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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23. 2022

파리 광장과 전승기념탑

28.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브란덴부르크문이 서 있는 광장의 이름은 ‘파리 광장’이다. 베를린 속의 ‘파리' 광장. 브란덴부르크 문을 등지고 길 끝을 바라보면 거대한 전승기념탑이 보인다. 이곳에 ‘파리’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저 전승기념탑과 관련되어 있다.


넓은 광장에 서 있는 전승기념탑은 매일 한 장씩 뜯는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처럼 보였다. 스당의 날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던 해에 그것을 찢었어야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스당 전투를 기념하지 않는 해는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다. 스당 전투가 끝난 후 남은 것은 오직 퍼레이드뿐이었다.

 ……

스당 전투가 끝난 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인들이 패배한 이후 세계사는 영광스러운 무덤 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으며 이 전승기념탑은 그 무덤 위에 세워진 돌로 된 묘비였다. 그리고 그 무덤으로 개선로가 뻗어 있었다.  

– 발터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 중 ‘전승 기념탑’]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발터 벤야민의 글은 비교적 읽기 쉽다. 사랑은 인간 공통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글을 읽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공간, 시간, 질서 안에 있었는지를 짐작해야 한다.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고,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와 최선을 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살았던 장영실이 만약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면? 아마 임금의 어가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태형을 받은 후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화성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지구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일어났을 때 발터 벤야민은 22살이었다. 무작정 전쟁의 불구덩이로 달려가는 나라, 패전 후 발생한 고통스러운 상황, 어지럽고 혼란한 사회 속에서 그는 생각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묘사된 것처럼,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베를린에서는 매해 ‘스당의 날’을 기념해 퍼레이드를 벌였다. ‘퍼레이드’라고 표현했으니 화려한 광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독일 국민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지난 승리를 축하했다. 어떤 의미의 전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겼다’는 것이 핵심이다. 어쩌면 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국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모든 것을 잊는다. 이렇게 1차 세계대전이 패전하는 그날까지 파리 광장에서는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발터 벤야민이 전승기념탑을 ‘묘비’처럼 느낀 이유다.


‘스당의 날’은 187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싸운 ‘스당 전투’를 기념하는 날이다.


스당 전투 10년 전인 1861년, 64세의 빌헬름 1세는 사망한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됐다. 이전의 프로이센 왕들처럼 그의 주요 관심사도 당연히 ‘군대’였다. 그때까지도 독일은 39개의 제후국으로 구성된 느슨한 결합체였다. 빌헬름 1세는 독일을 통일시켜 강력한 국가로 만드는 것이 프로이센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왕은 개병제를 도입하고, 예비군까지 상비군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하지만 의회가 발목을 잡았다.


1862년 왕은 새로운 재상을 기용한다. ‘비스마르크’의 등장이다. 그는 첫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독일제국 선포. 위키 펌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연설이나 다수결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어쩐지 국민과 의회를 향한 선전포고 같다. 프로이센의 상징 ‘철과 피’는 이렇게 등장했다. 비스마르크는 실제로 의회를 거의 무시했다.




2년 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을 점령한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연합했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싸워 이긴다.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쪽 지방 독일 제후국들이 프로이센 쪽으로 돌아선다. 프랑스는 긴장한다. 프로이센의 힘이 강해지면 곤란하다. 하지만 프로이센이 거슬리는 것일 뿐 두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프랑스는 이미 프로이센을 점령했던 역사가 있지 않은가. 나폴레옹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개선식을 했을 때 말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으며 그 전쟁이 독일의 통일을 가져올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외국인들에게는 자신이 전쟁을 싫어한다고 말해 왔다(빌헬름 2세와 히틀러도 그러했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 후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공화당 설립자의 일원이 된 독일인 자유주의자 칼 슐츠에게 ‘2년 안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귀띔한 것은 1867년이었다.

– 스테판 로란트의 [철과 피의 제국] 중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작은 불씨가 떨어진다. 스페인의 왕위 계승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먼저 선전 포고한 쪽은 프랑스였다. 1870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프랑스는 동원령을 내리고 5일 뒤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한다. 독일의 연방들이 속속 프로이센 군에 합류한다. 2주 만에 40만 명의 독일 병사가 전투 지역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2022년 4월 기준으로 대한민국 육군이 53만 명임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8월 4일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다. 프랑스군은 후퇴를 반복한다. 8월 마지막 날 프랑스의 아르덴 주에 있는 ‘스당’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맞붙는다. 9월 2일 10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 프로이센의 완벽한 승리였다. 포로 중에는 황제인 나폴레옹 3세도 있었다.


스당 전투 후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세. 위키 펌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독일 연방의 대표자와 군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황제의 관을 받고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다. 드디어 ‘통일 독일’의 모습이 갖춰진 것이다.


전승기념탐. 위키 펌.

독일이 ‘스당 전투’를 계속 기념한 마음은 짐작이 된다. 빌헬름 1세는 이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개선식을 한다. 1873년 ‘전승기념탑’이 완성된다. 매해 그곳에 모여 승리를 자축한다. 전승탑은 원래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 있었는데, 1939년 히틀러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할 말이 아니긴 한데, 히틀러가 자리 하나는 잘 고른 것 같다.




‘전승 기념탑’ 위에는 승리의 여신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미안하지만 아름답거나 우아한 모습은 아니다. 도시 가운데서 금빛으로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고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저분. 초면인데 낯익다.


베를린 천사의 시. 아저씨가 천사, 앉아 있는 곳은 전승기념탑 위

아, 오래전 빔 벤더슨(Wim Wenders)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Wings of Desire, Der Himmel über Berlin)’에서 저분을 뵌 적이 있다. 베를린에 근무하는 천사들은 저 여신상 옆에 앉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백 필름 속 베를린의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다. 물론 ‘천사’가 늙은 아저씨의 모습이어서 어린 마음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는 것을 보면 꽤 인상적이었던가 보다. 그런 사람이 나 하나인 것도 아니다. 할리우드도 이 영화를 탐냈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 영화를 각색해서 니콜라스 케이지와 멕 라이언 주연의 [시티 오브 엔젤]을 만든다. 원작이 망작이 되는 과정을 보고 싶다면, 한 번쯤 엮어서 봐도 좋은 영화들이다.



그런데 ‘승리’를 나타내는 상징은 왜 ‘여신’인 걸까? 전쟁의 신은 남자의 얼굴을 했지만, 그 승리만은 여성의 얼굴이라는 것일까. 역사에서 ‘승리’는 남자의 표정인 경우가 많다. 브란덴부르크에서 개선식을 한 사람은 나폴레옹과 빌헬름 1세였다. 하지만 그 승리의 맞은편에는 안타까운 여성의 모습이 앉아 있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예나-아우에르 슈테트 전투에서 승리한 후 프로이센 왕가는 쾨니히스베르크까지 도망친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더 동쪽 지역인 ‘메멜’까지 이동한다. 한 겨울 혹한의 날씨 속에서 왕비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까지 건너갔고, 이 일로 건강을 해쳤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센 '루이제 왕비'

어쨌거나 1807년에 전쟁의 마무리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전쟁에 졌으니 승리자에게 땅도 빼앗기고, 전쟁 배상금도 지불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프랑스가 원하는, 프로이센의 입장에서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조금이라도 만회해 볼 속셈으로 프로이센의 남자들이 머리를 굴린 결과 ‘루이제 왕비’를 회담장으로 보낸다. 싸움을 누가 하고, 뒷수습은 누구에게 하라는 말인지……


나폴레옹은 ‘마담’의 흰색 드레스를 칭찬했을 뿐 조약은 프랑스 황제의 결정대로 마무리되었다. 루이제 왕비에게는 ‘프랑스 황제와 단 둘이 한 방에 있던…..’, ‘미인계’ 따위의 오명이 남았다. 물론 왕이 된 아들은 어머니를 '전설'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일의 국모' 정도까지 신격화 시킨다. 하지만 왕비가 죽은 다음의 일이다.


프로이센 왕가는 1809년이 되어야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왕비는 다음 해 사망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프랑스 때문이라고 아들이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아들이 훗날 스당 전투에서 승리한 빌헬름 1세다.





1871년 9월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혔을 때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나폴레옹 3세의 아내였던 ‘외제니 황후’가 황제의 선처를 원하는 편지를 직접 적어 보냈다. 하지만 빌헬름 1세에게 모욕적인 답장만 받았다고 전해진다. 빌헬름 1세의 입장에서야 어머니의 원수 프랑스에 이제야 복수를 한 것이니 고운 말이 안 나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뺨을 맞고 외제니 황후에게 굳이 화풀이를 할 것 까지야…… 외제니 황후는 90이 넘도록 장수해서 독일이 패망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프랑스의 외제니 황후


전쟁의 비극은 전쟁터에서 끝나지 않는다. 길고 지루하고 힘겨운 고통은 그 후에 찾아온다.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패전 회담장’에 홀로 나타난 왕비나 사로잡힌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여 편지를 적은 황후처럼 전쟁의 뒤처리는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어리석은 대중은 정신적 삶에 대한 광적인 증오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정신적 삶을 확실히 없애버리는 방식은 몸뚱이를 세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허락하기만 하면 그 몸뚱이들은 대오를 맞춰 정렬하며, 집중포화 속으로든 백화점으로든 행군하면서 뛰어든다. 어느 누구도 앞사람의 등 이상을 보지 못하며, 각자는 그처럼 다음 사람에게 모범적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것을 남자들은 수세기 전에 전장에서 알아차렸다. 하지만 빈곤을 일렬로 사열시키는 일, 줄 서기는 여자들이 발명했다.

– 발터 벤야민의 [일방 통행로] 중에서


발터 벤야민은 모두 한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는 당시 독일의 상황에 치를 떨었다. ‘어리석은 대중’이 ‘앞사람의 등만 보며’ 뛰어가는 것처럼 느꼈다. 생각없이 남이 가라는 곳으로 달려가는 삶,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모범이라고 믿는 아둔함...... 그를 낙담시킨 것은 이런 풍경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빈민구제소나 배급소에 길게 줄을 선 여자들. 그 빈곤의 모습에도 그는 절망했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목격한 광경은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의 모습에 비하면 오히려 행복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1945년 항복했을 때, 독일의 국토는 ‘30년 전쟁’ 후의 상태에 비견할 만큼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전체 인구의 10퍼센트가 죽거나 실종되었는데, 대부분이 군인, 즉 젊은 남자였다. 전쟁 후 독일을 일으킨 사람들은 ‘폐허 부인’이라고 불린 여성들이었다.


막스 라흐니트(MAX Lachnit) , 폐허부인, 위키 펌


여자들은 손으로 건물을 허물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떼어내서 시멘트를 제거한 다음 ‘폐허 수레’에 실었다. 세면기부터 전선까지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골라냈다. 맨손으로 집을 다시 세우고 도시를 다시 건설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여자들은 거의 모두 일에 동원되었다.

– 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중에서


전쟁 뒤에는 거대한 파괴가 남는다. 전쟁은 결코 답이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브란덴부르크뒤로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투명한 돔을 이고 있는 ‘국회의사당’이다. 1894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독일 제국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상황은 비참했다. 엄청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해 돈의 가치는 하락했고, 식량은 부족했으며,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길에서는 난동과 폭동이 이어졌다. 우익 집단이 뛰쳐나와 테러를 벌이고, 노조는 강성 파업을 이어갔고, 정치가는 총에 맞았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밥과 따뜻하게 쉴 집, 깨끗한 옷 한벌이었지만 그것은 너무 원대한 꿈처럼 느껴졌다.


독일 국회의사당

그때 등장한 것이 나치다. 나치는 전후 독일의 혼란과 좌절을 틈타 국회까지 진출한다. 히틀러는 기만과 거래를 통해 '수상'의 위치까지 거머쥔다. 이제 과반수 의석만 확보하면 바랄 것이 없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차지하고 있는 200여석의 의석만 가져올 수 있다면 히틀러는 이 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33년 2월, 선거를 며칠 앞둔 저녁 국회의사당이 불타오른다. 히틀러는 ‘공산당’의 짓으로 규정하고 사회질서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긴급령'을 만든다. 시민의 자유 및 언론보도의 자유를 제한하고, 영장없는 수사도 할 수 있는 '초강력법'이 통과된다. 군부독재 시절의 '긴급명령' 같은 것을 떠올리면 된다.


선거 전날 히틀러는 라디오에 나와 공개적으로 지지를 호소한다. 이 선거에서 나치는 기존 196석이던 의석을 288석으로 늘리는 놀라운 승리를 거둔다. 공산당 소속의 의원, 공산당의 간부들은 '긴급령'에 의해 교도소로 끌려간다. 교도소의 빈 자리가 없자 수용소를 짓는다. 이것이 나치의 첫 강제수용소가 된다.  나치의 시대는 이렇듯 부서진 국회의사당을 지나 국회를 전복시키며 등장했다.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국 조종사들은 이 상징적인 건물을 폭격으로 날려버렸다. 지금 지어진 것은 통일 이후 재건된 것이다. 옥상의 돔은 전망대로 사전 예약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데, 우리가 방문 가능했던 날은 예약이 끝나버려서 결국 입장은 하지 못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 대로를 따라 내려오면 프리드리히 대왕 기마상을 만날 수 있다. 광화문 세종대왕 상과 이순신상을 합쳐놓은 인물이 독일인들 마음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닐까 한다. 대왕상을 지나면 ‘훔볼트 대학’이 나온다.

프리드리히 대제 기마상


1806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왕은 내치에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1809년 2월 공교육 국장이 된 빌헬름 폰 훔볼트(Friedrich Wilhelm Christian Carl Ferdinand von Humboldt)는 프로이센의 교육을 변화시킬 개혁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1810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 하인리히 왕자의 비어 있는 궁을 수리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를 만든다. 이것이 지금의 훔볼트 대학이다.


소박하고 단정한 입구를 지나 학교 안으로 들어서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에 마르크스의 글이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aber daraul an sie zu verandern).’라는 문구다.

훔볼트 대학 층게 중간에 마르크스의 글이 적혀 있다.

2층에는 유명한 졸업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아는 얼굴도 있고, 누구인지 감이 오지 않는 얼굴도 있다. 마르크스 얼굴은 익숙하고,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플랑크의 얼굴도 찾았다. 하지만 내 머리에 떠오른 인물의 사진은 없다(꼼꼼하게 못 봤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못 찾았습니다). 훔볼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차 세계대전에서 공적을 세웠으나, 인간의 양심과 재능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인물, 바로 프리츠 하버(Fritz Jakob Hab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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