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키스]가 바라본 역사

우리는 전쟁을 알아야 한다

by 지안

흉측하지 않은 전쟁이란 없지만 현재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은 그 규모와 기간에서 다른 전쟁을 압도한다. ‘내전’이란 ‘국가 주권을 둘러싸고 적어도 2개 이상의 행위자가 경쟁하며 주권의 일부를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시리아 내전’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이 공식에 대입하면 ‘시리아 내에서 적어도 2개 이상의 행위자가 벌이는 전투 내지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상황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11년 내전이 시작될 때는 장기간의 독재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발생한 민주화 운동이 내전으로 격화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 내전은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러시아’가 한 편을 이루고 ‘수니파 아랍 국가와 미국’이 한 편을 먹은 대리전 양상을 보인다. 미국, 러시아에 버금가는 거대국가 중국은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정도면 ‘세계대전’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시리아 지도. 구글 펌


‘시리아’의 공식 명칭은 ‘시리아아랍공화국’이다. 중앙아시아와 중국,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튀르키예,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면적은 18만 제곱킬로미터로 22만인 한반도보다 살짝 작다.


총인구의 90%가 무슬림인데, 그중에서도 수니파가 74% 알라위파를 포함한 시아파, 드루즈파 등 기타 이슬람 종파가 16%, 기독교 종파가 10%를 차지한다. 굳이 수니파나 알라위파, 드루즈파 같은 이슬람 계통까지 알아야 하나 싶겠지만 시리아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단계다.




최근까지 아랍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문제의 기원을 논할 때는 두 남자의 이름이 딸려 나온다. 영국 외교관인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인 ‘조르주 피코’가 그들이다. 37세의 마크 사이크스와 46세의 조르주 피코는 1916년,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이 다스리던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장차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를 두고 비밀 협약을 맺는다.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가 쌍으로 거론되듯 ‘중동 문제’를 말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사이크스.피코 협약’은 이렇게 탄생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 혹은 자신들의 국가 편리와 유용성에 따라 중동의 국경선을 정한다.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죽죽 그었다는 풍문도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한 눈금 안에 들어가는 일은 애교였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가 한 국경선 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 국가를 만들어주겠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민족들에게 입을 씻기도 했다. 어쨌든 신나게 국경을 그은 후 사이좋게 자신들이 다스릴 나라들을 정했다. 중동 민중들의 의견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시간이 흘렀고 지배받던 나라들이 각각 독립을 했다.


그래서 독립 이후 중동 여러 나라에서 터진 혹은 터지고 있는 시아파 – 수니파의 권력 문제에 의한 내전의 씨앗은 이 협정 안에 이미 들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십자군 전쟁 때 명성을 날린 살라딘 장군(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의 후예들인 쿠르드족은 그들의 땅에서 석유가 터지면서 독립의 기회를 잃고 이란, 터키, 시리아, 이라크 네 나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 협정 위에 다른 조약 몇 개가 덧붙여지면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문제도 시작되었다. 중동 비극의 빅뱅은 이 협상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욕먹을 때마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민간 속설에 의하면 마크 사이크스와 조르주 피코는 아직도 살아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속설은 속설인 모양이다.




독립하기 전 시리아를 통치하던 세력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던 수니파 대신 소수파(알라위파와 드루즈파가 그중 많았다고 한다)를 중용했고 시리아군 입대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결국 소수 종파 출신의 사병과 장교들이 시리아 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 비율은 1946년 시리아가 독립한 이후로도 유지되었다.


하피즈 알아사드(위키 펌)

1963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1970년에는 알라위파 출신 장군인 하피즈 알아사드(Hafiz al-Asad)가 군부 내 권력 투쟁에 승리한 후 1971년 대통령으로 취임해 최종 권력을 잡는다.


알아사드 정권은 군부와 보안기구의 핵심 요직과 실권을 가져갔지만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에게도 관료와 군부가 될 기회를 열어준다. 토지 개혁, 교육 같은 수니파를 위한 대중 정책을 펴기도 하고, 상업으로 부를 쌓는 일을 지지했다. 중산층으로 자리 잡은 수니파들은 알아사드 정권과 타협하고 정권지지 세력이 된다.


물론 1982년 시리아 중부 하마(Hama)에서 일어난 이슬람주의 세력의 무장봉기를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고 국민들을 학살(1983년 11월 국제사면위원회는 하마에서 1만에서 2만 5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 하기도 했지만,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비교적 탄탄하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바샤르 알아사드(위키 펌)

하피즈 알아사드의 사망 이후 그의 둘째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승계했다. 1965년생인 바샤르는 다마스쿠스 대학 의대를 졸업한 안과의사 출신으로 1992년부터 영국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권력은 형인 바실이 이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4년 바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1년 반의 서구 생활 경험과 능통한 영어 실력이 있는 젊은 바샤르가 35세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최고 권력자가 된다.


시리아군 헌법 제83조는 대통령의 최소 연령을 40세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독재와 헌법이 맞붙으면 독재가 이긴다. 헌법이야 바꾸라고 있는 것이니까. 바샤르는 최소 연령 규정을 34세로 급히 개정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대통령 자리에 앉는다.


젊고 개방적일 것 같은 리더의 등장에 세계는 새로운 시리아를 만들 것이라고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대내외 기대를 의식한 듯 대통령이 된 바샤르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언론의 자유도 일부 허용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른바 ‘다마스쿠스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던 시기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바로 다음 해인 2001년부터 자신을 반대하는 언론인과 인권운동가들을 체포하고, 비밀경찰과 비상사태법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철권통치자로 돌아온다.




시리아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바샤르는 아버지가 대중적 지지를 동원하던 수단으로 삼았던 복지 혜택과 공공부문 고용을 줄인다. 해외자본, 특히 걸프 자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제를 개방하는 한편 국영 기업을 민영화, 금융 부문 개방등을 시행한다. 어디서 많이 본 구도다. IMF직후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결과도 비슷했을 것이다. 국민의 생활고가 가중되는 결과 말이다.


IMF 직후 혜택이 재벌과 투기 자본에게 몰렸던 것처럼 시리아의 경제 개방과 자유화의 단물은 바샤르주위의 소수 경제인들에게 돌아갔다. 2004년 기준 시리아의 빈곤율을 30%에 달했으며 농촌 빈곤율은 60%에 육박한 반면 소득 상위 5%가 시리아 전체 부의 50%를 차지하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2011년 3월 6일 길거리 낙서 하나로 청소년들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죽은 일이 벌어진다. 참는 데도 한도는 있었다. 시위가 시작된다. 분노한 시위는 정권에 가장 큰 불만을 품고 있던 동부 농촌 지역과 시방 소도시, 대도시의 교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시위대에 대한 무력 진압이 심해지자 시민들이 무기를 들기 시작한다. 이들은 정부군에서 이탈한 병사들과 함께 자유시리아군(Free Syrian Army)을 결성한다. 2012년 11월에는 카타르 도하에서 여러 반정부 세력이 모여 ‘시리아국민연합(NCS : National Coalition for Syrian Revolutionary and Opposition Forces)을 구성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NCS는 걸프 국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제 사회에서 시리아의 합법적 과도정부로 인정받게 된다. 이제 바샤르 정부를 끌어내리기만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국제 사회도 시리아의 반정부군에 힘을 싣는다. 2011년 5월 유럽연합(EU)은 대 시리아 제재를 발표한다. 8월에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서방에서 바샤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다. 9월 EU는 시리아산 석유에 금수조치를 내린다. 하지만 막상 UN안보리에서 시리아 제재 결의안을 꺼내 들자 러시아와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한다. 시리아 내전이 자국민들의 싸움을 넘어 강대국의 대리전이 되는 순간이었다.




러시아에게 있어 시리아는 중동과 지중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였다. 이미 1971년부터 러시아는 시리아 서부 지중해안에 있는 타르투스(Tartus)항에 러시아 해군기지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시리아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매년 50억 달러 이상의 무기를 구입하고 있는 큰손이었다. 러시아에게 있어 바샤르 정부는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2015년 한창 밀리던 정부군은 러시아에 군사 개입을 요청한다.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군은 수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반정부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악명 높은 민간인 살해와 병원 공격도 풍문처럼 떠돈다.


중국은 시리아 국민의 자주적인 선택을 존중하고 외부의 무력개입을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득실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수니파 이슬람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은 내전 초기부터 반정부 군을 지지했으며, 시아파 이슬람 국가인 이란과 이라크, 레바논 헤즈볼라는 정부군을 지원했다. 이건 이슬람의 계통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지도부도 없이 오합지졸처럼 보이던 반정부군은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지원을 받아 자동 소총 외에도 유탄발사기, 대전차포까지 입수하며 제법 군대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2013년 3월이 되자 반정부군은 시리아 영토의 약 60% 정도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바샤르 대통령의 측근들이 테러로 사망하거나 망명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제 바샤르 대통령의 권력은 곧 꺼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앙권력이 없는 곳에 다양한 종류의 조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슬람 무장조직인 IS(Islamic State)는 이 혼란에 뛰어들어 2013년 조직명을 ISIS(Islamic State of Iraq ans Syria)로 바꾸고 칼리프 국가 설립을 선언하고 시리아의 도시 라까(Raqqa)를 수도로 선포한다. 엉망진창이 된다.


시리아국가위원회 내부의 분열로 이슬람 성향의 조직들이 떨어져 나와 이슬람전선(Islam Front)을 구성한다. 2013년 12월에는 시리아와 터키 접경 지역의 자유시리아군(FSA) 기지를 공격해 점령한다. 자신들의 코 앞에서 총알이 날아다니자 쿠르드족도 자체적으로 무장을 시작하다. 이들은 정부군과 반정부군을 가리지 않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총구를 겨눴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한때 크게 밀렸던 정부군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이란과 헤즈볼라, 이라크 시아파 무장조직, 러시아의 병력, 자금, 물자 지원이 밀려들었다. 정부군은 2016년 알레포(Aleppo), 2017년 라까(Raqqa)와 팔미라(Palmyra) 등 주요 도시 대부분을 탈환한다. 2018년 기준 시리아 내에서 활동하는 해외 시아파 무장 조직의 규모는 2만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라지자 그동안 반정부군을 지지했던 인근 아랍국가들도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2018년 아랍에미리트(UAE)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다시 대사관을 열었다. 바샤르 정부를 인정한 것이다. 2021년 자신감이 붙은 바샤르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95.1%의 득표율로 압도적으로 승리해 4 연임을 확정했다. 현재 정부군은 시리아 국토의 대부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5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도 시리아에 대사관을 다시 설치하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결정했다. 이집트, 이라크, 리비아, 오만 등 각국 정치인들의 시리아 방문도 잇따르고 있다.


뭔가 정상화가 되는 느낌인가? 정말 그럴까?



2021년까지 시리아 정부군의 탈환 지역이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알 자지라 펌)

시리아에서는 2011년부터 2022까지 약 30만 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시리아 전체 인구의 약 1.5%에 달한다.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전쟁 감시기관인 시리아 인권 관측소는 이보다 두 배 많은 61만 명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국민의 3%가 사망한 것이다.


세계 식량 계획에 따르면 시리아 경제는 현재 인구의 90%가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고 추산한다. 2023년 2월 시리아 북서부를 황폐화시킨 지진 이전에도 유엔은 1460만 명의 시리아인에게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며 690만 명이 국내 실향민이고 540만 이상의 시리아 난민이 인근 국가에서 떠돌고 있는 상태라고 발표했다. 시리아 정부는 아직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진 피해지역의 구조를 방관하고 있다.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곧 내전은 끝날 지도 모른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하지만 시리아에서의 숱한 죽음들은 무엇을 위한 희생이고 죽음이었을까?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모든 나라는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시리아 내전을 바라보면 극명하게 깨닫게 된다. 이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하딜과 아메드, 유세프와 바나에게 미래가 있긴 했던 것일까? 그들에게 안정을, 평화를, 삶을 염원한다.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를 쓴 토머스 프리드먼은 1982년 2월 시리아 중부의 도시 하마가 정부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두 달 후 그곳을 취재하러 간다. 프리드먼은 5월이 되어 기자를 제외한 민간인들에게 도시가 개방될 때까지도 청소가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시리아 국민들이 하마의 참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곳의 침묵을 가까이서 경험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따져보기 원했던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노인과의 대화를 적어 놓았다. 옮겨보면 이렇다.


“여기 원래 있던 집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우리는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물었다.
“발아래 있소.”
노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죠?”
내가 물었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도 발아래 있을 거요.”
노인은 중얼거리듯 말하고 나서 다시 발을 끌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p125)



<참고문헌>

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2015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토머스 프리드먼 지음, 이건식 옮김, 21세기북스, 2010.

더 넓은 세계사, 이희수 외 지음, 도서출판 삼인, 2022

아랍 민주주의, 어디로 가나, 명지대학교 중동문제 연구소 기획,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3


<참고 기사>

Twelve years on from the beginning of Syria’s war, Aljazeera, 2023.3.15

시리아 내전 10년, 알아사드 정권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Asian Regional Review vol.5 no.4, 2022


<참고논문>

시리아 내전의 장기화 요인, 박승규.김은비, 국방연구 제65권 제1호, 2022년 3월

이슬람국가 현상과 새로운 양상의 국제안보 위협에 관한 연구, 박찬기, 한국중동학회논총 제 38권 제3호, 2018년 2월.

시리아 내전 장기화 원인 분석, 김한지, 한국중동학회논총 제 34권 제4호, 2014년 2월

러시아의 개입과 시리아의 정권 생존, 서정민, 중동연구 제 41권 3호,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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