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마우어 피크 마켓과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6월 첫 달에만 2100만 명이 구매했다고 한다. 이미 표가 있었던 정액권 사용자들 1000만 명을 고려하면 독일에서 1/3 이상의 시민들이 9유로 티켓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독일교통협회와 독일 철도(DB)의 설문조사 결과 9유로 티켓 이용자의 88%가 만족스럽다고 대답했고, 39%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기 위해, 70%는 가격이 저렴해서 이 티켓을 구입했다고 답변했다…… 독일 연방교통부는 9유로 티켓을 3개월간 운영하면서 발생한 25억 유로를 부담했다.
- 프레시안 <1만 원에 대중교통이 무제한!... 독일의 실험 그 이후> 기사 중 발췌
이 신호등맨은 1961년 동독의 교통심리학자였던 카를 케글라우(Karl Peglau)에 의해 태어났다. 당시 빨강, 녹색의 단조로운 신호등을 사람들이 무시하면서 교통사고가 늘어나자 사람 모양의 심벌이 들어간 보행자 신호등을 제안했고,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신호등맨 캐릭터를 디자인하게 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사라져야 했던 수많은 구동독의 사물들처럼 신호등맨 또한 거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1994년 독일 정부가 동독의 신호등맨을 교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신호등맨 구제를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 폐기를 막았다. 결국 독일 정부는 무릎을 꿇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여전히 모자 쓴 신호등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월간 디자인 [독일 문화의 아이콘, 신호등 맨] 중에서
베를린의 트레이드마크인 길거리 음식 카레 소시지, 즉 커리부어스트(Currywurst)의 ‘발명’에 대해서는 1949년 9월에 시작되었다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헤르타 호이버(Herta Heuwer)라는 여성이 서베를린의 칸트 가에 있던 판매대에서 그때 처음 이 음식을 소개했다. 그녀의 창작품은 미리 초벌구이를 한 육질 좋은 돼지고기 소시지를 그릴에 한 번 더 구운 후 토마토퓌레와 카레가루, 우스터소스로 만든 소스와 함께 서빙했다. 1959년 호이버는 칠업이라는 이름으로 이 음식을 특별 소스로 특허 등록했다. 하짐만 그에 대적하는 주장으로 커리부어스트는 그보다 2년 전에 함부르크에서 발명되었으며 케첩과 커리는 한 여성이 미군에게 받은 기초 식량이라는 설이 있다.
– 우어줄라 하인첼만, [독일의 음식문화사] 중에서
감자가 없었으면 독일의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처럼 빨리, 아니면 그처럼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감자는 노동인력의 급증을 뒷받침해주었다. 감자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랐으며 땅에서 파내는 즉시 먹을 수 있었다. 곧 가난한 사람들은 빵을 포기했다…….. 1842년 브라운슈바이크 구빈원의 식단계획은 1인당 한 끼에 감자 1 킬로그램과 콩류 130그램을 권장했다. 하얀 콩과 감자가 일요일, 월요일에는 통보리와 감자, 화요일에는 당근과 감자,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렌틸콩과 감자, 목요일에는 완두콩과 감자, 금요일에는 스웨덴 순무와 감자가 나왔다.
– 우어줄라 하인첼만, [독일의 음식문화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