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추모비를 찾다
나치 사상은 요컨대 ‘반유대 인종론’을 바탕으로 국내적으로는 모든 사회집단이 ‘공익’을 위해 ‘민족공동체’에 일체화되어 1인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는 체제(총통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독일인은 신분의 차이가 평준화되어 ‘국민 동포’가 된다. 또 대외적으로 독일 국민은 우수한 ‘아리아인’으로서 열등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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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4년 이내에 국가 재건과 경제재생을 이루겠다고 약속하고, 헌법 규정을 정지 상태로 만들어서 의회의 입법권을 정부에 맡긴 전권위임법을 성립시킨 것은 나라 전체의 나치화를 겨냥한 것이었다. 때문에 유대인 문제가 정책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심신장애인과 동성애자, 만성 알코올 중독자도 ‘공동체의 이질적 분자’로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 쓰시마 다쓰오,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 중에서
모든 점령지역에서 유대인 자산을 압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약탈한 식량과 물자를 독일 본국으로 실어 날랐는데, 이들 점령 지역의 분담금 비율이 최종적으로는 국가 전체 기준으로 26.4퍼센트에 달했다. 빼앗은 물품을 앞뒤로 짊어진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귀국하는 독일 병사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자료들이 많은데, 그들은 단지 약탈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쓰시마 다쓰오,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 중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내 유대인 친구 로자 레만 오펜하이머가 사라졌어요. 부모가 하던 비누 가게도 문을 닫았고요. 가족이 모조리 없어졌어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래요, 우리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다들 우리가 모든 걸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에요.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요. ….. 에바가 우리 눈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한참이 더 지나서였어요.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에바는 강제 이주자 명단에 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에바 입장에서도 전쟁 중에 여기 있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용소에 있으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 토레 D. 한젠 [어느 독일인의 삶] 중
가끔 난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해요. 옛날에 내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걸 스스로 그렇게 책망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관심이 없었던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젊은 혈기에 한쪽으로 쉽게 휩쓸려 갔다가는 금방 인생이 파탄 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 토레 D. 한젠 [어느 독일인의 삶] 중
1967년, 마침내 이 문제가 고등 법원으로 넘어갔을 때….., 집시를 ‘고정적인 직업이 없고, 정해진 주거가 없이 이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판결했다. ….. 이 개념은 ‘집시 야영지’ 제공을 규제하는 1968년의 ‘카라반 사이트 법’이 통과되면서 재확인되었다. 이 법의 정의에 따르면, 집시는 여행 중인 흥행사나 서커스 순회공연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족이나 기원과 무관하게 이동생활 습관을 가진 자’였다.
– 앵거스 프레이저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오늘날 전해지는 동시대의 문헌 자료들은 집시를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인종으로 간주하면서, 서슴지 않고 집시의 절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6세는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1749년 7월 말, 군의 협조 아래 일제 단속을 실시했다. 당시의 집계에 따르면 9000명에서 12000명 정도의 집시가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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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일제 단속으로 잡힌 집시 남성들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병기고로 보내졌다. 피로와 질병을 견뎌내며 거기서 16년이나 시달린 집시들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짧은 경우도 있었다.
– 앵거스 프레이저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아우슈비츠는 많은 수용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지만,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온 최대의 집시 수용소였다….. 이곳은 의학이라는 미명 아래 수용자들에 대한 인체 실험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독일 집시가 도착하자마자, 신임 수용소 의사 조제프 멘겔레 박사는 책임자로서 쉴 새 없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집시 수용소는 17개월간 존재했다. 거기에 갇히게 된 2만 3000명의 집시 가운데 2만 78명이 죽고, 나머지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사인은 기아, 과로, 인체실험, 질병, 가스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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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점령지에서는 집시가 인질로서 조직적으로 이용되었다. 다시 말해 매일같이 총살대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파르티잔에 의해 살해된 독일인 한 명당 100명, 부상자 한 명당 50명이 살해당했다). 1942년 8월, 세르비아는 유대인과 집시 ‘문제’가 ‘해결된’ 최초의 국가로 보고되었다.
– 앵거스 프레이저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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