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노이에바헤, 그 밖의 추모의 장소들
전쟁이 일어나던 1914년 콜비츠는 베를린에 있었습니다. 큰아들 한스는 스물두 살이었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군대에 자리를 얻었습니다. 노르웨이로 하이킹을 떠났던 작은아들 페터도 자원입대하려고 8월 6일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입대하려면 스물한 살은 되어야 하는데, 페터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원입대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승낙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케테 콜비츠가 남편을 설득했고, 페터는 자원입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을 떠난 아들이 열흘 만에 전사했고, 콜비츠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콜비츠를 괴롭힌 것은 슬픔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콜비츠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 닐 맥그리거의 [독일사 산책] 중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콜비츠는 주로 전쟁과 그 후유증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였다. 콜비츠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지성인, 예술가와 함께 히틀러의 등장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긴급 단결 촉구’에 서명하며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을 지지하지 말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또다시 정권을 장악한 나치는 콜비츠의 작품 전시를 금지하였으며 콜비츠를 예술원에서 강제 사퇴시켰다. 하지만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공식적인 ‘퇴폐 예술’로 분류하지 않았고 익명으로 정치선전에 활용하기까지 했다.
콜비츠는 그 사실을 알고 기겁했지만, 나치에 항의하지는 않았다. 말썽에 휘말릴 위험도 있었지만 더 무서운 것은 나치가 작가의 이름을 작품에 게재해 마치 콜비츠가 나치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보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닐 맥그리거의 [독일사 산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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