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의 사원들

- 말라카 여행의 시작

by 지안

말라카 여행의 시작점은 ‘존커 거리(Jonker Street)’였다.


위키 단어 검색을 이용해 찾아보면 Jonker라는 단어는 중세 네덜란드어 Jonkheer에서 유래한 것으로 ‘귀족이 아닌 평범한 남성’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귀족이나 부잣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 거리는 ‘장삼이사의 거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존커 거리는 상점과 집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이었다. 한낮의 햇빛이 사정없이 길 위로 쏟아졌고 양 옆의 집들은 대부분 2층이었다.


“이 거리의 집들 대부분은 1층은 가게로 2층은 주거 공간으로 사용합니다. 옛날 말라카의 서민들이 살던 거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은 조용해 보이지만 밤이면 야시장이 열려요. 가시죠.”


청 훈 텅 사원. 지붕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골목 중간 사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지붕이 인상적인 ‘청 훈 텅 사원(Cheon Hoon Teng Temple)이다. 한가하게 입구 옆 의자에서 부채질하는 아저씨를 지나 사원 안으로 들어서니 연기가 자욱했다. 향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길에는 중국식, 이슬람식, 힌두식 사원이 다 있습니다. 이 사원은 중국식 사원입니다. 유교, 도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 이 사원에 와서 기도를 드립니다. 항해 전 여기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중국인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사원에서 해결을 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대 말라카를 ‘강력한 해상 왕국’이라고 말했지만 왕국의 초창기에는 지극히 미약했다. 위로는 지금의 태국에 해당하는 아유타야, 아래로는 전성기의 마자빠힛이 으르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급할 때쯤 나타난 것이 남양 원정길에 나섰던 명나라 장군이자 탐험가, 외교관이었던 ‘정화’다.


말라카 사람들은 아직도 정화장군을 기리고 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8년 동안 총 7회에 걸쳐 동남아시아에서 남아시아, 멀리는 아라비아 반도와 동아프리카까지 이동했던 정화는 함대의 보급기지 역할을 할 곳으로 말라카를 점찍었다. 말라카는 정화 함대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명의 조공국이 된다. 이제 말라카를 손에 넣으려면 먼저 명나라 세력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시 힘으로 명나라와 맞붙을 정도의 세력은 없었다.


안정을 찾아가던 말라카에 운명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십자군 전쟁(1096-1291년)을 계기로 향료가 유럽인에게 알려지게 되고 15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많은 배들이 향료를 구하기 위해 말라카로 몰려왔다. 당시의 상선들은 지금처럼 마음대로 운항할 수 없었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야 항해가 가능했다.


상인들은 장마가 끝날 무렵 도착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계절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이 시기를 보내기 위해 켈링 케이프, 차이나 타운, 자바 마을 같은 대규모 상인 거주 시설이 만들어진다. 마침내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상인들은 서둘려 말라카 인근에서 모여든 향신료를 배에 가득 싣고 자신들의 나라로 떠났다.


중국사원은 금색으로 반짝였다. 관음보살을 모신 곳. 옆에는 관우를 모신 곳도 정화장군을 모신 곳도 있다.

청 훈 텅 사원 안에는 정화를 모시는 장소도 있었다. 사원뿐 아니라 말라카 거리 곳곳에서 정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기념품을 파는 가판대를 지나쳐 몇 미터 걸었을 때 모스크를 평면으로 눌러 놓은 듯한 지붕이 나타났다. 뒤로는 초록색 삼각 녹색 지붕이 보였다.


“여기가 깜풍 클링 모스크(Masjingd Kampu Kling)입니다. 좀 이상하죠?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그 돔이 없습니다. 이 모스크는 18세기에 인도계 무슬림 상인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실 때 신발 벗는 것 아시죠? 오실 때 휴게소에서 망고 드셨죠? 이 사원 뒤 쪽에 거대한 망고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가 뭘 양분 삼아 자라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면 왜 그렇게 망고가 달고 맛있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천천히 둘러보고 나오세요.”


깜풍 클린 모스크. 중국풍 첨탑이 보인다.

사원에 들어서자 손과 발을 씻는 곳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안쪽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원은 유리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고 밖으로 중국풍의 6층 석탑이 보였다. 밖에서 예상한 것보다 화려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이드의 말대로 거대한 망고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묘지였다. 가이드, 이 짓궂은 사람 같으니라고.


유럽으로 수출하는 향신료를 운반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유럽인이 아닌 이슬람인이었다. 어느 순간 말라카 지배층은 이슬람 공동체의 형제애 의식을 이용하면 이슬람 상인들과의 거래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슬람 상인들과 거래가 쉬워진다는 것은 자신들이 부를 축적하기 용이해진다는 의미였다. 힌두교를 믿던 말라카 왕국의 지배층은 왕부터 시작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말라카의 이슬람화는 통치자에서 백성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하향식으로 진행되었다.


15세가 전성기의 말라카를 상상해 본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인종이 이 길을 지나다녔을 것이다. 상층부는 이슬람을 믿었지만 백성 깊숙한 곳까지 그 믿음이 전해지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을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나라의 이념으로 채택했지만 민간에서 믿는 불교를 모두 없애지는 못했다. 아마 이곳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슬람 신도와 결혼하려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약 100년에 걸친 짧고 화려한 전성기를 지낸 말라카에 포르투갈의 함대가 도착한다. 1511년 말라카의 술탄 마흐무드는 포르투갈의 공격을 피해 조호르로 이동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말라카는 술탄 대신 주지사가 있는 주가 되었다.


포르투갈 다음에는 네덜란드가 그 후에는 영국이 이 땅을 다스렸다. 많은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이곳에서 살아갔다.

스리 모이타야 비나야가르 무리티 사원. 아쉽게 닫혀 있었다.

깜풍 클링 모스크를 나와 조금 걷자 스리 모이타야 비나야가르 무리티 사원(Sri Pyyatha Moorthi Temple)이 나왔다. 힌두 사원은 몇 십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외관이 화려하다. 이 사원 역시 규모는 작지만 화려했다. 말라카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 사원이라고 한다. ‘가네샤’ 신에게 바쳐진 사원이라고 하는데, 가네샤가 최고 인기신인 것이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날은 굳게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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