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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19. 2022

베를린 장벽 기념관

26. 베를린의 기억들

다음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바람은 불지 않는다. 조용하고 고요한 비다. 비가 오려고 어제 그렇게 더웠던 것인가, 생각하며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숙소 앞 뜰의 물웅덩이에는 빗물이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어제보다 견딜만한 하루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어쩌면 이런 우울한 배경이 베를린 장벽 추모 공원을 찾기에는 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베를린의 지하철, 특히 여러 개의 라인이 겹치는 역에서 기차를 이용할 때는 들어오는 열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같은 선로 위로 다른 라인의 열차가 한꺼번에 지나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호선과 2호선이 환승하는 시청역 같은 곳이 있다고 가정하면, 같은 선로 위로 녹색 열차와 붉은색 열차가 번갈아 지나가는 곳이 의외로 많다. 이용하려는 노선의 색깔에 익숙하지 않고, 독일어는 ‘감사합니다’밖에 할 줄 모르는 나 같은 외국인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신경을 승강장 위 전광판에 집중하게 된다.


어, 그런데 지하철 도착 예정 시간이 계속 바뀌었다. 1분에서, 3분으로, 다시 5분으로. 내가 타려는 노선만 그런 것도 아니다. 다른 노선도 조금씩 시간 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아예 운행 불가인 것은 아니어서  조금 기다린 후 지하철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비 때문에 베를린 지하철이 지연되는 거래.”


베를린 여행에 새롭게 합류한 20대의 일행이 베를린 뉴스를 검색해 알려주었다. 엉성하지만 이해할 만한 한글로 번역되는 실시간 뉴스라니, IT기술의 발전은 놀랍다.


어쨌거나 지하철은 움직인다. 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과 커다란 가방을 끌고 있는 여행객들 사이를 비집고 트램으로 갈아타기 위해 역을 빠져나갔다.

흐리고 흐린 것이 베를린 장벽가기 딱 좋은 날씨일세!

베를린 장벽 기념관 앞에 내렸을 때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벽 기념관에 들어가기 위해 특별한 절차는 필요 없다. 입장권을 살 필요도, 방향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다. 총 3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긴 하지만, 그저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면 된다. 비옷을 입고 자전거를 탄 관광객 무리가 길을 따라 질주했다. 평일 오전임에도 꽤 많은 관광객이 우산을 쓴 채 서성이고 있었고, 초등학교에서 왔음직한 아이들의 무리도 보였다.


잔디가 펼쳐진 위로 여기저기 조형물이 보인다. 사진이 붙은 벽도, 그림이 달려 펄럭이는 곳도 있다. 모두 과거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라를 동, 서로 나누는 것에 대해 독일 국민은 찬성하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점령국들의 의지대로 흘러갔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과거다. 우리 조상들도 분단을 원하지 않았다. 거리로 달려 나가 시위를 했을 정도다. 하지만 결론은……


나라가 갈라져 버린 이유는 점령국들이 독일에 원하는 것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소련은 독일 정책의 1순위를 ‘배상’으로 규정했다. 나치에 의해 피해를 본 소련의 영토 및 시설에 대한 배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치즘과 자본주의는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거대 자본과 대토지 소유주들이 나치를 지원했다는 것이 이유다. 이런 주장은 ‘민주화’와 자본주의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서방 3국은 ‘경제 회복’을 우선에 두었다. ‘배상’은 독일의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화’는 소련식의 통제나 검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는지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역사가 이미 답을 주었다.




1948년 6월 소련은 도로, 철도, 수도관 보수를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서독 지역 그리고 서베를린으로 가는 모든 육로를 봉쇄했다. 전기도 끊어버렸다. 당시 베를린에는 약 400만 명이 살고 있었고, 그중 250만 명이 서방 지역에 살고 있었다. 소련의 봉쇄는 이 250만 명의 음식, 생필품, 연료가 끊긴다는 말과 같았다. 서베를린의 사람들을 굶겨 죽이겠다는 것이다. 혹은 동사시키거나.


베를린 공수. 템펠호프 공항에 내리는 미군기. 위키 펌


1948년 11월 서방 3국은 군용기를 이용해 베를린에 있는 자신들의 부대로 시민들의 보급품까지 공수하기 시작했다. 식품과 공산품, 심지어 석탄까지 실어 날랐다. 1948년 12월까지 매일 4500톤의 보급품을 공급했고, 다음 해에는 8000톤까지 양을 늘렸다. 비록 하루 4시간이긴 하지만, 서베를린 지역에 전력도 공급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보낼 곡물까지 독일에 투입되면서, 영국에서는 ‘배급제’를 시행을 정도라고 하니 연합국의 단합된 힘이라고 할 만하다.




1949년 5월 소련은 ‘보수 공사가 모두 끝났다’며 봉쇄를 중단했다. 누가 봐도 소련의 패배다. 독일인들은 이제 ‘두 개의 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1949년 5월 서방 3국이 점령한 지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1949년 10월 소련이 점령한 지역은 ‘독일 민주공화국’이 된다. 1952년 이후 동독은 국경 감시를 강화한다. 잡히면 구금이다. 그래도 매년 20만 명 이상이 동에서 서로 탈출을 시도했다.


1959년 동독은 새로운 국기를 채택한다. 흑, 적, 황 깃발 아래 망치와 컴퍼스를 덧붙인다. 별개의 두 나라는 이렇게 태어났다.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장벽 공사를 하는 동안 탈출 시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사살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두 나라는 완전히 적이 되었다.


지금 알고 있는 독일 국기에 망치, 컴퍼스, 호밀을 더하면 동독 국기
동독 정부 관계자들은 베를린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스트 보호벽’이라고 불렀는데, 이웃한 서독이 나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은연중에 담고 있었고, 이는 상당히 타당한 의견이었다.

명칭이야 어쨌든 장벽은 효과가 있었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이주가 거의 전면 차단되었다. 숙련공이 빠져나가는 출혈 사태가 멈추자 동독 경제도 한동안 안정되었다.

대부분이 베를린 장벽을 뚫을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받아들였지만, 장벽이 서 있던 기간에도 대략 5000명 정도가 장벽 밑으로 혹은 장벽을 넘거나 우회하여 탈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를린 지역에서만 1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 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중에서


총 155Km에 이르는 거대한 베를린 장벽은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두 겹, 그 사이로 감시탑이 설치된 구조다. 3-4번의 보수 작업을 거쳐 단단하고 높은 장벽으로 태어났다. 아무리 1960년대 독일이라도, 도시에 ‘장벽’을 지을 정도의 빈 땅이 방치되어 있었을 리는 없다. 우리나라 남북을 가르는 삼팔선이 회의장 테이블 위에서 결정되었듯 베를린 장벽 또한 그렇게 진행되었다. 멀쩡히 있는 집을 부수거나, 사이를 가르며 장벽이 들어섰다.



걷다 보니 건물 벽에 낯익은 것이 보였다. [자유를 향한 도약]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19살의 콘라드 슈만(Hans Konrad Schumann)이 도약하는 장면을 20살의 피터 리빙(Peter Leibing)이 촬영했다. 당시 독일의 미래 세대가 만든 세계사적인 장면이다.

자유를 위한 도약

독일의 동쪽 끝 작센 지방 출신인 콘라드 슈만은 베를린 장벽이 완성되기 이틀 전, 그러니까 1961년 8월 13일 동베를린 경찰청 소속으로 장벽 수비대에 배치된다. 당시에는  콘크리트 장벽이 아닌  높이1M정도의 철조망이 동서를 가르고 있었다. 배치되기 전 그는 서독에 관한 정신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군이 남측 인접 지역에 배치될 때 받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받지 못한 교육은 ‘어떻게 국경을 수비해야 하는가’였다고 후에 그는 회상했다. 콘라드뿐 아니라 배치된 군인 전원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틀만에 콘라드는 상황이 교육받은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베를린에 괴물이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대충 어떤 마음이 되었을지는 분단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동독에 살고 있는 딸이 서독에 있는 엄마와 철조망 사이로 안타까운 인사를 건네는 장면도 목격한다. 그 반대 장면도 가능하다. 베르나워 거리는 하루아침에 이웃들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눠져 버린 마을이다. 가슴 아픈 장면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콘라드는 마음이 흔들렸다. '저들을 향해 나는 총을 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과연 살인과 무엇이 다른가.




동베를린 쪽에는 기관단총을 들고 돌아다니는 동독 경찰들 뒤로 서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장벽 근처로는 접근할 수도 없다. 완벽한 분리다. 서쪽에는 서독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고, 장벽 근처에서는 서베를린 쪽 사람들이 동쪽을 향해 ‘어서 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이었겠지. 동독 경찰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디나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함부르크 출신의 피터 리빙(Peter Leibing)도 건질만한 사진이 없을까 카메라를 든 채 장벽 근처를 서성였다. 누군가 그에게 베르나워(Bernauer Strasse) 쪽이 더 흥미로울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가 알려준 곳으로 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종을 만들어 오라는 부장의 닦달 때문에 장벽 앞에 모여 있던 사진기자들이었다. 하지만 오전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은 퇴근시간을 확인하며 잡담을 나누는, 말하자면 좀 여유를 부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막 그곳에 도착한 피터의 눈에 장벽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군인 한 명이 포착된다. 피터는 그 군인이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챘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린다. 30분쯤 기다린 후 그 군인, 콘라드 슈만이 철조망을 뛰어넘는 장면을 찍는다. 콘라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는 데 걸린 시간은 3-4초 정도였다고 한다.


동독 경찰대가 당황하여 총도 쏘지 못하는 사이 혹은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교육을 받지 못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 서독 경찰은 콘라드를 경찰차에 태워 사라져 버린다. 피터는 이 사진으로 1961년에 ‘해외언론클럽 최우수 사진상’을 받는다.




다행히 콘라드 슈만은 총에 맞지 않았지만, 운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장벽 공원은 당시 동독을 빠져나가려다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아래로 뚫으면 된다. 땅굴이다.

터널 57 - 57명의 동독사람이 이 땅굴을 이용해 탈출했다

가장 유명한 길은 ‘터널 57(Tunnel 57)다. 서베를린의 빵집 지하부터 동베를린 쪽으로 뚫린 터널이다. 이곳을 통해 동독 주민 57명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게 된다. 누군가의 밀고로 이틀 만에 폐쇄되기는 했지만, 단일 땅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탈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70여 개의 땅굴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렇게 지하 탈출을 감행하자, 독일도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일명 슈타지 터널(Stasi-Tunnel)이다.

Stasi 터널 - 다른 터널과 수직 방향으로 뚫었다. 뒤로 철제 막대가 보인다.


탈출을 위한 땅굴들은 정확히 동독에서 서독 쪽으로 나아간다. 동독 비밀경찰들은 그 방향과 수직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걸릴 수밖에 없다. 직선으로 못하게 하면 우회로를 찾는다. 방법을 만들면, 그것을 방해하려는 사람들도 방책을 찾는다. 역사는 이런 것들의 반복이다.


공원 중간에 철재 막대들이 보인다. 장벽이 서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인데, 도주하다 사살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비를 품고 있는 것도 있다.




흑백 인물 사진을 담은 조형물도 있다. 역시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다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의 창]이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 생몰년이 새겨져 있다.


추모의 창. 젊은 사진이 많아 더 슬프다.


벽을 넘는 것은 큰 용기이기도 하다. 중년만 돼도 새로운 시도는 안 하게 된다(이건 나의 경험이니 다른 분들은 해당 안되실 수 있습니다만). ‘지금 그렇게 고생을 해서 이걸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미 가진 사람보다 앞으로 가지고 싶은 사람들이 경계를 부수고, 도약을 감행한다. 덕분에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도 대부분 젊다.




하지만 죽는 것만 희생은 아니다. 무사히 탈출한 콘라드 슈만의 일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장벽을 넘는 그의 사진은 다음 날 AP통신을 통해 [자유로의 도약(Jump to Freedom)]이란 제목으로 전 세계로 뿌려졌다. 이 사진은 냉전시대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된다. 포스터와 조형물로 만들어져 배포된다. 콘라드 슈만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유명 인사가 됐다.


이 사건 이후 동독은 철조망보다 더욱 굳건한 재질로 더 높게 베를린 장벽을 쌓아 올렸다. 두 세계 사이에 더 완고하고 강력한 벽이 건설된 것이다. 콘라드 슈만의 가족에게는 그가 '돈을 받고 장벽을 넘었다'고 알린다. 한마디로 '조국을 팔아먹은 파렴치범'이 된 것이다.


20년 후 자신의 사진 앞에 서 있는 콘라드 슈만


콘라드 슈만은 서독의 바이에른에 정착했고, 아내와 자식도 생겼다. 하지만 평생 동독 국가보안부(Stasi)의 방문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1969년 -1974년까지 서독의 총리를 지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사임한 이유는 그의 비서 중 하나가 동독 국가보안부 소속의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대통령 비서실에 간첩이 침투한 꼴이니, 콘라드 앞에 나타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콘라드의 마음고생은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동독에 사는 가족들은 그에게 동독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고 한다. 동독 국가보안부의 손길을 거친 편지였다.


그는 동독을 탈출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로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고 말했다. 평생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며 사는 삶이 행복했을 리 없다. 내 가족이 하는 말의 진정성을 의심해야 하는 것 역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장벽이 무너진 후에 그는 가족과 예전 친구들과 재회했지만, 이야기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 동독에 남은 사람들에게 콘라드 슈만은 그냥 ‘배신자’였을 테니까.


1998년 그는 자살한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콘라드 슈만의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사진 앞에 멈춰서서 생각했다. 그는 서독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냥 조용히, 사진같은 것으로 남지 않고 서독으로 스며 들었다면 그의 삶은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2006년 스페인의 아르투로 페리스 레베르테(Arturo Perez Reverte)가 발표한 소설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화가 파울케스 앞에 마르코비츠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10여 년간 파울케스를 죽이려고 행방을 추적해왔다.


“도대체 왜 날 그토록 찾아다닌 거요?”

낯선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계산된 표정 같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전혀 딴판으로 차갑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나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요. 날 유명하게 해 준 사람을 꼭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참 재밌지 않습니까?”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한층 깊어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고 냉랭했다.

“당신은 스쳐 지나가던 한 병사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병사였지요. 사진은 전 세계를 돌았고요. 그리고 당신은 그 익명의 병사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또 다른 사진들을 찍어댔지요.”

파울케스의 전 직업은 종군기자였고, 그는 부상당한 채 후퇴하고 있는 마르코비츠를 찍어 상을 받고 명성을 얻는다. 세상 사람들이 그 사진을 ‘전쟁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치 콘라드 슈만의 사진처럼.


그러나 마르코비츠의 운명은 그 사진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는 크로아티아 군 소속이었지만, 그의 아내는 세르비아 혈통이었고, 그것을 안 세르비아 군인들이 마르코비츠의 집에 들이닥쳐 그의 아내와 아이를 죽여버린다. 떠나면서 벽에다 세르비아의 십자가를 그려 넣고 문구도 하나 휘갈겨 놓는다. ‘크로아티아의 계집’이라고.


마르코비츠의 인생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파탄낸 사진, 그 사진을 찍은 작가를 찾아 죽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 아픔이 느껴진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책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란다!



콘라드 슈만의 인생은 마르코비츠의 인생보다 손톱만큼 덜 비극적이었다. 피터 리빙은 사진을 찍은 후 콘라드 슈만이 있는 경찰서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통성명도 했다. 파울케스보다는 좀 나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콘라드 슈만의 인생 역시 그곳을 탈출하다 사망한 사람들처럼 희생당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장벽을 세운 사람은 누군가? 무엇을 위해 그걸 만들었나? 타인을 함부로 죽이고, 판단할 권리는 누가 부여했나? 이런 착잡한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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