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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30. 2022

과거를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라

31. 노이에바헤, 그 밖의 추모의 장소들

‘나치 박물관(Topographies des Terrors)’은 게슈타포와 히틀러 친위대인 SS(슈츠 슈타펠)의 본부가 있던 곳 옆에 자리하고 있다. 본부가 있던 자리는 텅 비워 놓았다. 너무 잔인한 일이 벌어진 지역이라, 그곳에 어떤 의미 있는 건물을 올리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이…… 대신 옆으로 외부 전시장과 박물관을 두었다.


SS의 본부가 있던 곳은 텅 비어있다. 이곳은 저주받았다는 말처럼 들린다.


비 오는 평일임에도 내부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학생 단체들이 많다. 여기저기 바닥에 주저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아이들도 있고, 자료를 보며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도 한다. 숙제인가…. 그런 거니? 물론 선생님의 눈을 피해 수다를 떠는 아이들도 있다. 체험학습이란 다 그런 거니까.


박물관 안에는 당시의 흑백 사진들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대한 양이다. 초입에는 나치가 세력을 잡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괴벨스와 괴링 등 나치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사진이 넘쳐난다.


나치에 대한 자료가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각종 선전물이 걸려 있는 자리를 지나면, 나치의 만행이 담긴 사진과 수용소의 불편한 사진, 유대인들이 남긴 편지 뒤쪽으로 전범 재판의 과정까지 나열되어 있다. 중간에는 영상을 볼 수 있는 자리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관람객 눈높이에 맞춰 빼곡히 전시물이 걸려 있어서 아이들은 숨바꼭질하듯 전시물 뒤에서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귀엽다.




이 박물관은 나와 같은 이방인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주려는 의도보다는 자국민에게, 자신들의 후손에게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그들의 노력이 경이롭다.


잘못을 되돌아보는 일은 힘들다. 개인 단위에서도 반성이란 쉽지 않다. 아이들을 야단쳐 보면 안다. ‘좀 전의 그 일은 내 잘못이었어. 정말 미안해.’라는 뻔한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국가적 단위에서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민족의 저력이란 이런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범 재판의 결과를 적어놓은 서류들.


나치는 자신들의 실패를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듯 많은 증거를 남겨 놓았겠지.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될 수 있다. 혹은 역사는 반복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끝" 수 있다. 과거의 잘못된 일을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그 잘못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어내지 못하면, 그 일은 반복된다. 이번에는 슬픈 코미디처럼. 스스로 가슴을 치며 후회하지만 없던 일로 되돌릴 수는 없는 그런 일로 눈앞에 벌어진다. 독일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길을 걷다 리허설 중인 방송국 무대의 소음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넓은 광장에 무대가 세워졌고, 마이크 테스트로 분주하다. 무슨 방송을 준비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이 바벨 광장(Bebelplatz) 임은 분명하다. 나처럼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대 주위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러나 내 눈길을 잡은 것은 다른 것이다.


무대와 한참 떨어진 곳, 돌바닥 사이에 사각형 투명 유리창이 난데없이 달려있다. 그 안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텅 빈 책장이 보인다. 이곳은 1933년 5월 10일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지시 아래 ‘책들의 화형식’, 일명 ‘분서’가 벌어졌던 곳이다.



1933년 3월 선거를 통해 제1당으로 올라선 나치는 바로 ‘전권위임법’으로 알려진 ‘국민과 국가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법안’이라는 이름의 법령을 준비한다. 조약 체결, 입법, 헌법을 수정할 권리까지를 국회의 승인 없이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교한다면, 입법권과 예산권, 외교적 조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대통령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즉 ‘독재 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재적 의원 647명 중 나치에게 찬성표를 던질 표는 340표 정도로, 법안이 통과되는 기준인 2/3에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후 막 통과시킨 ‘긴급령’과 괴링이 있었다. 경찰력을 쥔 괴링은 일단 공산당 소속 의원들을 구금한다. 가톨릭 중앙당 지도부에게는 채찍 대신 당근을 이용했다. 표를 주기만 한다면, 어쩌고저쩌고……  투표 결과 찬성 444표로 전권위임법이 통과된다. 이로써 나치,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이란 나라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얻어낸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국민들의 입을 막는 것이다. 괴링의 경찰로 막을 수는 있지만, 무릇 일이란 벌어지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면 더 효과적일 테니까. 나치는 사상의 검열에 돌입한다. ‘독일답지 않은 문서들을 불태우자’는 괴벨스의 부추김에 학생들은 베벨 광장에 마련된 거대한 장작더미 위로 책을 집어던졌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책들이 타올랐다. 프로이트, 에밀 졸라, 프루스트, 웰즈,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의 책도 함께 재로 변했다. 약 20000권의 저서가 불타오른 것으로 기록된 이 만행은 나치 독일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는 시작점이 된다  


책들의 화형식. 위키 펌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바로 화형식이 벌어졌던 자리에 기념물이 설치되었다. 1993년 나치 분서 사건 60년에 즈음하여 공모한 공모전에서 이스라엘 출신 미하 울만의 작품 [도서관]이 선정된다. 이 작품은 입체적이지 않다. 노력해서 살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의도하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투명한 사각형 앞에 서더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긋이 바라보면 텅 비어 공허한 도서관 책장을 볼 수 있다. 뭐지, 이건? 하지만 사연을 알고 보면, 이 사건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효과적인 기념물은 찾기 힘들 것이다.




땅에 깔린 추모비도 마찬가지다. 베를린 거리를 걷다 보면 돌과는 분명 다른 질감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바닥재를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자세히 봐야 안다 이것들은 군터 뎀니히(Gunter Demnig)가 나치에 의해 추방되거나 살해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추모석이다.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석.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 추방일 등을 기록하고 있는 추모석은 고인과 관련있는 장소, 예를들어 집 앞 같은 곳에 설치되었다. 이런 추모석들을 보다 보면 추상적으로 벌어졌던 ‘나치에 의한 학살’ 같은 사건이 구체적인 일로 느껴진다. 옆 집에 살던, 내 옆 동에 살던 누군가가 끌려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이 집에 살고, 저 거리를 걷고 있었으며, 나처럼 상점의 봉투를 들고 웃으며 이 거리를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된다.

베를린 숙소 앞에서 발견한 추모석. 1942년에 돌아가셨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노이에바헤’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신 위병소’라고 번역하는 이 공간의 밖은 흡사 그리스 신전처럼 장엄하고 멀끔하다. 원래 이 건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명령으로 지어져서 황제 친위대가 사용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이 브란덴부르크에서 개선행진을 했던 때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왕이던 시절이다. 전쟁이 빈번했던 시절이고, 이후 건물은 독일의 전쟁 영웅을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노이에바하 내부로 한 걸음을 옮기면 텅 빈 것 같은 어두운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노이에바하

하지만 그곳에는 뭔가가 있다. 빈 곳이 아니다. 늙은 어머니가 고개를 숙인 채 남자를 끌어안고 있는, 흡사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처럼 보이는 동상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조명도 없다. 조각상의 머리 위 뚫린 창으로 자연광이 내려올 뿐이다. 이 동상을 만든 이는 ‘하랄트 하케(Harald Haacke)’다. 그는 1945년 사망한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을 1993년에 새롭게 주조해 이곳에 옮겨 놓았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전쟁이 비극적인 부분은 ‘젊은이들의 죽음’이라는 점이다. 전쟁을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늙고, 낡은 사람들에 의해 전쟁은 시작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만 봐도 시작한 것은 푸틴이다. 전쟁터에서 죽거나 상처 입거나 다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다. 전쟁의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쟁의 비극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방법은 무엇일까? 전쟁에서 죽어가는 병사를 표현하는 것일까? 아픔과 비극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의 비극 대신에 아픔과 증오 같은 것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주검을 끌어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어떨까. 전쟁으로 이미 심신이 망가진 여인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말할 수없이 비극적인 상황 앞에 던져졌다. 누가 이 여인을 위로할 수 있을까. 누가 아무 말이라도 여인에게 던져볼 수 있을까.




판화가이자 조각가였던 케테 콜비츠는 1867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이라는 국가가 잉태된 도시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고,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인 사업가 아버지를 둔 콜비츠는 어려서부터 ‘사회 정의’나 ‘분배’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남편은 의사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봤고,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노동자 지구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남편이 들려주는 ‘가난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에 콜비츠는 영감을 얻는다.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파트에는 대형 캔버스를 놓고 작업을 할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녀는 판화 작업에 집중하게 된다.


케테 콜비츠[직조공의 반란] 연작 중.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슬픔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1893년 2월 게르하르트 하울트만(Gerhart Hauptmann)이라는 작가의 희곡 [직조공]이 초연되었다. 이 연극은 독일에서 실제 일어났던 노동자 반란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콜비츠는 1893년부터 1897년까지 4년에 걸쳐 ‘직공들의 반란’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이름을 얻는다.


그녀의 작품에 매력을 느낀 기획자들의 주선으로 1898년 베를린에서 열린 정부 주최의 전시회에 참가한다. 전시를 마련한 기획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금메달 후보로 추천했으나 황제 자문위원회가 탈락시켰다고 한다. 너무 정치적이고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다. 이 말은 곧 그녀의 작품이 너무 현실적이었다는 말이다. 너무 솔직해서 위정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말이다.


전쟁이 일어나던 1914년 콜비츠는 베를린에 있었습니다. 큰아들 한스는 스물두 살이었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군대에 자리를 얻었습니다. 노르웨이로 하이킹을 떠났던 작은아들 페터도 자원입대하려고 8월 6일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입대하려면 스물한 살은 되어야 하는데, 페터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원입대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승낙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케테 콜비츠가 남편을 설득했고, 페터는 자원입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을 떠난 아들이 열흘 만에 전사했고, 콜비츠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콜비츠를 괴롭힌 것은 슬픔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콜비츠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 닐 맥그리거의 [독일사 산책] 중


그녀는 아들의 주검을 끌어안는다. 문제는 그 전쟁터로 아들을 보낸 것이 그녀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 암담함과 미안함, 고통과 수치심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과연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 지조차 의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한가운데 있었지만, 그런 상황을 이겨내고 ‘평화운동가’로서 거듭난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콜비츠는 주로 전쟁과 그 후유증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였다. 콜비츠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지성인, 예술가와 함께 히틀러의 등장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긴급 단결 촉구’에 서명하며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을 지지하지 말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또다시 정권을 장악한 나치는 콜비츠의 작품 전시를 금지하였으며 콜비츠를 예술원에서 강제 사퇴시켰다. 하지만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공식적인 ‘퇴폐 예술’로 분류하지 않았고 익명으로 정치선전에 활용하기까지 했다.

콜비츠는 그 사실을 알고 기겁했지만, 나치에 항의하지는 않았다. 말썽에 휘말릴 위험도 있었지만 더 무서운 것은 나치가 작가의 이름을 작품에 게재해 마치 콜비츠가 나치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보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닐 맥그리거의 [독일사 산책] 중


나치가 정권을 잡은 독일에서 콜비츠는 그야말로 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나치는 그녀의 전시회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1937년에서 1938년 사이 콜비츠는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노이에바하에 설치된 바로 그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이 그토록 싫어한 나치의 선전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자식을 두 번 떠나보내는 슬픔 같은 것을 느꼈을까?


하지만 그녀의 일생에서 불운은 남아 있었다. 1942년 동부전선에서 손자가 전사한다. 그녀는 두 번의 전쟁에 아들과 손자를 내어준다. 케테 콜비츠는 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 4월 숨을 거두었다. 그녀에게 안식이 함께 하기를…….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은 크지 않다. 사전 지식 없이 봐도 커다란 슬픔을 느껴진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듯 웅크린 어머니와 이미 정신을 잃은 듯한 아들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 같다. 노이에바하를 찾는 관광객은 많았는데,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을 뿐. 이곳은 그런 곳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되는 그런 장소였다.




‘저거 봐.’


밖으로 나오자,  일행이 길을 향해 손짓을 한다. 작고 어쩐지 허름해 보이는 자동차가 도로를 질주한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준다.

트라비가 달린다 붕붕붕~


동독의 국민차 ‘트라비(Trabant)’다. 서독에 국민차 폭스바겐 비틀이 있다면, 동독에는 트라비가 있었다. 1957년부터 동독에서 자체 개발되어 생산됐다는 트라비는 주문한 지 십 년이 지나야 건네받을 수 있다고 해서 더 유명했다. 동독의 자동차 제조업 사정이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파리 광장 골목에서 ‘트라비 투어’ 광고를 봤는데, 아마 저 달리는 차가 그 녀석인 모양이다. 갑자기 베를린이 쿠바의 아바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저 차가 굴러 간단 말이지? 아직 멀쩡하단 말이지? 에어컨은 없을 거야, 그치?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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