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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01. 2022

테르모필레에 가다

20. 수십만이 지켜도 한 명의 배신자가 말아먹는 법

가이드를 불안하게 만든 오전의 ‘이상 저온’은 정오가 되기 전 사라졌고, 한낮의 태양 고속도로를 달궜다. 뜨거운 햇빛이 차창 안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왔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도 큰 도움이 안 된다. 다들 더위와 햇빛에 지쳐 어쩔 줄 모르는 사이 국도로 빠져 달리던 차가 멈췄다. 테르모필레 전투비 앞이었다. 차들이 지나는 도로 옆에 덩그렇게 전투비 유적지가 서 있다.


우리나라 국도 근처 전투비가 놓인 곳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기억할 만한 큰 전투가 벌어졌고 그곳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길이 뚫리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전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는 지형으로 바뀌는 것 말이다.


테르모필레 전투비

“테르모필레는 스파르타 레오디나스 왕과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왕이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과거에 이곳은 바다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지형이 많이 달랐죠. 그런데 안 내리세요? 내려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으셔야죠?”


차 안의 일행들이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늘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나설 용기가 없다. 그만큼 무서운 햇빛이다. 가이드가 웃으며 차를 이동시켰다. 테르모필레는 ‘뜨거운 통로나 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뜨거운 통로라면…… 당연히 온천이다. 테르모필레는 노천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럼 온천 들러서 족욕이라도 하고 가세요.”


차가 천천히 이동했다.



페르시아와 아테네가 마라톤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기원전 490년이고, 당시 페르시아 왕은 다리우스 1세였다. 마라톤에서의 패배 이후 다리우스 1세는 3년간 착실히 정벌을 준비한다. 4년째가 되어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뜻밖에도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방향을 바꿔 이집트 출정을 준비하던 다리우스 1세는 그 어떤 곳도 평정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것이 크세르크세스 왕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이 전투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먼저 이집트를 정벌한 후 성공한다. 급한 불을 먼저 끈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공략 뒤 4년간을 군대의 징집과 군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데 소비했다. 그리고 5년째에 접어들어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섰다.


이런 준비를 마치고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그리스로 건너온다. 이동 중 만나는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킨 후 그곳에서도 군대를 징발한다. 아무도 페르시아 군을 막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 함대가 세피아스에 이르고 육상 부대가 테르모필레까지 진군하는 동안 페르시아는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의 총병력 수는 아시아에서 온 함선 1207척으로 …… 총병력수는 51만 7610명이나 된다.


보병 부대는 170만 명, 기병 부대는 8만 명이었다. 여기에 아라비아인의 낙타 부대, 리비아의 전차 부대 2만 명을 덧붙이면 …… 총병력수는 528만 3220명에 달했던 것이 된다.


그게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2022년 현재 미 정규군이 137만 명이라고 하니까, 페르시아 군은 대략 그 4배에 달하는 병력을 끌고 내려온 것이다. 물론 헤로도토스의 뻥도 더해진 숫자겠지만, 어쨌든 많은 수의 병력이 움직인 것은 틀림없다. 페르시아 제국이 괜히 제국이겠어.


페르시아 군의 이동로. 위키 펌

그리스 군은 두 곳으로 나눠 이동한다. 해군의 아테네는 함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육군의 스파르타는 테르모필레에서 적을 맞이한다.


레오디나스는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만 친히 선발한 ‘3백인대’를 이끌고 테르모필레로 왔다.


‘아들이 있는 자’를 선발한 것은 집안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레오디나스 자신도 전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영화 300에는 그의 똘망똘망한 아들이 배웅을 나온다. 레오디나스 자신도 아들이 있는 자였다). 그만큼 심각하고 위험한 전투였다.


물론 이 군대만 가지고 500만 대군을 막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 측에도 연합군이 있었다.


페르시아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 군의 진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스파르타의 중무장병 300명, 테게아와 만티네이아에서 각각 500명, 아르카디아의 오르코메노스에서 120명, 그 밖의 아르카디아 각지에서 1000명이었다. 여기에 테스피아이인 700명 테베인 400명, 오픈디아 지구는 전 병력을 출동시켰고, 포키스인 1000명도 원군으로 가담했다.


그러니까 테르모필레에는 많이 잡으면 5천 정도의 육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 병력으로 싸우겠다는 마음 자세는 기특하고 갸륵하다. 테르모필레가 아니었다면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얕은 구릉처럼 보이는 산과 시내가 졸졸 흐르는 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당시 테르모필레는 좁고 긴 협곡이었다. 길만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면 적은 군사로도 충분히 대적할 만했던 것이다. 몇 번 방어를 뚫어보려 했지만 페르시아 군은 번번이 실패한다. 크세르크세스는 답답해진다. 이때 누군가 나타난다.


이때 에우리데모스의 아들인 에피알테스가 페르시아 왕을 찾아왔다. 그는 왕으로부터 막대한 포상을 받으리라 기대하여, 테르모필레로 가는 샛길이 산속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에피알데스의 제안에 크세르크세스는 크게 기뻐하며 곧 히다르네스와 그의 부대에 출동을 명했다.


적은 늘 내부에 있다. 그리스에도 ‘토착 왜구’가 존재했던 것이다. 에피알테스는 샛길을 알려준다. 히지만 샛길도 길이다. 그리스 군이 이곳을 내버려 뒀을 리 없다. 1000명의 포키스 군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테르모필레로 숨어들던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군과 마주친다.


무장을 갖춘 병사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적군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한 부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히다르네스는 이 포키스 군이 스파르타인 부대는 아닌가 두려워하며 에피알테스에게 어느 나라 군대냐고 물었다. (스파르타 군이 아니라는)사실을 알게 된 페르시아 군은 그들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은 채 전속력으로 산을 내려갔다.


이런...... 포키스 군은 페르시아 군에 무시 당한다. 아마 그들이 스파르타군이었다면, 페르시아 군은 퇴각했을 것이다. 이제 이 길로 대군이 뚫고 내려온다. 그리스 군에 남은 선택지는 없다.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자크루이 다비드, 위키 펌
크세르크세스 휘하의 페르시아 군이 전진하자, 레오디나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은 죽음의 길로 떠날 각오를 하고 도로의 폭이 넓어지는 지점까지 출격했다. …….  

레오디나스는 이 격적의 와중에서 실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쓰러졌고, 다른 이름 있는 스파르타 인들도 그와 운명을 같이 했다…….

그리스 군은 여기에서 아직 손에 단검을 든 자는 단검으로, 무기가 없는 자는 손과 이빨로 싸웠다. 그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다.


페르시아 군이 무서워한 스파르타의 저력을 보여준 전투였다. 무기가 없는 자는 손과 이빨로 싸웠다, 는 표현이 얼마나 대단하고 처절하게 싸웠는가를 증명한다. 페르시아 군은 퇴각하고, 살라미스에서 아테네 군과 마주한다.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싸운 스파르타인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만든다.


페르시아 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스파르타군을 위한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여행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들의 명을 수행하고 여기에 누워있다고.




테르포필레의 온천은 소박했다. 유황냄새가 나는 작은 유원지 냇물 같다. 입장료가 없으니 관리도 되지 않는다. 수초가 자라고 있는 바위 표면은 엄청나게 미끄러워서, 잡고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가는 줄을 걸어 놨는데도 위험해 보인다.


밤에는 입구를 막는지 철망으로 된 문이 달려있고, 과일을 파는 중동계로 보이는 청년들의 노점 트럭이 서 있다. 노점상의 아이들인지 동네 아이들인지 모를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다. 그 뒤로 폐호텔이 서 있었다. 페인트로 어지럽게 낙서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문을 닫은 것 같았지만, 어느 창 밖에는 이불이 걸려 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여기 벌써 다 개발했을 것 같은데…… 그렇죠?


더위에 더 더운 온천에 들어가기보다 철망 안쪽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있는 일행에게 가이드가 말했다. 그가 폐호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호텔이 장사를 하긴 했는데, 돈 내고 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나 봐요. 망해서 나갔고, 지금은 난민 주거 시설로 사용되고 있어요.”


주위를 둘러봤지만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길 가운데 서 있던 테르모필레 전투 기념비처럼 길 옆에 있는 온천, 그리고 폐호텔일 뿐이다. 버스가 지나다닐 것 같지도 않다.


“그리스도 난민 문제가 심각해요. 유럽이니까요.”


테르모필레 노천. 놀는 사람이 많아 사진을 못 찍어서...위키 펌

가이드가 씁쓸한 얼굴로 말하고 차로 걸어간다. 난민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 온난화도 지속되고 있다. 우크라니아와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예견한 전문가는 없었다. 푸틴의 허풍이라고 그들은 말했었다.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그 전쟁이 언제 끝날 지, 결국 어떻게 될지 전문가들은 입을 닫고 있다. 전문가이든 일반인이든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 역시 암울하다. 언제 전쟁이나 기후 위기 가운데 휩쓸려 가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언제나 ‘에피알테스’ 같은 자가 존재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안전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집단의 안위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자들이 존재해 왔다. 레오디나스의 분전과 희생은 안타깝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에피알테스 같은 인간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한 방법이 아닐까.


그렇지만 에피알테스 같은 인간을 막기는커녕 그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긴 적도 있다. 이완용이 그랬고, 친일파나 토착 왜구가 그렇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잊으면 안 된다.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 조용해진 차 안에 그리스 음악이 흘렀다. 가이드에 의해 엄선된, 자신의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인 노래들이 차 안을 채운다. 노래 하나에 설명 하나. 대단한 정성이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이 장면인 것 같군요. 위키 펌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왔다는 춤곡이 흘러나온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표정으로 조르바가 춤을 추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과 조르바가 하려던 모든 일이 실패한 후 그들은 춤을 춘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고 엄숙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틀린 부분을 고쳐 주었다. 나는 차츰 대담해졌다.......

"부라보, 젊은이! 종이와 잉크는 지옥으로나 보내버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두 남자는 격렬하게  춤을 춘다. 조르바는 주인공에게 '자유로워지라'라고 말한다.


"두목,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걸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 잘은 해나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만 좀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끈을 자를 수가 없지.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끈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그 바보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끈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 맛이 뭐가 나겠어요? 그래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나 역시 끈을 자르지 못한 인간이다. 어쩌면 끈에 묶여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일지도.......


다음 노래는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이다. 이 노래도 그리스 노래로군, 나는 생각했다. 트윈폴리오 어르신들이 활동하실 때에는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 걸까? 창 밖으로 산과 산과 산이 지나간다. 가이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음 노래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입니다. 노래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입니다. 한 그리스 청년이 레지스탕스가 되어 고향을 떠나 카테리나로 갑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는데, 연인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카테리나행 열차는 8시에 떠나네,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그리스의 대표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쓴 아름다운 노래를 소프라노 조수미의 목소리로 들어보겠습니다."


느리고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기차와 노래에 깃든 '슬픔'이라는 감정 때문인지 내 머릿속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독재 정권에 맞서 레지스탕스 투쟁을 벌이던 포르투갈 인들의 슬픔과 사랑이 담겨  있다. 주인공 중 누구도 행복한 미래를 갖지 못한다. 심지어 불행은 후손에게도 영향을 준다.  


권력은 언제나 더 큰 곳을 바라본다. 가장 위로 올라가려는 습성이 있다. 그것을 위해 더 많은 타인의 권리가 짓밟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포르투갈에서도 그리스에서도 여지없이 독재정권이 생겼다 사라졌다. 지금은 우리도, 그리스도, 포르투갈도 독재와는 상관없는 정치 구조 속에 살고 있지만, 아마 그들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국민들이 조그만 틈이라도 다면 말이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다. 나는 창밖을 보며 이런 생각을 두서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다음 날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있을 즈음 수니온 곶의 노을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리스 현지 가이드에게 예약 티켓을 보여주고 작은 미니 버스에 탑승하자 앉아 있던 일곱 명의 미국인과 독일인 관광객들이 인사를 했다.


‘하이.’


영어 투어를 가면 늘 비슷하다. 인사를 나누고 창 밖을 보면 된다. 투어는 영어로 진행될 것이고, 나의 영어 실력은 가이드의 말을 이해할 수준이 못 된다.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할 뿐.


문을 닫고 자리에 앉은 가이드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녀에게도 ‘기본 절차’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입을 뗄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북한과 헷갈리면 곤란하니, 이번엔 분명히 말한다. ‘저는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습니다만’


14개의 눈이 우리를 향하더니 갑자기 영어가 쏟아진다. 그러니까 이런 것, BTS, 기생충, 봉준호, 박찬욱, 아가씨, 오징어 게임…… 발음도 제법 정확하다. 누군가는 기생충이 너무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맞은편 사람은 오, 나 아직 그 영화 못 봤는데. 그러면 누군가는 또 말하는 것이다. 원더풀 하니까 꼭 봐. 이런 말들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엄지 손가락도 몇 번인가 내 앞으로 지나간다. 아하하하. 나는 내내 어색하게 웃고 있다. 긴 머리를 허리 뒤까지 기른 현지인 가이드가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아, 이런. 언급된 모든 분, 뵌 적 없지만 감사합니다. 앞의 외국인들은 아직도 이야기 진행 중이다. 오징어 게임은 봤어? 아니, 아직. 그거 재밌어. 이런 이야기가 귓가를 스쳐갔다. 나에게 오징어 게임을 봤는지 안 물어봐 줘서 몹시 다행이다. 현지 투어에서 이런 반응은 처음이다.


가이드가 버스 손잡이를 잡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앉아서 해도 좋으련만, 이곳에는 이곳의 룰이 있는 것이다. 시작은 날씨와 휴가 같은 일상 이야기다. 그리스에는 얼마나 있다 갈 거야? 그리스는 어때? 같은 이야기. 갑자기 버스 안이 조용해진다. 가이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네? 뭐라고 하셨죠?


“여기 있는 손님들이 다음엔 한국에 가고 싶대.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 언제야?”


아…… 여름. 여름에 오지 말아요. 쪄 죽는 수가 있어요. 아, 그리고 겨울도 안돼요. 얼어 죽어요.


“그럼 언제?”


사.. 사.. 삼월에서 유월, 아니면 구월이나 시월에 와요. 그땐 조.. 조크 든요.

“여러분 들으셨죠?”

가이드의 말에 또다시 영어의 물결이 지나간다. 휴우. 버스는 항구를 지나 남쪽으로 이동한다. 가이드는 그리스 신화 어디쯤을 들려주고 있다. 수니온 곶을 가면서 신화를 빼먹을 수는 없다.




포세이돈의 흰 소와 사랑에 빠졌던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는 아들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스 왕은 아들이지만 아들이라 말하기 싫은 미노타우소스를 다이달로스가 만든, 일단 들어오면 복잡해서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에 넣어 버린다.


당시 아테네의 왕은 아이게우스였다. 아들을 낳고 싶어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지만, 해석을 잘못해서 아무 곳에서나 술 주머니를 풀어버린 그 왕 말이다. 당시는 미노스가 아테네보다 훨씬 강했다.


미노스는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되도록 일곱 청년과 일곱 처녀를 무장하지 않은 채 보내라고 명령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세 번째 공물이 보내졌을 때 테세우스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는 자원하여 자신을 바쳤다고 한다. 아이게우스는 배에 검은 돛이 달여 있는 것을 보고 아들한테 이르기를, 그가 살아서 돌아오게 되거든 배에 흰 돛을 달라고 했다

–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 중


신탁의 말대로 태어난 테세우스가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온다. 미노스에 공물을 바치느라 걱정 가득한 아버지에게 자신이 공물이 되어 미궁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말리지만, 일의 전개상 테세우스는 공물 1이 되어 배를 타고 미노스로 간다.


미노스에게는 아리아드네라는 딸이 있었는데, 테세우스를 보자마자 마음을 뺏긴다. 미궁에 갇힌 괴물은 안중에 없다. 엄마를 닮아 다이달로스와 친했던 아리아드네는 조언을 구한다. 미궁을 설계한 사람답게, 그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


“실을 풀면서 들어가서, 그걸 따라 되돌아 나오렴.”


아리아드네는 ‘성공하면 공주를 데리고 미노스를 떠나겠다’는 다짐을 받고 테세우스에게 실을 준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궁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아이게우스 왕은 이 바다를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이런 남녀상열지사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는 내내 바다를 바라보며 아들이 탄 배를 기다렸다. 성공한다면 흰 돛을 달고 올 것이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약속대로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도망친다. 하지만 낙소스 섬에 도착해 잠들어 있는 아리아드네를 버린다. 이런 짓을 하느라 신경을 너무 썼던 테세우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떠올리지 못한다.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도망치는 것에 성공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고 오기로한 그 약속을  잊은 것이다.


 시절 아이게우스가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 장소가 수니온 곶이다.


어느 날 아들의 배가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돛을 단 채. 아들이 실패해서 미노타우로스에게 먹혀 버렸다고 생각한 아이게우스는 비탄에 잠겨 바다에 몸을 던진다.



요트는 많지만 내 것은 없다! 수니온 곶만 보인다.


“여기서 잠시 내려 수니온 곶의 전경을 보겠습니다.”


가이드의 안내로 버스에서 내리자 요트가 가득한 항구가 보였다. 멀리 수니온 곶의 전경과 포세이돈 신전이 보인다. 그리스는 돌덩이로 사람의 마음을 뛰게 하는 묘한 곳이다. 그럼 이제 수니온 곶으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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