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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21. 2022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

27. 브란덴부르크 문

탁 트인 야외 공간이지만, 숙연함 때문인지 비 때문인지 시원하다는 느낌은 없다. 걷다 보면 건물 터와 부서진 잔해, 장벽을 순찰하던 경로들의 표시와 장벽의 구조를 축소한 모형 같은 것들이 보인다.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감시하기 위해 280개의 망루를 세웠다고 한다. 280개. 대단한 숫자다. 그중 하나가 남아 있다. 관광객은 다가갈 수 없다. 망루는 벽 뒤에서 굳건하게 서 있다. 아직도 누군가가 감시하고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두꺼운 벽으로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토록 촘촘한 경계와 감시의 눈을 피해 탈출할 마음을 먹다니,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얼마나 큰 것인지.


벽 뒤로 망루가 서 있다. 왠지 아직도 감시할 것만 같은...


걸음을 옮기자 현대적인 건축물이 서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목재를 붙인 것 같은 외부가 황량한 공원의 풍경과 묘하게 어울린다. ‘화해의 교회’다. 1894년 독일 2 제국 말기에 건축된 화해의 교회는 동, 서 베를린의 경계선 위에 자리 잡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당하기도 했고, 동독의 결정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2000년 11월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과 망루. 그리고 사람들. 베를린장벽공원 사이트 펌.

그곳을 지나 ‘베를린 장벽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비 때문인지 관람객이 많다. 당시의 사진, 장벽을 만드는 과정 등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국민의 ‘탈출’을 막기 위해 권력자는 높고 단단한 벽을 세우고, 그것으로 모자라 철조망과 전기 장치를 붙이고, 감시자를 세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뛰쳐나왔다. 뛰어넘거나 땅을 파서, 바다를 헤엄치는 방법으로 그들은 죽음을 감수하고 달아났다. 누군가는 성공했겠지만, 또 다른 사람은 실패했다. 기념관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려 애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일은 ‘사건’이었다. 나도 그날을 기억한다. 뉴스가 온통 그 소식으로 도배되어 모를 수가 없었다. 뉴스의 논조는 ‘황망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벽이 무너졌다, 기쁘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니…… 이건 뭐람.’ 이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1989년 소련의 지도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다. 공산당과 KGB로 대표되던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페레스트로이카’, 우리말로 바꾸면 ‘개혁’이다. 시장 경제가 도입되고, 공산당 체제가 무너졌다. 그 방향이 옳았던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전의 소련이 가던 길과 명확히 다른 방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연히 동독이 원하는 것과도 멀어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2022년 8월 30일 돌아가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폴란드에는 비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섰고, 헝가리에서도 공산당 외 복수의 정당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동유럽에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동독만 고집스럽게 혹은 멍청하게 기존의 노선을 고집했다.

1989년 7월과 8월. 체코와 폴란드, 헝가리에서 휴가를 보낸 수만 명의 동독인들이 집으로 가는 대신 프라하와 바르샤바에 있는 서독 대사관으로 달려가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스트리아나 서독으로 도주하기 위해 단체로 난민 신청을 해버렸다.


동독 정부는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을 떠나 서독 땅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기차를 굳이 동독 땅을 관통해서 지나가도록 협의했다. 동독 정부는 난민 신청의 규모도, 인적사항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서독으로 가기로 한 난민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 데이터를 수집하여, 그들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을 감시하기로 한 것이다.


동독 국민들에게는 그들을 난민이 아닌 ‘추방자’라고 선전한다. 그들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동독 정부가 내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설마 그걸 누가 믿어?', ' 자국민을 그렇게 띄엄띄엄 봐?'싶지만 사실이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기술적인 이유로 잠시 기차가 멈춰 설 때마다 그 기차에 올라타려는 사람들 때문에 동독 경찰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기차역마다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10월에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다. 구호는 “우리는 국민이다!”였다. 가슴 아프다.




당황한 동독 정부는 경제를 탈중앙 집권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여행 제한을 완화하는 법으로 국민들을 달래려고 한다. ‘언젠가는 국경을 개방하겠다’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언젠가는’이라는 말에 집중하지 말고 ‘국경이 개방하겠다’는 말만 들어 달라는 소리다. 역시 듣는 사람을 띄엄띄엄 봤다.


발표하시는 권터 샤보프스키씨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사회주의통일당 수장이자 중앙위원회 신임 정보 및 홍보담당 비서이던 권터 샤보프스키(Guenter Schabowski)가 ‘여행 제한 완화’에 대해 발표한다. 이탈리아 기자가 여행 제한 가능 지역에 '서독'도 속하느냐고 묻는다. 권터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기자가 “말씀하신 그 ‘언젠가’는 언제냐”라고 묻는다. 당연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그는 “지연 없이, 즉각”이라고 중얼거린다. 그가 휴가를 다녀오느라 전날 있었던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아무튼 그는 그렇게 말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동서 베를린 국경 지점으로 달려갔다. 동쪽의 수비대도 그들을 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장벽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허망하게 베를린 장벽은 열렸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이렇게 단순한 일을……..



베를린 장벽과 함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곳이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다. 말 그대로 이곳은 동, 서 베를린 경계에 있던 검문소 중 ‘C’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미군 병사의 상반신 사진이 걸려 있는 옆에는 당시 풍경 사진이 걸려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동, 서 베를린 사이를 오가는 방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면 가능했는데, 그중 찰리(C ) 검문소는 연합군과 외교관, 외국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1961년 10월 동베를린을 방문하려던 미국 외교관에게 동독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한다. 미국 외교관은 이를 거부한다. 대신 며칠 후 여러 대의 탱크를 그곳으로 몰고 온다. 소련 역시 동독 지역에 탱크를 끌고 나타난다. 미국과 소련의 자존심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흐루쇼프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탱크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미국의 외교관들은 검문 없이 체크포인트 찰리를 다시 지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동독인들은 이 곳, 미군 구역으로 오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강대국들의 자존심 대결은 이렇게 마무리됐지만, 자유를 찾아 서쪽으로 향하는 동독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탈출하다 발견되면 사살이다. 1962년 8월 페터 페히터라는 동독인도 친구와 함께 이곳을 넘으려다 발각되었다. 친구는 무사히 서베를린에 도착했지만, 페터는 총탄을 맞은 채 동베를린 쪽으로 떨어졌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기자와 주민, 서독의 경찰이 많았지만 그를 구하지는 못했다.


일어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끊임없이 기억하여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인간이 할 일이다. 눈을 가리고, 벽을 세우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마음을 품는 자들은 더는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트램을 타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향했다. 베를린 장벽 공원이 가장 최근의 아픈 독일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라면,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로이센의 영광부터 몰락까지를 상징하는 곳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베를린의 상징 같은 곳이다. 모르는 사람이 배경에 잡히지  않는 사진을 건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최대한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사진을 찍고, 근처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연인들이 셀카를 찍기도 하고, 문을 배경으로 부모님의 사진을 찍는 가족들도 있다. 평화롭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현대에 복원했다. 국경이 나뉘었을 때는 동독에 속해 있었다. 서독과 아주 가까운 근방에. 브란덴부르크 위에 앉은 승리의 여신은 그간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프로이센에서 현대까지 내려오는 굴곡 많았던 현대사를.

브란덴부르크 문앞에는 사람이 많다. 걷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설명 듣는 사람.......


독일의 역사는 어렵다.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해 학위를 받는 것도 어렵지만, 23가지 과목을 동시에 공부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것과 같다. 통일된 하나의 제국에 대해 아는 것도 힘든데, 독일에는 수많은 제후국이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역사를 다 알자면 끝도 없다. 게다가 이 나라, 저 나라 왕의 이름도 다 비슷비슷, 거기서 거기다(네, 고려의 태종, 성종, 조선의 태종, 성종, 기타 등등의 왕을 가진 국민이 할 말은 아니라는 걸 저도 압니다).


일단 프로이센을 보자. ‘프리드리히’와 ‘빌헬름’, 그리고 숫자를 섞으면 프로이센의 모든 국왕을 말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1세 다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고, 그다음은 프리드리히 2세이고 뭐 이런 식이다. 골치 아프다. 이럴 때는 중요한 것 몇 개만 기억하는 편이 쉽다. 프리드리히 2세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부르는), 빌헬름 1세 마지막으로 빌헬름 2세만 기억해보자.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강철 왕국으로 만든 장본인이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 함께 ‘독일 제국’을 건설하여 ‘독일 황제’라 불린 인물이다. 빌헬름 2세 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로이센은 망한다. 즉 이 세 사람은 프로이센의 시작과 정점, 끝을 나타낸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1791년에 완성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였고, 자식이 없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냥 프리드리히 대왕의 다음 왕으로 기억해도 된다.


삼촌이  합리적이고, 계몽적이고, 프랑스 문화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지적인 인물이었던데 반해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투시력과 점성술 같은 것을 신봉하는 뭐랄까….. 누군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하여튼 뭐 그런 인물이었다고 한다.


프이드리히 대왕이 국사의 전 영역에서 경제적으로 엄격한 통치를 함으로써 5100만 탈러의 국고를 물려주었는데, 이 어마어마한 자금을 그의 후계자가 탕진하는 데는 1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 왕국 프로이센] 중에서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브란덴브루크 문은 어떤 ‘계시’에 의한 작품은 아니다(적어도 알려지기로는 그렇다). ‘평화의 상징’으로 문을 구상했다.



조카 프리드리히는 베를린의 수많은 관문 중 하나가 있던 자리에 1788년경 새로운 관문을 만들 것을 명한다. 왕은 고대 아테네 황금기 정치가였던 페리클라스와 자신을 비교하기 좋아했고 그런 물주의 취향을 존중하여 건축가인 카를 랑한스(Carl Gothard Langhans)는 고대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관문을 본떠 설계했다. 문이 완성된 후 청동으로 주조한 사두 전차를 탄 승리의 여신상을 그 위에 세운다. 그것으로 개선문다운 위엄이 갖춰졌다. 이후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대는 이 문을 지나 행진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 축구대표팀도 이 곳에서 환영행사를 가졌다. 그래, 전쟁보다는 축구다!


왕의 삼촌, 그러니까 프리드리히 대왕은 독일의 다른 제후국들유럽의 많은 왕들이 치를 떨 정도의  전쟁 영웅이었지만, 다음 왕은 그렇지 못했다.

4마리 말이 끄는 마치 위에 승리의 여신이 지팡이를 들고 있다.


실제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개선 행진을 한 인물은 문을 만들었던 프로이센의 왕이 아니라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였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에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어느 정도 대승이었냐 하면 프로이센 왕실이 베를린을 버리고 쾨니히스베르크까지 도주했을 정도다.


1806년 10월 27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베를린으로 개선 행진을 한다. 군대를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베를린 궁전(지금은 없어졌다)까지 행군했다.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브란덴부르크 문 위 청동상을 파리로 가져가 승리의 기념으로 전시했다.




1813년 러시아와 손을 잡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 그 군대를 몰아낸다. 1814년에는 내친김에 파리까지 추격한다. 당시 프로이센 군을 이끌었던 에른스트 하인리히 아돌프 폰 부펠 장군의 특명은 청동상을 찾는 일이었다. 그는 파리를 접수한 지 3일 만에 청동상을 찾아낸다. 아무 일도 안 하고 그것만 찾아다닌 셈이다. 아무튼 청동상은 무사히 프로이센의 손에 들어오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


여신의 지팡이를 확대해 보았다. 오른쪽이 나치의 휘장. 닮은 것이 느껴지십니까?

전차상 여신의 손에는 철십자 훈장이 달린 긴 창이 들려 있고, 그 위에는 프로이센의 독수리가 있다. 이 상징을 이용한 것이 나치다.




프로이센이 제대로 된 개선식을 한 것은 한참 후였다. 1871년 6월 16일 빌헬름 1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브란덴부르크문에서 개선행진을 한다. 수만 명의 구경꾼을 위한 관람석을 만들어졌고, 비스마르크는 황제로부터 대공 작위를 받는다.


황제가 앞장섰고 뒤로는 철십자 훈장을 단 군대가 행진했다. 시인 엠마누엘 가이벨(Emanuel Gaibel) 이 광경을 보고 감격에 젖어 유명한 시를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힘을 지니고 있으나 경건하며, 자유롭고도 규율이 있는 천년제국을 세우리라!” 이 시구는 60년 후에 나치의 선전 표어가 된다

– 스테판 로란트의 [철과 피의 제국] 중에서




승리의 행진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귀환하는 병사들도 전통에 따라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행진했다. 베를린의 시민들은 그들을 환호했다. 그들은 독일군이기 이전에 자신들의 아들이고, 형제이고, 친구였다. 살아 돌아온 것은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 병사들의 행진 속에 히틀러는 없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한 이래 여러 번 부상을 당했고,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파제발크의 군 병원에서 가스 중독 치료를 받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얼마나 심각한 양상의 전투가 벌어질 지 예견한 나라는 없었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군부는 곧 승리를 할 수 있으리라 장담했다. 하지만 전쟁의 진행은 군부의 마음대로 되지도 않았고 상상 가능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전개되었다. 4년의 기간 동안 1000만 명 가까운 숫자가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630만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경상자와 행방불명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군부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독일 의회는 전쟁 종결을 위한 방법을 모색한 끝에 정당 의원들이 모여 '평화 결의안'을 채택한다. 독일 정부는 이 전쟁과 아무 잘못이 없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하지만 소용없었다.


정치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군부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모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황이 불리해지면서 파업이 발생하고, 평화 시위가 벌어졌다. 반유대주의의 감정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개혁을 원하는 목소리가 번져 나갔다.


그 사이에도 독일은 계속 전쟁에서 진다. 대신 곧 승리할 것이라고, 이길 수 있다고, 독일군은 최강의 군대라는 선전전을 멈추지 않았다. 군부의 총 사령관은 변장을 한 채 스웨덴으로 탈출하고,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해 버린다. 그제서야 독일은 연합국이 요구하는 강화협정을 받아들인다.


독일군과 국민들은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곧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주입을 계속해서 받아왔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누구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인지'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 독일군은 패했고, 군부는 도망갔으며, 황제도 사라졌다. 독일군들의 피와 땀과 희생은 헛 것이 되어버렸다. '망연자실'이란 표현이 정확했을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황제나 군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된 독일 의회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독일군의 '등 뒤에서 칼을 꽂았다'는 말이 퍼뜨렸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 말을 믿었다.




1차 세계대전의 독일 군부는 잘못된 정보와 작전때문에 패했다. 그로 인해 국력도 인력도 낭비되어 더 이상 전쟁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잘라 말하자면 멍청한 군부와 황실 때문에 독일 제국은 망했다(나치는 신성로마제국시대의 독일을 '제1제국', 이 시기의 독일을 '제2제국', 나치 지배 시대를 '제 3제국'으로 구분했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군 지휘관들은 연합국에 휴전을 요구했지만, 협상이란 주고받을 것이 있는 경우에 성립된다. 이미 망한 나라와의 협상을 누가 해준다는 말인가. 연합군은 자신들의 휴전 조건을 전했고, 그것이 끝이었다. 이렇게 독일 제2 제국은 막을 내렸다.


도시 이곳저곳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불만이 있고, 폭력의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사회는 불씨만 댕기면 바로 타오를 화약고 같았을 것이다. 프로이센의 왕정, 노련한 비스마르크의 정치 아래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정당들은 누구의 이익도 제대로 대변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유혈사태와 폭력사태, 그것으로도 모자라 차출된 군대가 시위대를 위협하고 때로 약탈했다.


연합국의 과도한 배상 때문에 서민들은 그야말로 ‘굶는 일을 밥 먹듯’하고 있었지만, 이런 시대에 돈을 버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본금을 가진 사업가이기 마련이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사업자 후고 스티네스는 이 시기 광산과 공장, 부동산을 사들여 국가 산업 중 25%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나무위키 펌

그리고 마침내 한 남자가 등장한다. 트렌치코트에 단장을 집고 나와 훈장을 단 검은 예복의 퇴역 군인들에게 ‘독일만으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고 외치는 남자가 등장한 것이다. 사회의 빈부 격차는 유대인들의 탓이고, 오직 독일인만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남자.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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