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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Oct 05. 2022

프로이센과 그 후

33. 수비대 교회를 가다

수비대 교회(Garnisonkirche)는 1735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명에 의해 완성한 건물이다. 늘어난 포츠담의 인구에 비해 개신교 신자들의 예배당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는데, 왕의 입김이 들어간 건축물인지라 다른 건물들에 비해 특별한 점이 많았다. 완성 당시 교회 부속 첨탑은 포츠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교회의 첨탑, 십자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황금색 프로이센 독수리 주조물과 FWR이라는 머리글자가 장식되어 있었다(지금은 수리 중이라 교회 옆에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다).


아마도 수비대 교회 위 첨탑에 올라갈 것으로 보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상수시 궁전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음에도  교회에 묻히게 된 것은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먼저 이곳에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조카는 왕족을 궁전 안 맨 땅에 묻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죽은 후에 벌어지는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니 어쩔 수없었다고나 할까. 덕분에 죽어서도 함께 있어야 할 만큼 사이좋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아니었을 것 같은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아버지는 한동안 같은 교회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1806년 브란덴부르크에서 개선식을 한 나폴레옹도 이 교회를 찾아 대왕의 무덤 앞에서 예를 갖췄다고 전해진다. 1912년에는 마지막 황제였던 빌헬름 2세의 즉위 25주년 기념식이, 1914년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출정하는 군대를 위한 송별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즉 수비대 교회는 프로이센 왕가를 상징하는 장소다.




수비대 교회(Garnisonkirche)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에서 내린 후 좀 걸어야 했다. 지금의 포츠담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대와는 아주 달라서, 교회는 근처 고층 건물들 사이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입장 불가다. 한창 공사 중인 교회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안내판만 설치되어 있다. 가이드 투어를 통한 전시회 참관은 가능하다고 하는데, 내가 방문하는 날은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수비대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동, 서독 분단 시절, 포츠담은 동독 영토에 속해 있었다. 1949년 동독 정부는 이미 뼈대만 남은 교회의 이름을 ‘수비대 교회’에서 ‘복음 교회’로 바꾼다. 교회의 명칭에서 풍기는 프로이센의 이미지를 없애겠다는 의도였다.


포츠담의 수비대 교회 , 칼 하센플러그.  첨탑 모양이 특이합니다

동독 정부는 집권 초반 베를린 도처에 도사리고 있던 프로이센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려 무던히 애를 썼다. 내용이야 어쨌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부가 왕정이나 전제정의 잔재를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독 정부는 1950년 프리드리히 대왕 기마상을 철거했고, 1951년에는 베를린 성을 폭파해 버렸다. 1967년 비록 이름까지 바꾼 수비대 교회였지만 그런 동독 정부의 의지를 피해 가지 못했다.  폭파가 결정되었 1968년 6월 23일 일요일, 수비대 교회는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프로이센을 바라보는 동독의 관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너져 가는 공산주의 대신 민족주의적 색채가 동독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마상은 1980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기조는 통일 후에도 이어졌다. 1991년 8월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는 상수시 궁전으로 돌아왔다. 수비대 교회 역시 제 모습을 찾고 있다.


동독 정부의 결정으로 교회가 폭파된 지 정확히 40년 후인 2008년 6월 23일, 수비대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수비대 교회 재단’이 설립되었다. ‘교회’ 본연의 상징성도 중요하지만, 나치로 대표되는 국가주의에 관한 기억을 남기기에 이만한 장소가 드물기 때문이다. 베를린 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1933년 3월 21일 히틀러는 ‘포츠담 수비대 교회’에서 3 제국의 첫 번째 국회 개회를 선언한다. 선전의 귀재 괴벨스가 아무 날, 아무 곳을 골랐을 리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괴벨스는 프로이센에 관심이 있었다. 1932년 4월에 있었던 선거 유세에서는 “우리 나치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독일 방방곡곡에서 우리는 프로이센인”이라고 떠들어댔다. 히틀러의 프로이센 사랑도 극진했다. 지하 16미터에 자리 잡은 총통 벙커의 유일한 장식물은 안톤 그라프가 그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상화였다고 한다.


안톤 그라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

3 제국 첫 국회 개회 선언이 있기 62년 전인 1871년 3월 21일은 비스마르크가 2 제국의 첫 번째 국회를 개회한 날이었다. 그러니까 히틀러가 수비대 교회에서 행한 첫 일성은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이어받는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잃어버린 14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히틀러의 ‘3 제국’으로 뛰어 넘어간다는 공표인 셈이었다.


이날 2 제국 육군원수의 정복을 차려 입고 나타난, 프로이센 제국의 전 참모 총장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는 한때 황제가 앉았던 비어 있는 황실용 자리에 예를 표한 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는 연미복을 입은, 다소곳해 보이는 인상의 새로운 총리 히틀러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프리드리히 대왕을 포함한 선대 왕들의 관에 헌화하고 악수했다. 프로이센의 국군주의가 나치즘과 결합하는 상징적인 장면은 그렇게 연출되었다.


이 상징적인 행사가 끝난 이틀 뒤 나치 독재의 시작점이 되는 ‘전권위임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다. 더 이상의 의회 정치는 없었다. 약 40일 뒤인 5월 2일에는 '독일노동전선'이라는 새로운 어용 단체를 만들어 '독일노동조합총동맹'을 해산시키고 노동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자신을 뽑아준 노동자 계급과의 결별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후 독일은, 그리고 히틀러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뭐였을까? 많은 학자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을 시도한다.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한 과도한 배상금에서 원인을 찾기도 하고, 대공황에서 실마리를 잡는 사람도 있다. 복잡한 이유를 밝히는 것은 역사가들의 책무이고,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교육자나 정치가들의 임무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하면, 그렇지 않다.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이 싹튼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역사는 언제나 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등장 전 독일의 사정은 처참했다. 전쟁에서 졌고, 전쟁 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갚아야 할 부채는 많았다. 여기까지는 ‘독일인’이라면 공통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런 독일인들을 대표해야 하는 정부는 지리멸렬했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폭동과 혁명을 이어갔고, 서로 죽이고, 습격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국회는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권위주의적 귀족들의 권력은 그대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책임이 있는 프로이센의 장군이라면 말 다한 것 아닌가.


공습으로 도시의 공장들은 폐허가 고 산업 기반이 무너진 결과 노동자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어땠을까? 같은 노동자였던,  불과 얼마 전까지 동료였던 실업자들을 안타까워했을까? 그랬던 것 같지 않다.


1930년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실업자는 31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32년 이 수치는 620만 명으로 늘어났다. 노동력의 1/3이 실직 상태인 셈이었다. 실업자는 주로 블루칼라와 이제 막 취업 전선에 뛰어든 사회 초년생들이었다…….. 당시 내각은 불황의 사회적, 경제적 결과들에 대해 특히 무지했다…… 주목할 만하게도, 심지어 정치적으로는 신보수주의에 반대하는 정치가와 노조 지도자들도 실업자들에게 직업을 찾아주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지 않았다……. 실업자의 수가 이미 500만 이상이었던 1931년 말과 1932년에 이르러서야, 독일의 노동조합은 경기를 조정하기 위한 조치로서 공공사업 프로그램을 지지했다.

– 디트릭 올로 [독일 현대사] 중에서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한다.




이런 때에 나타나 정권을 틀어 쥔 히틀러는 정부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실업 축소’에 둔다. 정부 지원을 통한 공공사업 프로그램을 만들고 ‘아우토반 건설’ 같은 토목 사업에도 착수했다. 대규모의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졌다. 나치당에 가입하면 더 쉽게, 보다 좋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생긴다. 이렇게 되자 독일인들은 앞다퉈 나치에 입당한다. 나치 선전부 괴벨스의 속기사였던 브룬힐덴 폼젤도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나치에 입당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더 운이 좋았다. 나치의 심장부에서 일할 수 있었다니.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빠듯하게 배급을 받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치 본부 사람들은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다. 폼젤은 이렇게 회고한다.


아무튼 난 남들보다 지내는 형편이 괜찮았어요. 약간 선택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편했고 마음에 들었죠. 쫙 빼입은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 그래요, 난 그 시절 껍데기로만 살았어요. 어리석게도요.

-  토레 D. 한젠 [어느 독일인의 삶] 중


사람들은 '나치당 입당'같은 '자신의 선택'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당시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보다 혜택을 덜 받는 사람 –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같은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쳐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삶이 힘들어진 이유는 당신들이 무능하기 때문이고, 내  삶이 편안하게 된 것은 내가 옳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당신들과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는 점차 활기를 찾았다. 나치는 입당한 노동자들에게 혜택과 보조금을 지급했다. 평생을 전쟁과 기아로 힘들어했던 독일의 노동자들은 ‘기쁨을 통한 힘’이라는 나치가 만든 ‘독일 노동전선’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이제 여행도 갈 수 있을 만큼 형편이 나아졌다. 여름에는 노르웨이, 겨울엔 스페인으로 온 가족이 휴가를 가는데 드는 비용은 단돈 10달러였다!


히틀러는 '국민차' 개발도 시도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그때 만들어진 국민차 '폭스바겐'


한편으로 히틀러는 군비 증강을 외쳤다. 1933년 이전에 공공 지출의 4퍼센트이던 국방 예산은 5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군수 공장에도 사람이 필요했고, 군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자리는 늘어났고 독일 국민들은 환호했다. 히틀러는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군대를 통해 제공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패전국 국민의 마음속에서 패배감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자긍심’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이런 풍경도 만들어진다. 밀턴 마이어라는 미국의 유대인 저널리스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7년 후 독일에 가서 평범한 그곳 사람들을 인터뷰한 책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 번은 제가 유대인 친구와, 그리고 당시 열세 살이었던 그 친구 딸과 함께 극장에 들어가 앉아 있었어요. 화면에 나치의 행진 광경이 나오자, 그 여자애가 제 엄마 한쪽 팔을 붙잡더니 이렇게 속삭이는 거예요. ‘아, 엄마, 엄마. 내가 유대인만 아니었어도 나는 나치가 되었을 거야!” -

– 밀턴 마이어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중에서


나치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사회당, 기독당, 공산당 등 다수의 정당들이 싸우던 국회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치가 아닌 정치가들은 모두 체포되었거나 수용소에 수감되어서 더 이상 싸움이 일어날 수도 없었다. 게슈타포가 거리를 접수하자 곳곳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사라졌다. 아마 시민들은 그 상황을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을 것이다.


그들은 직장이 있었고, 고용이 보장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여름 캠프에 가고, ‘히틀러 소년단’때문에 거리를 함부로 쏘다니지 않았다. 어머니라면 과연 무엇을 알고 싶어 하겠는가? 당연히 자기 아이가 어디 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시절에 모든 어머니는 그걸 알았거나, 또는 최소한 자기가 안다고 생각했다. …… 이때야 말로 그들의 삶에서는 최고의 시기였다.

– 밀턴 마이어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중에서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이웃에 살던 유대인들이 어느 날부터 모습을 감췄고, 곳곳에 강제 수용소가 들어섰다. 표현의 자유도 사라졌고, 검열이 일상화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여행비와 보조금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아리송했다. 정부는 채권을 발행해 돈을 펑펑 쓰고 있었지만, 그것은 미래의 유산을 먼저 끌어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주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눈앞의 열매가 너무 달콤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괜찮을까? 혹은 나는 괜찮을까? 나라면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1930-40년대 독일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당시 독일에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걸고 나치에 대항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독일 레지스탕스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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