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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un 09. 2024

새로운 시대는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 사이먼 스톤 연출 <벚꽃동산>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가 쓴 원작 <벚꽃동산>은 1904년 초연됐다. 1904년의 러시아는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기였다. 아직은 왕이 명령을 내리고, 귀족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당연하게 누리던 시기였다. 권력과 부를 태어나면서부터 물려받은 이 금수저들에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만만하고 아름다웠을까. 찬란한 벚꽃 잎이 흩날리는 봄날의 밤처럼 화려하게 느껴지진 않았을까?


러시아의 귀족들은 1905년, 그리고 1917년 혁명을 거치며 몰락한다. 권력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면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어떨까? 옥스포트 영어 사전에는 ‘오빠(oppa)’, ‘대박(daebak)’같은 한국어에서 기원한 단어들이 등재되어 있다. 즉 한국에서 통용되던 단어가 그 뜻 그대로 영어권까지 세력을 넓혀간 것이다. 문제는 ‘누나’, ‘불고기’, ‘먹방’ 같은 단어만이 아니라 ‘갑질(gapjil)’, ‘재벌(chaebol)’같은 단어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한국인 누구나 ‘재벌’이 주는 어감을 알고 있다. 엄청난 경제적인 권력과 부를 소유하고 있지만 철저히 가족으로 승계되며 그들끼리의 네트워크와 혼맥으로 묶여 있는 집단. 어쩌면 그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진정한 귀족이며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적어도 이 연극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무대에는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집이 서 있다. 단순하고 현대적이다. 재벌가의 딸인 송도영이 16살 생일 선물로 아버지에게 받았다는, 일본인 유명 건축가가 설계해서 어딘가 잡지에도 이름이 났다는 집 치고는 크기가 작지만, 연극 무대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밖에서 집을 바라보는 송도영의 모습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이제 막 그곳으로 돌아온 참이다. 안톤 체호프 원작 속 귀족 여인 ‘라네프스카야’가 벚꽃 동산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듯 이 연극 또한 송도영의 귀환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국 현대사 중 재벌가의 성장이 그랬듯 송도영의 조부와 부친은 권력과 유착해 부를 일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특별히 기업 경영에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자식들에게 회사가 넘겨졌다.


이렇게 송도영의 오빠 송재영은 무능하지만 기업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도영은 오빠 송재영만큼도 회사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이런 도영에게 경제적인 것은 문제가 아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풍족했기 때문이다. 그 경제적 원천이 되는 기업에 문제가 생겼다고 아무리 말을 해봤자 들리지 않는다. 당연하게 주어지던 것에 어떤 책임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도영의 문제는 자신의 불행이다. 돈은 세습받을 수 있었지만 운은 그럴 수 없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그보다 한걸음 나가면 다소곳하게 기다리던 불행이 팔짱을 낀다. 진정한 사랑 같은 걸 원하지 않으면 되지만 도영은 그럴 수 없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 대신 돌봄을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인 도영은 언제나 사랑을 찾는다. 희망한다. 갈망한다. 그렇게 인생 내내 불행과 팔짱을 낀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도영이 집으로 돌아와서 듣게 되는 건 기업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때 이 가문의 운전기사였던 아버지를 둔, 그래서 이 대저택의 귀퉁이에 살았던 황두식은 이제 성공한 기업가가 되어 도영을 돕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살아날 수 있는 솔깃한 대안을 제시한다. 두식의 이야기를 믿으면 된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벚꽃 동산에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집의 내부는 일층의 주방을 갖춘 거실과 이층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대한 저택의 일부라고 인정해 주면 될 일이다. 눈에 띄는 것은 집 외부부터 지붕까지 연결된 계단이다. 배우들은 그 공간을 이동하며 연기를 펼친다. 무릎을 칠 정도로 탁월한 구조다.


송도영 역의 전도연 배우나 황두식 역의 박해수 배우의 연기에 대해 굳이 덧붙일 말은 없다. 엄지 손가락이 두 개인 것이 아까울 뿐이다. 나를 집중하게 만든 것은 송재영 역의 손상규 배우였다. 불꽃이 튀는 두 배우 사이에서 차분하게 중심을 잡아줬다. 변동림 역의 남윤호 배우는 그 긴 독백을 어떻게 암기했는지 모를 일이다. 박수를 보낸다. 변동림이 집 밖에서 귀족들에게 사회의 부조리에 관해, 정의와 분배의 문제에 대해 긴 대사를 늘어놓는 사이 집 안에서는 가정부 정두나가 그들 모두를 위해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한 장면에 연출한 사이먼 스톤(Simon Stone)에게 박수를 보낸다.




안톤 체호프 원작의 희곡은 진중하고 아름답다. 한 시대가 가는 것에 대한 회한 같은 것도 조금은 남아 있다. 그렇다고 안톤 체호프이 과거의 질서를 그리워했다는 뜻은 아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도착하는 모습을 차분한 어조로 그려냈다는 말이다. 그에 비해 이 작품은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시대의 전환을 말한다. ‘콩가루 집안’ 같은 과거의 시대가 지나가고 황두식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질서가 도착했음을 알리지만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그렇게 편안하고 안락한 모습은 아니다.


진중한 연극을 생각했다면 맞지만, 나름의 유머 코드가 많이 숨겨져 있는 작품이다. 객석 여기저기서 쉴 틈 없이 웃음이 터진다. 배두들의 힘이기도 하고 대본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다만 많은 배우들이 함께 등장하는 씬이 많은 탓이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음성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처음엔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물론 어떤 배우의 목소리는 마이크 따위 무시하고 엄청난 성량으로 뿜어져 나오기는 하지만.


150분의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한 번쯤 다시 봐도 좋은 벚꽃 동산은 7월 7일까지 엘지아트센터 시그니처 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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