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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Oct 07. 2022

감춰진 힘의 근원

34. 독일 레지스탕스 기념관

독일 레지스탕스 기념관은 국립 회화관과 신국립미술관 등이 늘어선 단지에 조금은 생뚱맞게 자리하고 있다. 국토가 분단된 뒤 서독베를린에 '박물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국립박물관이 모여 있는 '박물관 섬'이 동독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서 베를린은 할 수 없이 새로운 박물관들을 설립한다. 그것이 바로 이 지역이다.


원래 이 근방은 1900년대 초부터 프로이센의 해군과 관련된 기관, 작전 사령부, 주거 공간 등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군대’와 관련 있어 보이는 건물은 찾기 힘들다. 오직 ‘레지스탕스 기념관’만이 그 과거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레지스탕스 기념관’은 1944년 7월 21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등의 처형이 집행되었던 ‘국방군 통합사령부 앞 정원’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손이 묶인, 벌거벗은 남자의 동상이 서 있다. 조각가 리하르트 샤이베(Richard Scheibe)가 제작한 이 조각상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뿐 아니라, 히틀러에 대항했던 모든 프로이센 군을 상징한다.


레지스탕스 기념관 뜰의 동상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암살 시도는 2008년 개봉했던 톰 크루즈 주연의 [작전명 발키리]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유명하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로이센 귀족 출신으로 신분이나 교육 수준면에서 당대 최고의 계층에 속했다. 1943년 4월 튀니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적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왼쪽 눈과 오른손,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는 중상을 당한다(그래서 잘생긴 톰 크루즈도 영화 내내 안대를 하고 나온다). 퇴역이 가능할 정도의 큰 부상이었지만, 장애를 이겨내고 복귀한 그는 베를린의 육군 보충군사령부의 동원참모 보직에 임명된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 시도는 즉흥적이거나 개인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 아니었다. 이미 독일 군 내에는 민간인 학살,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등에 회의를 품고 반 나치의 입장으로 돌아선 많은 군인이 생긴 상태였다. 이 조직이 군대 밖의 반 나치 조직과도 의견을 교류한 후 히틀러의 암살을 모의했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익과 ‘살인’이라는 행위가 가진 윤리적 문제를 고민하며 암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다. 몇 번이나 암살 계획은 뒤로 미뤄진다.


왼쪽이 슈타우펜베르크, 오른쪽이 [작전명 발키리]에서 그의 역할을 맡은 톰 크루즈


사실 이전에도 히틀러를 노리는 시도들이 있었다. 연설 직후 히틀러가 서 있던 연단에 폭발이 일어난다거나 사전 모의가 적발되는 일도 있어서 히틀러에 대한 경호는 엄중해진 상태였다. 히틀러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군 장성이나 고급장교도 면회를 할 때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전황이 악화되면서 히틀러는 여러 안가와 별장을 전전하며 깊숙이 틀어박힌 상태였다.




1944년 6월 17일, 슈타우펜베르크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국내 보충군 사령관의 참모장에 임명된다.  암살을 계획했던 조직원 중 유일하게 히틀러와 대면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직접 히틀러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다.


7월 20일 아침,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부관과 함께 히틀러가 있는 볼프산체로 가서 폭탄을 설치한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 시한폭탄이 폭발했지만,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만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 날인 7월 21일 오전 12시 30분 슈타우펜베르크는 관련된 주모자들과 함께 사살된다. 이례적으로 히틀러는 직접 라디오를 통한 대국민 연설을 한다.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독일 국민들도 격양된다. 총통의 안위와 안부를 걱정한다. 암살 시도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히틀러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전쟁이 끝나고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반역자’나 ‘배신자’로 다뤄졌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레지스탕스 기념관 내부는 조용했다. 들어서자마자 눈이 마주친 직원은 입장료는 없으니 ‘마음껏 천천히’ 둘러보라고 안내해주었다. 전시관은 작은 방들로 이어져 있다. 당시 사진과 팸플릿 등이 가득하다.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의 사형이 집행된 장소에 서 있는 기념관이지만, 그 일에 관한 전시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교회에서 벌어진 반나치 운동 등이 방 별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레지스탕스 박물관의 내부

나치는 장애인과 정신병자, 중증 환자들도 ‘절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9년 요양원과 복지시설 입소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명령에 반대한 사제와 수도자들의 사진과 저항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술가들의 저항을 소개하는 곳도 있다. 케테 콜비츠의 사진도 보이고, 나치를 피해 망명하여 다른 망명 독일인을 도운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의 모습도 있다. 학생운동으로 유명한 백장미 그룹에 관한 자료도 보인다. 하지만 많은 전시물들 중 내 눈길을 잡은 것은 게오르그 엘저에 관한 것이었다.




1939년 11월 8일 히틀러는 ‘나치당 맥주홀 폭동’ 기념행사에 연설을 하기 위해 뮌헨에 도착했다. 이 날 뮌헨시 맥주홀에서 열린 히틀러의 연설은 오후 7시 반부터 두 시간가량 전국으로 라디오 생중계되었다. 열변을 토한 히틀러가 예정보다 30분 일찍 연설을 끝내고 떠난 뒤 그가 서 있던 연단에서 폭탄이 터지며 아수라장이 된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구한 것이다.


게오르크 엘저. 위키 펌

그날 밤 8시 45경 스위스 국경 검문소에서 한 남성이 불법 월경을 하려다 체포된다. 그의 가방에는 폭탄 제조와 관련된 스케치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그를 조사하던 도중 뮌헨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된 군인들은 그를 베를린으로 압송한다. 그 사람이 게오르크 엘저(Johann Georg Elser)였다.




히틀러는 암살 시도가 영국 첩보 기관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지시한다. 덕분에 게슈타포는 엘저를 체포하고도 다른 영국 첩보원을 납치, 감금한다. 짜맞추기식 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나 보다. 엘저의 단독 범행을 안 후에도 영국 정보국의 작전으로 발표한다. 덕분에 게오르크 엘저의 용감한 행동은 전쟁 이후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게오르크 엘저의 직업은 목수였고 정식 교육은 초등학교가 끝이었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는 걸핏하면 가족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고 한다. 평균적인 프로이센 남자였던 것이다. 게으르크 엘저가 초등학교를 나오자마자 목수일을 배워 스위스 국경마을로 옮겨간 것은 일종의 '탈출'이었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한 그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얻는다. 클럽에서 연주를 할 만큼 음악을 좋아했고 누구보다 성실한 노동자였던 엘저는 대공황이 닥친 1932년 이혼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계기 제조회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간다. 그 회사의 특별부에서는 화약통과 선관을 제조했고, 그걸 보며 얻은 지식이 ‘맥주홀 폭발 계획’에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오르크 엘저의 친구는 그를 ‘나치를 혐오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히틀러식 경례’를 무시했으며, 유대인 박해에도 분노했다고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15-16세 청소년들이 유겐트가 되어 전쟁에 휩쓸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아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의 독일이 한 남자로 인해 망가진다고 느꼈을 수 있다. 그는 1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히틀러의 암살을 준비한다.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의 동료들이 귀족 출신으로 제대로 교육받고, 많은 정보를 취합해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임에 반해 게오르크 엘저는 눈앞의 현실에서 어긋남을 찾고 잘못된 것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의 동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작전을 미루고 실행을 연기할 때, 게오르크 엘저는 홀로 상황을 바로잡을 결심을 한다. 그것을 위해 게오르크 엘저는 자신의 전부 즉 목숨을 걸었다.


'독일을 위해 이곳에서 죽다'라고 써 있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전쟁 상황의 악화로 국경 수비가 강화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스위스 국경지대에 살았다. 국경을 넘는 일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혹시 영향이 갈까 봐 스위스로 도주한 후 나치에 편지를 보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의 가방에 들어있던 폭탄 관련 물건들은 그때 ‘어디까지나 단독 범행이었음을 주장할’ 증거들이었다. 이 단 한 가지 판단 착오로 그는 나치에 체포되었고, 그의 부모 및 주변 사람들이 모조리 검거되어 심문을 받는다. 하지만 나치는 가족에게도 게오르크 엘저가 단독으로 히틀러를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나치 붕괴 직전인 1945년 4월 처형당했다.




게오르크 엘저에 관한 기록은 1970년대에 베를린의 심문 자료를 검토하던 중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이 기념관에 전시됐다. 그의 행적을 생각하면 어떤 절대적인 권력에 대해 나 같은 ‘소시민’이 가졌을 분노를 느낀다. ‘나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상황에 더 휩쓸려 가지 못하는 것에, 나치 당에 더욱 깊숙이 개입할 수 없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저처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거도 많다. 하지만 그들도 나치에 순응했다. 그게 편하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입당한 이유는 제각각이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또는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또는 더 나쁜 일자리밖에 얻지 못하는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 또는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 또는 계약이나 손님이나 고객이나 환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때 독일 국민 세 명 중에 한 명이 국가를 위해 일한 적도 있다…….. 공무원 가운데 절반은 입당하든지, 아니면 자기 일자리를 잃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추정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렇게 하라는 충고를 충분히 받았으며, 거의 모두가 그 충고에 따랐을 것이다.

– 밀턴 마이어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중에서


이 사람들을 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시대에 내가 살았다면, 나 역시 이렇게 살지 않았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다. 어쩌면 저는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상심한 것 같지는 않다.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상황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통 용기가 아니다.


나치의 만행에 대해 현재 독일은 철저한 반성을 하고 있다. 도시 곳곳에 ‘반성과 추모’를 위한 장소를 만들고 언제든지 과거를 떠올리고 고개를 저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모두가 이런 반성을 하지는 않는다. 옆 나라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의 결정자들을 숭배하고 신격화했다. 내 나라도 사정이 썩 훌륭하지는 않다. 틈만 나면 뉴라이트 같은 이야기가 튀어 나온다. 참담하다.


반성은 용기이자 단호함이다. 독일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게오르크 엘저 같은 사람들이 숨쉬던 사회였기 때문 아닐까. 독일  사람 모두가 과거를 반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오 나치'의 재 부상 소식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은 공개적으로 네오 나치적 행태를 튀어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과거 반성이 옳은 것'이며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조상의 행적에 대해 과감하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틀렸으니 고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일반 시민들의 힘이 지금의 거대한 베를린을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기념관에는 사진이나 팸플릿 자료 옆으로 시민들이 참여하는 세미나를 알리는 공지도 붙어 있다. 관람실 중간 설치된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사 마시며 잠시 쉬고 있는 사이 서른 명가량의 학생들이 기념관 안으로 입장했다. 떠드는 학생은 없다. 우리에게 ‘마음껏’ 둘러보라고 안내를 해주던 직원은 아이들에게 팸플릿을 건넨 후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제 저 아이들이 이 공간을 누릴 차례다. 우리는 조용히 옆 문을 이용해 밖으로 나왔다.


돌이 깔린 바닥 위에 우뚝 선 조각상을 다시 바라봤다. 묘한 처연함과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현재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조금은 안도를 주고 있을 것이다. 조각상 앞에서 잠시 목례를 한 후 그곳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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