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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28. 2022

역사에 반성하는 자세

30. 추모비를 찾다

무거운 마음으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을 찾았다. 뉴욕 출신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이 설계하여 2005년 완성한 이 기념 조형물은 높이가 다른 2711개의 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물이 늘어선 입구의 조형물은 높이가 낮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지고 어느 순간 시야를 가린다. 미로에 빠진 것처럼 당황하게 된다. 내리는 비까지 함께 하니 답답함이 배가 된다. 나치 치하를 살아야 했던 독일 유대인들의 마음이 이랬는지 모르겠다.


나치 사상은 요컨대 ‘반유대 인종론’을 바탕으로 국내적으로는 모든 사회집단이 ‘공익’을 위해 ‘민족공동체’에 일체화되어 1인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는 체제(총통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독일인은 신분의 차이가 평준화되어 ‘국민 동포’가 된다. 또 대외적으로 독일 국민은 우수한 ‘아리아인’으로서 열등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존재이다.
 ……  
히틀러가 4년 이내에 국가 재건과 경제재생을 이루겠다고 약속하고, 헌법 규정을 정지 상태로 만들어서 의회의 입법권을 정부에 맡긴 전권위임법을 성립시킨 것은 나라 전체의 나치화를 겨냥한 것이었다. 때문에 유대인 문제가 정책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심신장애인과 동성애자, 만성 알코올 중독자도 ‘공동체의 이질적 분자’로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 쓰시마 다쓰오,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 중에서
학살당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에서는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나치는 ‘혐오와 배제’라는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국가 제정에 투입하거나 혹은 전리품으로 나눠가졌다.


모든 점령지역에서 유대인 자산을 압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약탈한 식량과 물자를 독일 본국으로 실어 날랐는데, 이들 점령 지역의 분담금 비율이 최종적으로는 국가 전체 기준으로 26.4퍼센트에 달했다. 빼앗은 물품을 앞뒤로 짊어진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귀국하는 독일 병사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자료들이 많은데, 그들은 단지 약탈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쓰시마 다쓰오,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 중에서


1941년 그리스가 겪었던 기아의 원인도 나치의 약탈 때문이었다. 비극은 나치가 점령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나치의 칼 끝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는다고 느낀 많은 독일인들은 그 상황에 안도하거나 그보다 심한 경우 동조했다.





2013년 이루어진 브룬힐데 폼젤의 인터뷰에서 당시 독일인들이 느꼈던 생각과 의식적인 무관심에 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브룬힐데 폼젤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의 선동 책임자 ‘요제프 괴벨스’의 비서 겸 속기사로 일한 사람이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하는 순간까지도 나치를 위해 선전문의 타자를 쳤고, 히틀러의 공식 항복을 알리는 깃발을 만들었다.


그녀는 나치의 만행을 종전 뒤에야 알았다고 주장한다. 많은 유대인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잃고 죽음의 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강변한다. 괴벨스의 선전부 소속이고, 그들의 말을 타이핑했으니 그들의 정책을 몰랐을 리 없다. 그래도 그녀는 ‘몰랐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유대인 친구 로자 레만 오펜하이머가 사라졌어요. 부모가 하던 비누 가게도 문을 닫았고요. 가족이 모조리 없어졌어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래요, 우리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다들 우리가 모든 걸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에요.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요. ….. 에바가 우리 눈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한참이 더 지나서였어요.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에바는 강제 이주자 명단에 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에바 입장에서도 전쟁 중에 여기 있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용소에 있으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 토레 D. 한젠 [어느 독일인의 삶] 중


그녀에게는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 당연하다. 당시 독일에서는 프리츠 하버와 같은 유대인이 많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독일인들과 함께 독일이라는 국가 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이 많았다는 말이다.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날씨까지 어두워서, 이거야 원.......

그런 유대인 친구가 사라졌지만, 브룬힐데 폼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심지어 ‘안도한다’. 전쟁 중에는 수용소에 있으면 오히려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말할 수 없이 이기적이다.


가끔 난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해요. 옛날에 내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걸 스스로 그렇게 책망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관심이 없었던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젊은 혈기에 한쪽으로 쉽게 휩쓸려 갔다가는 금방 인생이 파탄 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 토레 D. 한젠 [어느 독일인의 삶] 중


물론 ‘모든 독일인’이 그녀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많은 독일인’이 그녀처럼 생각했다. 타인의 삶보다는 ‘자신의 인생이 파탄날’까 두려워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치 정권에 동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내 눈앞의 기념물이 결과로써 남았다. 이 기념비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유대인들을 위한 위령의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다시는 그런 역사를 쓰지 않겠다는 단호한 반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도 우익 성향의 집단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고, 이런 종류의 기념비에 대한 테러도 계속되고 있다 하니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볼 일이다.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의 형태가 크고, 느낌이 강렬한 탓에 근처에 있는 [동성애 희생자추모비(Denkmal für die im Nationalsozialismus verfolgten Homosexuellen)]나 [집시 추모비(Memoriale dei Sinti e dei Roma)]는 스쳐 지나가기 쉽다.


[동성애 희생자추모비(Denkmal für die im Nationalsozialismus verfolgten Homosexuellen)]는 2008년 덴마크의 미카엘 엘름그린과 노르웨이 출신의 잉가 드라그세트에 의해 설계되었다. 높이 3.6미터, 폭 1.9미터의 콘크리트 블록 안으로 상영되는 비디오 작품을 볼 수 있다. 나 같은 외국인이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독일인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집시 추모비(Memoriale dei Sinti e dei Roma)]는 가장 최근인 2012년에 만들어진 기념비다. 이스라엘 조각가 다니 카라반(Dani Karavan)이 설계한 이 기념비는 검은색 배경에 직경 12미터의 원형 물 웅덩이, 그 속에 삼각형의 석비가 떠 있는 형상이다.


집시 추모비


나치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 독일과 기타 유럽 국가에서 최대 500만 명가량의 집시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치가 살해한 유대인이 600만 명가량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살해된 집시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죽음이 끊임없이 추모되고 기억되고 반성되는 지금까지 집시의 박해에 대한 사과는 의미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2년에서야 겨우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유럽의 어느 곳에 가도 ‘집시’들을 조심하라(소매치기나 날치기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일종의 혐오다. ‘집시’는 아직도 혐오해도 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세상에 ‘그래도 되는 대상’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유대인'은 유대교를 믿는, 혹은 유대교를 믿던 조상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나름대로 정의할 수 있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집시는 어떤 사람들을 말할까?




영국의 집시 연구자 '앵거스 프레이저(Angus Fraser)는 현대의 '인종에 근거한 차별에 대한 민감한 반응' 때문에 집시를 정의하는 간단해 보이는 작업마저 쉽지 않은 경로를 거쳐왔다고 말한다.

1967년, 마침내 이 문제가 고등 법원으로 넘어갔을 때….., 집시를 ‘고정적인 직업이 없고, 정해진 주거가 없이 이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판결했다. ….. 이 개념은 ‘집시 야영지’ 제공을 규제하는 1968년의 ‘카라반 사이트 법’이 통과되면서 재확인되었다. 이 법의 정의에 따르면, 집시는 여행 중인 흥행사나 서커스 순회공연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족이나 기원과 무관하게 이동생활 습관을 가진 자’였다.

 – 앵거스 프레이저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판사들은 사석에서는 인종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더라도 공식적인 문서에서 의회가 인종상의 이유만으로 특정한 사람을 처벌하거나 지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동 습관을 가진 자’라면 유목민도 포함된다. 심지어 현대의 노마드(Nomad)족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홍길동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인종주의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지만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위키피아에 따르면 “집시(Gypsy)는 서아시아, 유럽, 특히 동유럽에 주로 거주하는 인도 아리아계의 유랑민족을 일컫는 영어 표현”이다. 즉 유럽에 있는 ‘인도 풍’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즉 유럽인들은 '인종적으로 인도 계통의 방랑하는 사람들을 집시라고 규정하며 지금도 차별하고 있지만, 그런 관점이 떳떳하거나 자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정도로 정의하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어쩌다 인도 계통의 사람들이 유럽에 머물게 되었을까.



‘집시’에 관한 이야기가 발견되는 최초의 문헌은 페르시아에서 나온다. 술을 마실 때는 음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페르시아의 왕(이분의 이름은 '바람 구르'라고 한다. 백성들이 술 마실 때 적적할 것을 걱정할 정도였으면 좋은 왕이었다는 말일까?)이 인도에 요청해 만 이천 명의 악사를 받아와 전국에 배치했다고 한다. 페르시아 왕은 이 악사들에게 밀과 소, 나귀를 주어 농사꾼으로 살게 하면서 그 지방에서 음악을 하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열심히 일을 하다 판이 벌어지면 다른 이들을 즐겁게 만들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다. 베짱이에게 개미처럼 일하라고 하면 우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1년이 지나지 않아 악사들은 왕이 내린 것들을 모조리 써 버렸다. 열받은 왕은 그들에게 나귀를 맨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한다.


이들이 확실히 집시의 기원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때 건너온 악사들과 그 후손들을 ‘조트(Zott)’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지금도 페르시아에서 집시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고 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도시국가가 몇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나라는 가깝다. 페르시아로 들어온 집시들이 그리스나 그 위 발칸 반도로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동유럽을 거쳐 서유럽까지 가는 것도 그리 큰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집시들은 소규모로 집단을 지어 떠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점을 봐주고, 서커스를 하는 등의 일로 밥벌이를 이어간다. 집단내의 결속은 대단해서, 국가의 사법권도 미치지 못했고, 결혼은 집단 내에서만 혹은 비슷하게 떠돌고 있는 다른 집단과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소규모 집단이란 공격하기 쉬운 상대여서, 이들이 수도원이나 봉건 영주의 노예가 되는 일도 벌어진다. 말하자면 이들은 권력자들의 필요나 의지에 의해 빈번하게 이용당했다. 이런 일을 겪는 동안 자신들의 결속은 점점 더 강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에스메랄다'는 집시다.


물론 이들이 이용만 당한 것은 아니다. 약삭빠르게 시대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들은 황제나 교황의 칙서나 보호 영장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동을 계속한다. 그들은 마을 인근에 주거지를 만든 후 필요한 물건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좀도둑질을 하기도 하는 등 골치 아픈 많은 일을 일으킨다. 집시들이 자신의 집단에만 충성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탄압을 받다 보니 자신들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유럽인들은 집시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지역도 있다. 하지만 이동하려는 그들의 본능에 따라 살고 있는 집시도 많았다. 이후 유럽 사회는 ‘이동하는 집시’에 대한 탄압을 공공연하게 벌인다.


오늘날 전해지는 동시대의 문헌 자료들은 집시를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인종으로 간주하면서, 서슴지 않고 집시의 절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6세는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1749년 7월 말, 군의 협조 아래 일제 단속을 실시했다. 당시의 집계에 따르면 9000명에서 12000명 정도의 집시가 연행되었다
........
1749년 일제 단속으로 잡힌 집시 남성들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병기고로 보내졌다. 피로와 질병을 견뎌내며 거기서 16년이나 시달린 집시들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짧은 경우도 있었다.

– 앵거스 프레이저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이런 유구한 역사가 있었으니, 나치가 그 밥상에 숟가락 하나쯤 얹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규모다. 1937년 로베르토 리터 박사는 베를린에 신설된 [인종 우생학, 인물 생물학 연구소]의 지휘관이 된다. 이들은 3세대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류법을 만들었는데, 증조부모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2명의 집시 조상이 있다면 ‘집시’로 분류해 구금할 수 있었다. 나를 예로 들자면, 내 증조부모나 외 증조부모 중 집시와 연결된 사람이 둘 만 나온다면, 나는 수용소로 가야 하는 것이다. 증조부라면, 조선 시대 말기에 사셨던 분들이다. 그런 잣대를 들이대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아우슈비츠는 많은 수용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지만,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온 최대의 집시 수용소였다….. 이곳은 의학이라는 미명 아래 수용자들에 대한 인체 실험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독일 집시가 도착하자마자, 신임 수용소 의사 조제프 멘겔레 박사는 책임자로서 쉴 새 없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집시 수용소는 17개월간 존재했다. 거기에 갇히게 된 2만 3000명의 집시 가운데 2만 78명이 죽고, 나머지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사인은 기아, 과로, 인체실험, 질병, 가스 등이었다
………
세르비아의 점령지에서는 집시가 인질로서 조직적으로 이용되었다. 다시 말해 매일같이 총살대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파르티잔에 의해 살해된 독일인 한 명당 100명, 부상자 한 명당 50명이 살해당했다). 1942년 8월, 세르비아는 유대인과 집시 ‘문제’가 ‘해결된’ 최초의 국가로 보고되었다.

– 앵거스 프레이저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그렇다면 이렇게 조직적인 살해와 절멸 정책이 이루어졌음에도 제대로 된 사과나 배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유대인들과 비교해보자면 답은 간단하다. 집시는 응축된 힘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집시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독일에서는 1950년대부터 집시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65년에는 국제 집시 위원회(Comite International Tsigane)도 생겼다. 1971년 국제 집시 위원회가 주최한 세계 로마니 회의에서는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롬’을 지정하고, 민족기도 채택했다. 1990년 4월 헝가리에서는 집시 자유민주당이 헝가리 자유 민주당과 함께 두 명의 집시 국회의원을 탄생시키도 했다. 루마니아에서는 7개 이상의 집시 정당이 등록되었다.


롬의 깃발.


하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 정책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차별이 부당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실제 삶에서 집시들이 끼치는 해악이 광범위해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난감하다.

집시에 대한 탄압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교육’의 문제로, ‘정치력’의 범위로 이야기는 진행되어야 한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책임’의 문제로 이야기를 이끌어야지 혈통이나 가계도의 문제에 집착한다면 또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집시 추모관을 나왔다. 오늘 일정은 대체로 무겁고 암울한 역사적 장소로 채워져 있다. 여행하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그런데 어디 가서 단 거라도 하나 사 먹고 가자. 머리가 아파 더는 못 보겠다. 이런 날은 맥주지.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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