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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Oct 03. 2022

포츠담 상수시 궁전

32. 프리드리히 대왕이시여, 행복하셨습니까?

‘9유로’ 티켓으로 포츠담까지도 갈 수 있었다. 어쩐지 횡재한 기분이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포츠담 역에 도착했다.


포츠담 역 앞에는 거대한 버스 환승장이 있었다. 환승장에는 관광객 뿐 아니라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포츠담에는 대학이 세 개나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 중 하나를 방문했다. 가려고 간 것은 아니고 궁전 옆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상수시 (Sanssouci) 궁전과 수비대교회(Garnisonkirche)만 방문한 뒤 베를린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다른 관광객들은 또 다른 여행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상수시 궁전으로 가는 버스가 가장 붐비기는 했지만, 우리가 떠난 뒤에도 역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핸드폰 화면을 집중하며 서 있었으니까.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상수시 궁전으로 이동했다. 버스가 이동하는 길 옆으로 넓은 녹지와 한가한 분위기의 집들이 보였다. 전형적인 ‘괜찮은 시골 ’ 분위기다. 부유하고 넉넉해 보이는 마을이다.



1685년 프랑스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한다. 프랑스 개신교(위그노)들의 종교적 자유를 박탈한다는 내용이다. 이제 프랑스에서 믿을 수 있는 종교는 가톨릭뿐이다. 종교 혹은 믿음이라는 것을 주었다가 뺐었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자체가 놀랍다. 그러니까 적어도 당시 왕들은 종교가 정치적 의미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면죄부 팔던 때부터 그건 다들 알고 있었겠지.




대부분 파리의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던 신교도들은 강제 개종을 하거나 파리를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프랑스의 일에 관심이 많았던 브란덴부르크 제후는 재빨리 ‘포츠담 칙령’을 발표한다. 포츠담에 ‘종교의 자유를 허가’ 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교도를 보호한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들을 위한 집단 거주지도 만든다. 친한 사람들끼리 옮겨와서 살던 방식대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이다.


상수시 궁에서 내려다 본 정원 풍경. 아름답고, 햇빛이 따갑다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이 대거 포츠담으로 이주한다. 이때 망명한 숫자를 작게는 20만에서 많게는 100만까지로 추정한다. 사람이 오면서 그들의 기술도 브란덴부르크 제후국으로 흘러간다. 모직물 공장, 제지 공장, 금융업 기술들이 전부 프랑스를 빠져나와 독일로 스며든다. 30년 전쟁(1618-1648)으로 인구가 줄었던 브란덴부르크 제후국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효과를 누린다. 잘못된 정치적 결정은 그 이후 백 년을 좌우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5년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을 착공하여 1747년에 완성한다. 대왕의 아이디어를 참고하여 건축가 게오르그 폰 크노벨스도르프(Georg Wenzeslaus von Knobelsdorff)가 설계했다고 한다. 10개의 방이 있는 궁전과 분수를 포함한 거대한 정원, 와인을 만들기 위해 꾸민 포도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보다는 간소해서, 내부를 돌아보는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상수시(Sanssouci)라는 말은 ‘걱정 없는’이라는 뜻이라고 상수시 궁전 홈페이지에 나와있다. 독일어를 천박하다고 경멸하고 프랑스어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이니, 아마 불어인 ‘Sans-souci’라는 말에서 따왔을 것이다. 프랑스의 문화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독일 최고의 군주가 되었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래에서 바라본 상수시 궁전. 비스듬한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훗날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프리드리히 2세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어른이 된 후 갑작스럽게 사망한 형을 대신해 준비없이 왕위에 올랐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왕위 계승자로서 받았어야 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왕이 된 후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아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막 10대에 접어든 아들을 위해 여러가지 수업을 만든다. 문제는 이 아들의 성격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거다.


아들의 과외 교사들이 “빌헬름의 선생을 하느니 차라리 갤리선을 젓는 노예가 되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니 꽤 심각했나 보다. 아버지를 대할 때는 공손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버릇없고 독선적이고 어느 정도는 삐뚤어진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대가 거의 대부분의 부모가 자기 자식을 볼 때 생각하는 것과 같이, 왕도 아들이 게으르고 단정하지 못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다.

상수시 궁 안에 걸려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


아버지는 아들의 시간표를 더 빼곡하게 고친다. 게으름 피우는 꼴을 보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아들은 수업, 열병식, 시찰여행 등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계획표대로 움직였다. 사는 게 뭔가 싶었을 것이다.




1728년 16세가 된 아들은 대외적으로는 차갑고 완고하며 ‘왕’과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플루트를 연주하고 시를 짓는 이중적인 생활을 한다. 자신의 사적 공간을 꾸미고, 비싼 프랑스 책들을 사모은다. 빚은 쌓여간다. 어떻게든 상황을 견디려는 나름의 발버둥이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해 안 되는 일이다. 결국 아버지가 이 상황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을 때리고 모욕을 주었다. 어느 날은 '너처럼 사느니 자살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 10대 남자아이가 견디기에 만만한 집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들이 13살이 지나자 부모는 자녀들의 결혼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한다. 아들과 그의 누이인 빌헬미네를 영국의 공주 아말리아와 웨일스의 왕세자와 각각 혼인시키려고 결심한 것이다. 이 정도 되는 집안의 결혼이니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끼어들 틈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리 언질 정도는 주었을 것이다. 아마 초상화 정도는 서로 오가지 않았을까.


상수시 궁전의 내부. 금, 번쩍, 금, 번쩍


그런데 오스트리아와 관련된 파벌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선다. 프로이센과 영국이 가까워지면서 독일 땅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을 ‘국제 정치’가 가만 놔두지 않은 것이다. 이 정도 집안이면 결혼할 때 ‘국제 정치’ 정도는 고려를 했어야만 했는데, 너무 자신의 가문만 생각한 것이다. 내가 세 번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무려 '왕가'의 결혼사이지만, 뭐 아무튼 그랬다고 한다.




이 반대 드라이브는 꽤 세게 결렸던지, 아버지는 2년 동안 말만 무성했던 영국 왕실과의 혼담을 없던 일로 해 버린다.


아들 제대로 삐뚤어진다.


결혼도 결혼이지만, 아버지를 향한 일상적인 분노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게 애를 왜 때리냐고. 아들은 18살인 1730년 봄과 초여름에 걸쳐 가출을 준비한다. 있는 집이나 없는 집이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반항의 방식은 거기서 거기다. 수 틀리면 가출이다.


아들의 조력자는 26세의 장교로서 한스 헤르만 폰 카테라는 남자였다. 그는 영리하고 교양 있는 군인으로 그림과 음악을 좋아했고, 어느 자료에는 왕자와 ‘애인처럼’ 지냈다고 적혀있다. 그야말로 짱친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궁전을 빠져나갈 준비를 한다. 군대와 궁전밖에 모르는 26살 청년과 18살 아이가 치밀해 봐야 얼마나 치밀했겠나. 두 사람은 채 군대 야영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잡혀서 왕 앞으로 끌려온다. 이 정도에서 달래고 다독이는 것이 보통 가정의 수준인데, 이 집안은 아무래도 특별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 떨어진 요새에 가둬버린다. 지하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수의를 입히고 ‘아직도 본인이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보는가?’, ‘목숨을 살려주기를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같은 심문을 당하도록 했다. 이런 식의 질문이 180개가 넘었다고 한다.


상수시 궁전 기념품 숍에서 득템한 프로이센 병정


아들이 이 길고 장황한 심문에 대답을 하는 사이, 아버지는 아들의 도주를 함께 한 한스 헤르만 폰 카테를 잡아들인다. 군사법정은 카테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지만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왕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니, 아들이 가출하다 잡혔다, 그 아들 친구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하나, 뭐 이런 문제 아닌가. 왕의 눈치를 보던 법정은 ‘종신형’을 내린다. 대충 왕의 기분을 봐서 더하거나 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왕은 고개를 젓는다. ‘사형’을 요구한 것이다.


왕은 카테가 ‘왕위 계승자에게 반역 행위를 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불경죄’라고 주장한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려야 하지만, 그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해서 참수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 말이 없다. 왕의 뜻대로 참수형이 결정되었다.


카테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살려만 준다면 남은 평생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담은 편지를 왕에게 보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들은 왕위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말하며, 카테 대신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아버지에게 호소했다. 왕은 이 편지에는 특이한 형태로 응답했다.




1730년 11월 6일 아침 7시, 아들의 감방 창문에서 보이는 자리에서 카테의 참수형이 집행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감방 창문을 통해 사형 집행을 지켜보도록 명령했다. 왕의 지엄한 분부에 의해 경비병들은 왕자의 얼굴을 창살에 댄 채 모든 장명을 빠짐없이 바라보도록 고정시키고 있어야 했다. 카데의 시신은 잘려나간 머리와 함께 오후 2시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 방치되었다.




굳이 오은영 선생님께 묻지 않더라도 이 사건이 아들의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다.




사형을 집행한 뒤 아버지의 곧 기분은 풀렸다. 아들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겠다고 마음먹고 그에게 내렸던 제한들을 차츰 풀었다. 아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명령하는 대로 차분히 수행했고, 아무 불만 없이 상황을 견뎠으며, 성실하게 맡겨진 임무를 해냈다. 아버지가 제안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후의 사촌인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 공주와의 결혼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이제 아들에게 오스트리아라는 나라는 영국과의 혼담이 실패하도록 훼방을 놓은 장본인들일뿐만 아니라, 그 이후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일의 배후 조정자일 뿐이었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정상이 되었을까?


결국 아들은 1733년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상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후의 사촌인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네 공주였다. 이 불행한 여인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고 결혼했음이 분명하다. 아들은 한 번도 결혼한 여자를 아내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위키 펌


1740년 왕에 오른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내인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네 공주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왕비의 권한을 유지하고 국왕의 배우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빠듯한 예산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궁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심지어 이혼조차 해주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랑했고, 죽어서도 묻히기 원했던 아름다운 상수시 궁전에 엘리자베스 왕비의 방은 없다. 그녀는 왕궁의 기피 인물이었다. 어지간한 귀족 여성들이 여름이면 왕의 초대를 받아 상수시 궁에서 파티를 즐긴 반면 왕비는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상수시 궁전 홀을 장식했던 그림은 프리드리히 2세의 애첩으로 알려진 무희 ‘바르베리나’의 초상화였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고, 다른 여인을 통해서도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식을 두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한 1740년, 왕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인 슐레지엔으로 쳐들어간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 원한이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대왕은 문화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로 완전히 돌아섰다. 프랑스어로 된 책만 읽었고, 프랑스의 사상가들과 교류했으며, 시간이 날 때면 플르투를 연주했다. 독일의 거장인 괴테마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다. 독일어로 글을 쓰는 사람은 작가로 쳐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슬픈 일이다.




예약해 두었던 상수시 궁전의 입장권을 받고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말이 끄는 마차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 인심 좋게 생긴 아저씨가 수레를 점검하고 있다. 아래 짐칸에는 맥주를 가득 넣은 냉장고도 있는 신식 마차다.


상수시궁에서 신궁으로 가시는 분들은 마차를 타세요. 두 번 타세요. 걸어가면 저처럼 됩니다. 힘 들어요.


화려한 궁전의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안보다 훨씬 화려한 정원의 모습이 보인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이 된 1740년대 후반부터 많은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전쟁이 잦아든 이후로도 베를린 궁정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왕비 때문이었다. 1763년 이후에는 거의 수도를 벗어나 포츠담에 머문다. 겨울이면 포츠담 시내의 궁전에서, 여름이면 상수시 궁전에서 조용히 생활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통일 독일로 가는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군주로 평가된다. 물론 프로이센 이외의 나라, 예를 들어 작센이나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보자면 위협적이고 짜증스러운 왕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이 할 일이지만, 이전이나 이후의 왕과 비교해서 프로이센의 국력의 크기가 확장되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한다.


법을 새롭게 고치고 오페라 극장과 도서관을 건설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선구적이었다. 계몽군주였고, 종교에도 관용적이었으며, 이웃 국가들을 위협한 거인의 풍모를 보인 왕이지만 내 눈에는 청소년기의 학대로 상처 입고, 이후로도 채워지지 않은 사랑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 작은 아이가 떠오른다. 일생동안 행복했으려나 모르겠다. 연예인과 왕 걱정 같은 건 하는 것 아니지만, 그래도 왕이 행복하셨길 바란다.




왕은 상수시 궁전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카는 왕을 맨 땅에 묻는 것이 불경스럽다고 느꼈다. 왕은 복음교회(Garnisonkirche)에 묻힌다. 히틀러는 프로이센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1933년 3월 21일, 왕이 묻혀 있는 이 복음교회에서 히틀러는 제3 제국의 첫 번째 국회 개회를 선언한다. 왕은 편히 쉴 수 있었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왕의 유해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히틀러는 석관을 옮길 것을 지시한다. 종전 직전 미군이 유해를 이장하려 했지만, 당시 포츠담이 소련 측 경계에 속해 있어 왕의 유언은 여전히 지켜지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이장된다. 통일 후 1991년, 사망한 지 205년 만에 왕의 유해가 상수시 궁전으로 드디어 옮겨진다. 왕의 무덤에는 ‘감자’를 널리 퍼뜨린 공적을 기념(25. 베를린 시장 구경 편 참고해주세요)해 아직도 감자를 올려놓는 사람이 많다는데, 나는 왕의 묘비를 찾는 데 실패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덤에 감자가 놓여있다는데, 저는 찾는데 실패! 이 사진은 위키에서 펌.


분수 앞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해가 뜨겁다. 정원 한쪽으로 시원한 넓은 숲길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신궁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오, 우리는 겁 없이 그 길로 발을 디뎠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온실, 전망대, 교회, 중국 정원으로 이어진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정세,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던 포츠담 선언이 이루어진 세실리에 하우스(Cecilienhof Country House)도 이어진다. 다만 대부분 입장 불가이거나, 수리 중이다. 길은 이어지고, 날은 덥다. 이제야 입구에 서 있던 마차의 용도를 깨닫게 된다. 그걸 타고 신궁까지 갔어야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69년애 신궁(Neues Palais)도 지었다. 외교 사절들을 맞이하여 국가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상수시 궁전에 비해 거대한 사이즈의 왕궁을 지은 것이다. 우리는 뒤에서 신궁 입구로 들어갔기 때문에 몰랐는데, 정문에서 오자면 포츠담 대학 문을 들어와야 신궁 문이 나온다. 포츠담 대학이 신궁 대부분의 건물을 이용하고, 일부는 개방되어 있다. 관람객의 정원을 계속 체크하기 때문에 신궁 입장을 예약했어도 입구에서 또 대기해야 했다.


신궁입니다. 상수시 궁전에 비하면 소박한 정원이지요.


상수시에 비해 궁전의 사이즈는 매우 크지만, 정원의 규모는 작고 소박하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신궁을 지었지만 자신은 계속 상수시에 머물렀다. 신궁을 거처로 사용한 사람은 마지막 왕이었던 빌헬름 2세다.


두 개의 궁을 보고 그 사이 산책로까지 걸었지만, 아직 우리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레스토랑은 궁에서 2킬로 밖에 있다. 포츠담 대학 구내식당을 찾았어야 했을까? 우리는 중얼거리며 지도 앱에 의지한 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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