. 회사 상황이 안 좋으면 다른 판매처를 찾을 생각을 해야지, 직원들 수당을 깎고, 월급을 줄이면…… 그만둔다. 동독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파업이다.




1953년 6월 12일부터 대대적인 파업이 벌어졌다. 동독 지도부는 황급하게 노동 할당량 10% 정책을 폐기한다. 하지만 일단 시작된 파업을 그렇게 쉽게 멈출 수는 없다. 노동자들은 ‘자유총선거’등 정치 문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소련 눈치만 보고 있는 동독 공산당은 정치에서 빠지라는 외침이다.


그에 대한 응답은 ‘소련의 탱크’였다. 6월 17일 소련은 베를린으로 탱크를 앞세워 군을 투입한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업을 진압한다. 노동자를 위한다는 소위 ‘공산주의 국가’가 제일 먼저 노동자를 억압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마르크스 주의 어쩌구'하면서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소련 공산당의 행태에 분노해  마르크스는 ‘나는 마르크스 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화를 냈었다. 아마 고향의 국민들을 이렇게 탄압하는 것을 봤다면 뭐라고 했으려나.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동독에서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국민을 챙기지 않는 무능한 동독 정부와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통제하겠다는 소련의 결심을 동구권 국가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1956년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벌어지고, 소련의 진압이 이어진다.




1963년 ‘신경제체제’가 도입된다. 공장의 관리자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내용이다. 당연히 생산량은 늘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동독인의 생활수준도 서독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향상된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새 의장이 된 알렉산더 두브첵은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정책을 추진한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부문까지 손을 댄 것이다. 보도 지침을 줄이고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건 그의 개혁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기간이다. 소련은 지체 없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다. 알렉산더 두브첵은 모스크바로 끌려가서 강제 해임되었다.

프라하의 봄. 불타고 있는 것은 소련 탱크.


당시 이 상황을 주도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한다. 사회주의가 위협받는 나라를 돕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의무라는 주장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지침이 강화되기 시작한다. 할 수 없이 동독 서기장인 울브리히트는 서독으로 눈을 돌린다. 정치적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고 싶었던 것이다.


영원한 2인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동독의 시작부터 최고 권력자였던 울브리히트를 제거해줄 것을 청원했고 소련은 수락한다.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이 망하기 직전까지 최고 권력의 위치에 있었다.  


에리히 호네커에게 권력을 준 사람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다. 키스가 아니라 뭐라도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미칠 일이다. 일국의 권력을 다른 나라 사람이 부여하다니 뭐하자는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가자. 더는 못 견디겠다.”


일행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나도 못 참겠다. 숙소로 돌아가자.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럽이 대중 교통 할인 제도 등을 도입하면서 기후 변화에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계속 이러면 정말 큰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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