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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26. 2022

질소는 소중해

29. 프리츠 하버의 인생을 생각하자

나는 타인이나 정치에 큰 관심이 다. 연예인이나 에 관한 소문은 그것이 사라지기 직전에야 내 귀에 들어오거나 심지어 모든 열풍이 다 지난 후에 주워듣게 된다. 살고 있는 동네의 국회의원은 십 년 넘게 같은 분이기 때문에 알고 있지만, 구청장이나 기초 의원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 알고 있는 것도 예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학생 시절에는 이런 종류의 ‘무관심’을 일종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철 없이 연예인을 추종하거나, 고루한 냄새가 날 법한 ‘어른들의 정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도도하고 차가운 '젊은이’라는 인증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니 ‘과연 사회나 정치와 무관하게 살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 생겼다. 거대한 도시 한 귀퉁이에서 숨 쉬는 멍청하고 쫄보인 내가 사회라는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내가 담겨있는 사회에 관심을 갖고, 그 사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내 개인의 삶에 굉장히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데 ‘프리츠 하버(Fritz Jakob Haber)부부의 삶’이 큰 영향을 주었다.


프리츠 하버 부부는 천재들이었다. 인간대 인간으로서 보자면 부부는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나 같은 사람과 비교가 불가할 만큼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들도 거대한 시대와 사회 앞에서는 무력했다. 사회는 내 삶과 행복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프리츠 하버(Fritz Jakob Haber)’는 독일의 화학자다. ‘질소 고정법을 이용해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만든 공로’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프리츠 하버’와 그의 부인 ‘클라라 임머바르(Clara Helene Immerwahr)’가 태어난 지 얼마 후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이 된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 비정상적인 나라였다.


프리츠 하버. 흠.... 위키 펌


프로이센은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귀족 아래로는 ‘재산’에 따라 신분을 결정했다. 신분에 따른 차별도 심했다. 계급에 따라 선거권도 달리 적용됐다. 돈 없는 사람의 백 표를 돈 많은 사람의  한 표 정도와 바꿀 수 있었다(정확한 비율은 아닙니다). 직업과 나이, 재산, 사회적 지위는 꼼꼼하게 기록되고 등록됐기 때문에, 데리고 있는 하녀가 바뀌어도 국가에 신고를 해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 관리를 해야 전쟁 시 군대를 소집하거나 병참의 역할을 맡기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금지’ 규칙이 가득했다. 예를 들어 ‘아동’은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 있고, ‘잔디밭’에 들어가는 것도 곤란하다. 규칙을 어기면 바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프로이센의 청년은 자라면 현역 복무, 이후는 예비군, 그다음은 향토 방위군, 이후로는 국민군으로 살아갔다. 평생을 병영에 포함되어 살아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남성들은 군대식 복종과 규율에 뼛속까지 물들어 있었고, 이들의 성향은 고스란히 가정으로, 여성과 아이들에게로 전달되었다. 독일의 가정의 분위기는 군대식 상명하복, 가부장제인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사회생활에는 뚜렷한 제약이 있었고, 교육의 기회도 거의 없었다.


이런 식으로 프로이센 사회가 굴러간 결과 국민들은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령을 받으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민하지 않고 실행하게 되어 버렸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발터 벤야민처럼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인슈타인도 일찌감치 도망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이것을 ‘정상 사회’라고 생각했다. 이들보다 훨씬 뒤인 1911년에 태어난 브룬힐덴 폼젤(Brunhilde Pomsel)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집에서 모든 걸 결정한 건 아버지였어요. 많은 일에서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우리가 졸라도 엄마는 그냥 심드렁하게 <아빠한테 물어봐!>하고 대답하곤 했어요. 나중에는 아버지도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어렸을 때 우리는 아버지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어요.

우리는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배웠어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을 때는 벌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런 일은 허다했어요……우리는 집에서 자연스럽게 순종을 배웠어요. 가정 안에서 사랑과 배려 같은 건 부족했죠. 오히려 우리는 순종하는 가운데 서로를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에 익숙해졌어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을 통해 원래 아이들에게는 없던 특성이 우리 속에서 깨어난 거죠.

- 토레 D 한젠, [어느 독일인의 삶] 중에서




1886년 프리츠 하버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 즉 지금의 훔볼트 대학에 입학해 화학을 공부한다. 학 한기를 다닌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기지만, 1891년 훔볼트 대학으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는다. 예나대학에서 일하던 중 유대교를 버리고 루터교로 개종하고, 이후 카를스루 공과대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프리츠 하버의 부인 클라라 임머바르 역시 화학자였다. 그녀는 대학 능력 시험을 본 후 고향인 브로츠와프 대학교에서 ‘청강생’으로 공부를 한다.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선처를 바란다는 편지를 교수들에게 보내고, 남자들만 가득한 강의실에서 수군거림을 들으며 그녀는 공부를 계속한다. 보통의 재능과 결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클라라 임머바르. 위키 펌

결국 1900년, 클라라 임머바르는 여성의 대학 진학조차 불가능했던 독일에서 여성 최초로 박사 학위를 따낸다. 그녀의 학위 취득은 놀라운 일이어서, 당시 신문은 그녀를 주제로 기사를 쓰기도 하고, 그녀 자신이 직접 강연자로 사람들 앞에 서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나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에 천착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들이 3세, 4세가 지나가면 한국적인 생활보다는 미국인의 삶에 더욱 친밀하게 되는 것처럼 두 사람도 자신들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독일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훗날 개신교로 개종한다. 말하자면 프란츠 하버 부부는 평범한 독일인 부부였다.


두 사람이 활동하던 당시 유럽은 산업 혁명 이후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인구 문제로 긴장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토머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는 <인구론>이라는 책을 통해 ‘인구의 증가는 기하급수적이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과잉 인구로 인해 위기가 찾아 올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는다. ‘식량 부족’이 화두로 떠오른다.




훔볼트 대학을 만든 빌헬름 폰 훔볼트에게는 알렉산더(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라는 동생이 있었다. 알렉산더 훔볼트는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였는데, 남미를 여행하던 중 현지인들이 농사에 ‘구아노’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구아노(Guano)’란 새들의 배설물이 화석처럼 쌓인 것을 말한다. 처음 훔볼트가 학계에 이 사실을 보고했을 때 반응은 시큰둥했다. 하지만 곧 구아노 안의 ‘불안정한 질소’ 성분이 식물 성장에 핵심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질소는 식물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공기나 햇빛을 통해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질소를 사면서 몹시 적은 양의 과자를 얻어 올 때 알 수 있듯 ‘공기 중의 질소’는 매우 안정된 상태다(그렇지 않으면 과자 봉지가 터질 것이다). 안정된 상태의 질소는 식물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질소를 불안정한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세균이다. 콩 그리고 그 비슷한 종류의 식물 뿌리에 기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가 그 일을 할 수 있다. 번개가 칠 때 순간적으로 질소가 쪼개지기도 한다. 번개를 맞으면 사람도 죽는데, 뭐든 쪼개진다고 해서 놀랍지도 않다.




세균이나 번개 없이 질소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야 ‘구아노’와 비슷한 물질을 만들 수 있다. 화학자들은 질소를 들고 이리저리 궁리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구아노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지표에 굴러다니던 구아노가 줄어들자 사람들은 비슷한 성분이 함유된 ‘초석’에 주목한다. 이미 초석은 다이너마이트나 총기를 제작할 때 반드시 필요한 자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구하기 어렵다. 조선에서도 화포를 쏘려면 초석이 필요했다. 초석이 없다면(실제로 우리나라에는 초석이 생산되지 않는다) 효율은 좀 떨어지지만 질산 칼륨’이라도 있어야 했다. 질산 칼륨, 다른 말로  염초를 만드는 일은 '국가기밀'중 하나였다.


그러나 화약 제조를 위해 70% 이상 드는 염초는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인도나 남미 같은 곳에서는 새나 박쥐 등의 분뇨가 광산처럼 널려있어서 구하기 어렵지 않았는데요. 유럽에서도 인분을 쌓아둔 염초 밭을 조성해서 질산염을 대량 생산했습니다.
.......
그런데 역관 김지남(1654~?)이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자초 신방>이라는 책이 고민을 단번에 해결했답니다. 화약제조법은 국가기밀이었죠. 통역관을 맡아 중국을 방문한 김지남은 ‘염초 구하는 비법’이 적힌 이 책을 입수해서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
정조의 개인문집(<홍재전서>)와 <정조실록>(1796년 5월 12 일조)은 “이제 길가의 흙에서 마음껏 염초 구하게 됐다”면서 “숙종 때 인쇄·반포한 <(신전자초방>은 영원히 준수하고 따라야 할 금석과 같은 성헌(成憲·헌법)같은 책”이라고 극찬했습니다.

- 경향신문 [이기환의 HI-STORY 조선의 화약은 왜 '똥천지' 길가의 흙에서 뽑아냈을까] 중에서


말하자면 ‘초석’은 평화시에는 인류의 밥이요, 전쟁 시에는 사람들의 ‘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묘한 물건이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당시의 제국 열강들은 이 초석을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구아노와 초석을 채취하는 노예로 끌려가 죽거나 다치는 비극을 겪었다. 페루와 볼리비아 그리고 칠레는 초석이 묻힌 땅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태평양 전쟁 혹은 초석 전쟁(1879 - 1883년)’으로 알려진 이 전쟁으로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땅을 모두 빼앗기고 내륙국으로 남게 된다.

티티카카 호수. 오마이뉴스 펌

지금도 칠레와 볼리비아의 관계는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볼리비아는 비록 내륙국이 됐지만 티티카카 호수를 이용해 해군을 유지한다. 몇 년 전 남미 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가 해 준 설명이다. '지구상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에 주둔하는 해군'이란 말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그때 내가 그랬다.




이쯤 되니 당시 화학자들은 ‘불안정한 질소’를 만드는 일을 예수의 성배를 찾는 일처럼 중요한 과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공기 속 안정된 질소 분자를 반응성이 높은 다른 질소(암모니아, 질산염 등)로 만드는 ‘질소 고정법’을 알아내는 일에 많은 화학자들이 뛰어든다. 프리츠 하버도 그중에 하나였다.


1909년 3월, 프리츠 하버는 고압에서 오스뮴 촉매를 이용해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1913년 카를 보슈(Carl Bosch)와 함께 대량 생산기술을 개발한다. 이로써 독일은 최초로 ‘질소 고정’을 이용한 화학 비료 생산에 성공한다. 이것으로 '인류의 식량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의 업적을 두고 사람들은 '공기를 식량으로 만들었다'고 칭송했다. 물론 분배의 문제가 남아 있어 아직 세계가 공평하게 누리지는 못하지만……. 물론 이 발견은 독일 전쟁 무기 보급에도 큰 공헌을 한다.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초산은 질소화합물의 대표적인 약품이지만 그것의 거의 유일한 원료는 남미 칠레의 특산품인 천연 초석이었다. 20세기 초 노르웨이의 크리스찬 비르켈랑이 공중 방전에 의해 공중질소를 고정하여 인공적으로 초석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리하여 이 인조 초석이 칠레산 천연 초석과 경쟁하게 되었는데 인조 초석을 만드는 방법은 전력의 소비가 많다는 것이 난점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합성 암모니아에 의한 초산의 제조를 고안해 냈다. 이는 공중에서 얻어진 질소와 물의 전기분해에 의해 분리된 수소를 고압 상태에서 촉매 작용에 의해 결합시켜 합성 암모니아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1913년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칼 보쉬(Carl Bosch)에 의해 공업화되었는데, 그때 이후 천연 초석은 화약의 원료로서나 인조 비료의 제조에 있어서나 이미 그 필요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요컨대 독일은 전쟁이 일어나도 화약을 자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춘추]의 필법을 따르자면, 하버와 보쉬에 의한 인조 초석의 공업적 생산이 독일의 참모본부와 황제로 하여금 전쟁을 결심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김택현 편역, 세계사 중에서




프리츠 하버가 자신의 분야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클라라 임머바르는 집에 있었다. 병약한 아들을 돌보며 과학계에서 승승장구 중인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많은 독일 남자들이 아내를 생각하는 것처럼 프리츠 하버 역시 자신의 부인을 대했던 것이다. 재능의 낭비다.


프리츠 하버는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특허로 출원해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이용해 아내의 사회생활을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유모나 가정교사를 고용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클라라 임머바르는 자신의 경력이 쓸모 없어지고, 사회적으로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답답했을 것이고 마음도 상했을 것이다. 클라라는 정신적으로 무너진다. 두 번에 걸쳐 요양원 생활을 한다. 19세기 여자의 병이었으니 병명은 아마 히스테리 정도가 아니었을까. 안타깝다.  




1914년 독일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든다. 단 몇 주만 있으면 독일이 승리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전쟁은 독일군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지루한 참호전이 이어진다.


‘독일제국의 국민’ 프리츠 하버는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해결할 방법을 연구한다. 그는 ‘염소’ 기체를 이용한 화학무기를 개발한다. 클라라는 남편의 ‘화학무기’ 개발을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남편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화학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학문인 화학'이 ‘사람을 죽이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당연히 싫지 않았을까. 하지만 프리츠 하버는 개의치 않는다. 프로이센의 남자라면 응당 아내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어디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왈가왈부야…… 이러면서.


화학무기전을 지시하는 프란츠 하버. 위키 펌


1915년 4월 벨기에의 이프르에서 벌어진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프리츠 하버는 화학무기 투입을 결정하고,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한다. 이 당시 사용된 화학무기는 인간의 점막으로 흡수되어 내장을 녹였다. 이 무기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부가 타는 듯한 엄청난 고통과 함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사망에 이른다. 도무지 인간적인 죽음은 아니다.


전쟁터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법이다. 이후 독일 뿐 아니라 연합군에서도 화학무기가 사용된다. 죽고 부상당하고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은 것은 양측의 군인들이었다. 젊은이들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게스트 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나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수다를 떨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된 것이다.




프리츠 하버는 화학무기 개발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장교가 된다. 1915년 5월 프리츠 하버의 집에서는 화학무기 개발의 성공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린다. 화려하고 시끄러운 밤이 지나가 다음 날 새벽, 클라라 머바르는 프리츠 하버의 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쏜다.


13살의 아들 헤르만 하버가 어머니를 발견했을 당시,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아들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속수무책 지켜봤다. 바로 그날, 프리츠 하버는 아내의 시신과 놀라고 상처 입은 아들을 남겨둔 채 또 다른 화학 무기전을 지휘하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떠난다. 남편의 역할은 필요 없다 치자. 다 끝난 일인까. 하지만 13살 된, 지금으로 말하면 엄마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초등학교 6학년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프리츠 하버는 그런 판단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무릇 남자란, 군인이란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런 사회 속에 그는 평생 살았으니까. 그렇게 그는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




프리츠 하버는 1차 세계대전 후에도 독가스 개발에 전념한다. 잔인하긴 하지만 효과적인 무기라는 사실은 입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배상금 문제로 어려움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바닷속에 포함된 금 성분을 채취하는 연구도 몇 년 동안 진행하지만 실패한다. 적어도 그는 ‘독일 제국’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그 당시 사회 분위기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바뀐다. 나치가 권력을 잡는다. 이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프리츠 하버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특별하게 생각한 이 없고, 이미 개종도 했지만 이런 흐름에서 비껴갈 수 없었다. 재혼했던 아내와 아이들, 첫 아내인 클라라 임머바르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헤르만 하버를 외국으로 도피시키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의 가까운 친척들도 수용소로 끌려갔다 죽음을 맞았다.


프리츠 하버는 독일에서 남은 일을 마무리 짓고 헤르만 하버가 피신한 프랑스에 도착한다. 프랑스로 와서 꽤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아들 헤르만 하버는 그곳에 정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도 악명 높은 ‘프란츠 하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시민권 획득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츠 하버는 영국에 일자리를 얻어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함께 일하게 된 학자들은 그를 차갑게 대한다. 그와 악수를 거부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였다. 왜 아니겠는가. 이제 프란츠 하버는 독일과 연합국 어디에서도 환영받는 인물이 아닌, 그저 그런 사람이 되었다.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 즈음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이 이스라엘 건국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자신을 굳이 유대인으로 규정하지도 않던, 자신을 독일 제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그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로 인해 비극까지 발생한 가정을 돌보지도 않고 나라의 일(?)에 매달렸던 프리츠 하버는 1934년 팔레스타인으로 가던 도중 스위스 바젤에서 사망한다.


아들인 헤르만 하버는 결국 프랑스에서 시민권을 얻지 못한다. 그는 미국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모색하며 대서양의 섬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함께 도망치던 아내가 사망한다. 헤르만 하버의 심신도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는 1946년 어느 날 어머니가 자신을 떠났던 방법 그대로 세상과 이별한다.




프리츠 하버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과학자는 평시에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국가를 위해 일한다.”
베를린 '독일 저항 기념관' 앞 동상. 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하지만 그 국가가 ‘어떤 국가’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 국가 자체로 커다란 괴물이 된 것은 아닌지 감시하고 돌아봐야 한다.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형상이 되었다고 판단하면, 차라리 발터 벤야민처럼, 아인슈타인처럼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지구상 어느 사회의 일원이기 이전에 우리는 인간이다. 인류애나 양심은 국가의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 프리츠 하버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번 내 다짐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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