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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04. 2022

수니온 곶에 가다

21.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 충실하자

오후 6시 30분을 넘겨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달려 버스가 수니온 곶 주차장에 도착했다. 좁은 주차장에는 대형 버스와 승용차들이 엉켜 있었다. 아테네로 돌아가는 버스 출발 시간을 확인하고 일행들과 떨어져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만 가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입장권을 끊고 경사로를 오르면 포세이돈 신전이 나온다. 노을 명소로 소문난 장소답게 커다란 사진기를 든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바이런이 남긴 낙서로도 유명한 포세이돈 신전은 내부 입장이 불가하다. 당연히 바이런의 채취를 느낄 수 없다. 바이런이 이곳을 찾았을 무렵엔 접근이 가능했나 보다 짐작하는 데 유용한 정보일 뿐.




넓게 펼쳐진 바다 위에 작은 섬들이 떠 있다. 우리의 다도해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다. 지도 앱을 켜고, 섬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저 멀리 ‘마크로니소스 섬’이 보였다. 마크로니소스 섬은 ‘기우라 섬’, ‘크리케리 섬’과 함께 악명 높은 그리스 정치범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마크로니소스 섬은 수니온 곶 옆으로 길게 누워 있다
왼쪽으로 마크로니소스 섬이 보인다


나는 역사를 전공하지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리스 역사에 대한 기사를 살짝만 찾아봐도 우리 현대사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마크로니소스 섬에 관한 이야기는 해방 직후 우리 현대사에 벌어졌던 좌익, 우익의 슬픈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작곡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가 수감되어 죽을 뻔한 곳이 마크로니소스 섬이다. 그는 그곳에서 척추가 부러지고 턱 뼈가 탈구 될 정도로 심하게 고문당했다. 그리스의 시인 티토스 파트리키오스 (Titos Patrikios) 역시 마크로니소스 수용소에 수감돼 구타와 고문이 이어지는 섬뜩한 생활을 했다. 뒤에 이야기할 아포스톨로스 산타스(Apostolos Santas)가 수감되어 있던 곳도 역시 마크로니소스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공개 처형되었고 그렇게 교수형 된 시체는 수용소 내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수용소를 만들었을까. 아름다운 그리스의 섬은 어쩌다 그런 잔인한 곳으로 변한 걸까. 이유를 알려면 역사의 시계를 조금 앞으로 돌려야 한다.




1941년 히틀러는 그리스를 침략한다. 당시 국왕인 요르요스 2세(이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공의 사촌다)는 이집트로 갔다 끝내 영국으로 망명한다. 왕은 나라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 땅에서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민중들은 독일의 점령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1941년 아크로폴리스에서 최초의 투쟁이 일어난다. 1941년 4월 27일, 크레타 섬으로 물러난 그리스 군을 대신해 나치는 아테네에 입성하여 아크로폴리스에 그들의 깃발을 올린다. 아테네 전역은 깊은 침묵에 빠진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나치 기를 내리는 그레조스와 산타스의 삽화 The Greek herald 펌

5월 30일 아침, 마놀리스 그레조스(Manolis Glezos)와 아포스톨로스 산타스 (Apostolos Santas혹은 Lakis santas)는 크레타섬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두 사람은 그날 밤, 아크로폴리스 절벽을 기어올라 하늘 높이 펄럭이던 나치 기를 제거해 버린다.


히틀러는 연설에서 ‘유럽은 자유롭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레지스탕스에서 기자로, 정치가로, 2014년에는 유럽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한 마놀리스 그레조스는 2011년에 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에게는 궐석으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 지역 경찰서 책임자들이 파면되는 등 후폭풍이 장난 아니었지만, 이들은 용케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훗날 체포와 탈출을 반복하지만, 목숨은 부지한 채 레지스탕스 활동에 전념한다.


마놀리스 그레조스와 아포스톨로스 산타스


나치 점령 하의 그리스 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1941년 이후 그리스는 극심한 기근을 겪는다. 작황이 안 좋았던 탓도 있지만 독일이 ‘점령 비용’으로 농업생산물을 강제 징발해버렸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그 일부를 고국으로 보내고, 자신들이 먹고 남는 것들은 그리스 인에게 비싼 값으로 되팔았다. 당시 그리스 인구의 7%에 달하는 50만 명 정도가 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칼리브리타에서는 레지스탕스에 협조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12세 이상의 남자를 모두 죽이고 1000여 채 이상의 가옥을 불태우기도 했다. 1944년 6월 디스토모에서는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벌어져 마을 주민 대부분이 살해당했다.


그리스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나치의 손길을 피해 가지 못했다. 전쟁 전 그리스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약 77000명 정도였는데, 이중 90퍼센트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인들의 저항은 점차 조직화, 집단화된다. 인민해방군(ELAS)으로 알려진 그리스 공산당은 무장 투쟁을 통해 수십 개의 마을을 독일로부터 해방시킨다. 독일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치안을 위한 임시 자치 기구를 조직했다. 이들의 저항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독일이 퇴각할 당시 그리스 절반 이상을 해방시킨 상태였다.

배에서 내리는 처칠. 멀리 아테네가 보인다. 가디언 펌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 10월 9일, 영국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일명 ‘톨스토이 회의’를 갖는다. 영국의 처칠과 러시아 스탈린 사이에는 협정이 맺어진다. 스탈린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영국은 ‘그리스’를 갖기로 둘이서 합의한다. 해방 즈음 우리나라를 두고 맺어진 협정들과 대동소이하다.


10월 12일 독일군이 아테네에서 퇴각하고 영국군이 상륙하자 본격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영국군은 임시 정부를 수립한 후 왕을 복권시킬 준비를 하고(이것은 필립공의 조카 사랑 때문이었을까……) 그리스 인민 해방군에게는 무장 해제를 요구한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상황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옥으로 보냈던 나치의 부역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 내전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도 한 안드레 게롤리마토스(Andre Gerolymatos)는 당시 그리스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1월 중순 영국군은 보안 대대 장교들을 석방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일부는 새 제복을 입고 아테네의 거리를 자유롭게 걷고 있었다……


과거 대한민국, 일본에 부역하던 순사들이 새로운 경찰 제복을 입고 독립군을 잡으러 돌아다녔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도 정확히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시민들을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곧 뚜껑이 날아갈 것처럼 차오르던 분노가 터진 것은 몇 주 후였다.


1944년 12월 3일 신타그마 광장. 가디언 펌

12월 3일 일요일 아침,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왕정복고에 반대하는 사람들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신타그마 광장으로 향했다. 경찰이 길을 막았지만 분노한 군중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발포.


총격전은 30분간 지속되었다. 정오가 되자 6만 명에 달하는 두 번째 시위대가 광장을 꽉 채웠다.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된다. 28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데켐브리아나’로 알려진, 그리스 공산당과 영국군(그리고 그리스 왕당파와 우익)의 충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영국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시 장악을 우려했다. 어렵사리 스탈린과 땅따먹기 협상을 끝내고 왔는데, 빈손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 인들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영국의 마음에, 특히 처칠의 안중에는 없었다.

총격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아테네 여성들. 가디언 펌


12월 5일 영국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자 계급이 많이 거주하는 메츠 지구에 공중 폭격을 감행한다. 탱크, 폭격기, 중무장 군인이 아테네 거리를 활보했고 거리와 주택가에 불길이 치솟았다.


과거 아크로폴리스에서 독일군의 허를 찔렀던 마놀리스 글레조스는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인다. 12월 25일 저녁, 글레조스는 영국군 사령부가 있던 그랜드 브레타뉴 호텔 지하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다. 2014년에 있었던 가디언과의 인터뷰이에서 글레조스는 이렇게 말했다.


“30명 정도가 그 일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하수도 터널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더러워졌고, 똥으로 뒤덮인 하수도 시스템에서 나왔을 때 우리를 씻겨주던 소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발포 명령은 결코 오지 않았습니다. 폭발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알게 되었죠. 마지막 순간에 처칠이 건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공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요. 그들은 영국군 사령부를 폭파하고 싶었지만, 영국 수상을 암살한 책임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공산당은 무장 해제를 당한다. 15000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이 중동의 수용소로 보내진다. 2월 12일 휴전이 조인되고, 데캄브리아나 또는 나치 기간 중 인민해방군을 도운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모두 검거되어 수용소로 보내져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당했다.




1946년 3월 총선이 열리고 우익 정권이 들어선다. 우익 깡패들이 1100명 이상의 민간인을 살해한다. 그리스 민주군(DSE : 주로 전 ELAS군인으로 이루어진)이 조직되어 이들과 전투를 벌이며 내전이 벌어진다. 1947년 9월 마침내 공산당이 불법화된다.


영국군의 개입 이후 불법화될 때까지 4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영국령의 중동이나 영국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19000명이 넘는 그리스 국민이 그리스 수용소와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중 12000명이 내 눈앞에 보이는 마크로니소스에 수감되었다. 그리스 강제 수용소에서 벌어진 고문이나 살인에 관한 이야기는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잔학 행위 중 하나로 꼽힌다.


1946년 12월 영국은 그리스 문제에 손을 떼기로 한다. 그리스 수상 콘스탄티노스 찰다리스는 미국으로 날아간다. 트루먼 대통령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성공한다. 1948년 여름, 그리스 민주군은 거의 20000명이 사망하는 치명적 패배를 당한다. 국경은 봉쇄되고, 더 이상 희망을 보이지 않았다. 1949년 10월 휴전 협정이 맺어지며, 내전은 완전히 종식됐다.


길고 잔혹한 역사의 물결이 지나갔다. 안드레 게롤리마토스는 이렇게 정의한다.


“1944년 12월 데켐브리아나와 1946-49년 내전의 영향은 현재에 스며들어 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나치에 맞서 싸웠다면 이념과 상관없이 전후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다. 그리스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사람과 싸운 사람들이 영국의 명령에 따라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그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현재 그리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다.”


2014년 마놀리스 글레조스. 가디언 펌

그리스 공산당들은 이 과정에서 육체적 핍박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정신적 상처도 받았다. 그리스 공산당들은 소련의 행태를 결국 알아차렸다. 글레조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고 그리스를 영국인에게 주었죠. 우리가 원했던 것은 우리가 산에서 만들었던 정부처럼 사람들이 통치하는 국가,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서 나오고 인민에 의해 집행된다’는 문구가 통하는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원하고 창조한 것은 당의 지배였습니다."


마크로니소스에서 수용 생활을 했던 그리스 시인 파트리키오스의 말이 어쩌면 이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에는 윤리가 없다, 특히 제국주의 정치는 더욱 그렇다”


국제 정치에서는 정의도, 옳고 그름도, 선의도 없다. 국제 정치에 통용되는 것은 힘과 강자의 이익과 약자를 이용하는 비정함 뿐이다. 우리를 도울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




1922년생인 마놀리스 글레조스는 2020년 사망할 때까지 정치 한가운데 있었다. 그리스 판 516 쿠데타인 속칭 ‘대령의 정권’ 군부 독재 시절에도 투옥과 유배를 반복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민주화 이후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고, 그리스 금융 위기 당시 가혹한 경제 긴축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기도 한 글레조스는 2014년 유럽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자유는 투쟁을 통해 얻어진다. 슬픈 이야기지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냉혹한 교훈이다.



“하늘 봐.”


수니온 곶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감탄 섞인 말에 고개를 돌리니 멀리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이 보였다. 환상적이다.


해가 지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낮의 더위를 모두 잊게 할 만큼 사납고 차가운 바람이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겨우 붙잡으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래, 여기가 노을 맛집인 이유가 있네. 모든 걱정 근심 날려버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야. 애써 왼쪽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앞으로 고정한다. 오늘 더 이상 마크로니소스 섬은 보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를 빠짐없이 기억할 것이다. 과거 내 조상들이 어렵사리 헤쳐 나온 고통의 시간과 그것을 대가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자유를, 희망을, 아름다움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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