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베를린의 기억들
동독 정부 관계자들은 베를린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스트 보호벽’이라고 불렀는데, 이웃한 서독이 나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은연중에 담고 있었고, 이는 상당히 타당한 의견이었다.
명칭이야 어쨌든 장벽은 효과가 있었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이주가 거의 전면 차단되었다. 숙련공이 빠져나가는 출혈 사태가 멈추자 동독 경제도 한동안 안정되었다.
대부분이 베를린 장벽을 뚫을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받아들였지만, 장벽이 서 있던 기간에도 대략 5000명 정도가 장벽 밑으로 혹은 장벽을 넘거나 우회하여 탈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를린 지역에서만 1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 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중에서
“도대체 왜 날 그토록 찾아다닌 거요?”
낯선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계산된 표정 같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전혀 딴판으로 차갑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나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요. 날 유명하게 해 준 사람을 꼭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참 재밌지 않습니까?”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한층 깊어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고 냉랭했다.
“당신은 스쳐 지나가던 한 병사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병사였지요. 사진은 전 세계를 돌았고요. 그리고 당신은 그 익명의 병사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또 다른 사진들을 찍어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