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정원과 집을 두르고 있는 불들을 모두 껐다. 1층의 불까지 다 끄고 나니 그제야 1층 거실에서도 아래가 내려다 보였다. 높은 빌딩을 밝히는 불빛들, 낮은 곳에 반짝이는 불들은 따뜻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두운 주방에서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와인을 한 병 골랐다. 뭘 골라도 비싸고 좋은 술일 것이다. 응접실에 앉아 스탠드 불에 의지한 채 와인을 마셨다. 이 집은 어떤 종류의 열쇠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은 와인을 절반 정도 비운 후였다. 홈 바의 냉장고를 뒤져 틸지트 치즈를 찾아냈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내친김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을까 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내일의 일이 또 기다리고 있다. 주위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어둠 속에서 현관 옆의 경비 패널 불빛을 확인했다. 2층의 창문까지 모두 닫혀 있고, 경비 패널들도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지현은 침대에 누웠다.
왜 굳이 집일까, 지현은 생각했다. 높은 천장과 잘 가꿔진 응접실, 책이 가득한 방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사진조차 제대로 남겨놓지 않았다. 할머니가 사용했다는 방에서 예전 사진 몇 장을 찾아내긴 했지만, 공식석상에서 찍힌 사진들에선 개인적인 매력이나 비밀을 느끼기 힘들었다.
“왜 굳이 여기 있어야 하는 걸까.”
지현은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해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와 아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했었다. 엄마와 아빠의 책장에서 엄마가 번역하다 만 ‘성화몽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엄청나게 끌어안은 채 이 집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결혼사진도, 심지어 가족사진 한 장도 찾을 수가 없었다. 와인 반 변과 따뜻한 공기, 적당한 무게의 이불 사이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현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현이 잠에서 깬 것은 어떤 느낌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느낌’은 나중에 떠올린 것이다. 저 적확한 표현을 쓰자면 지현은 불현듯 잠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이곳이 한국이며, 할아버지의 집에 혼자 누워 있다는 자각을 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커튼 틈새로 보이는 바깥 풍경으로 추측하자면 아직 한 밤중이었다. 아직 소화되지 못한 와인 향이 느껴졌다. 지현은 자세를 고쳐 누우며 잠을 청했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신경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날카롭고 선명하고 생생해졌다. 다시 한번 몸을 뒤척였을 때 그 ‘소리’를 들었다.
지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소리’가 들렸다. 종소리. 멀리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지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오전 2시를 10분에서 11분으로 넘어가는 찰나였다. 지현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어떤 상황인지 생각을 집중했다. 종소리와 함께 오르간 소리가 섞였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소음이 아니다. 인위적인 어떤 것이다. 누군가, 지현이 아닌 누군가가 집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현은 침대를 빠져나와 문에 귀를 댔다. 종소리와 오르간이 연주되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말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다시 보니 문 아래로 환한 빛도 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적어도 도둑은 아닐 것이다. 보안시스템을 해체하고 집에 들어와 음악을 틀어놓고 웅성거리는 도둑은 없다. 그렇다면 뭐지?
지현은 문 손잡이를 붙들고 고민했다. 이 집의 보안 시스템을 아는 누군가가 이 집이 빈 집이라고 확신하고 들어와 파티라도 여는 것인가? 하지만 보안 시스템의 번호는 최근 지현의 손으로 직접 바꿨다. 번호를 아는 것은 지현과 최여사뿐이다. 새로운 느낌에 고개를 드니 창문 밖에서도 환한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으로 뛰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불이 다 들어와 있었다. 데크 위에는 테이블이 길게 늘어서 있고 위에는 음식을 놓은 접시들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연못 옆으로는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황급히 일어선 것처럼 의자들은 조금씩 틀어져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지현은 방을 휘휘 둘렀지만 손에 들만한 것은 없었다. 이렇게 모른 척 방에 계속 있는 것이 나을까 생각했지만, 누군가 습격하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습격하는 편이 낫다.
지현은 문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고 문을 열었다. 오래된 문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나서 순간 얼어붙었지만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예상한 것처럼 복도 저 쪽은 환했다. 천천히 2층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종소리의 근원이 떠올랐다. 파보 예르비의 <Cantus in Memoriam Benjamin Britten>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 쪽으로 나 있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슬쩍 중앙 난간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난간 아래 1층 거실은 살짝 어두웠다. 오히려 정원 쪽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거실 쪽까지 들어와 있었다. 음악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렸고 웅성대는 소리 또한 커졌다. 다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이따금 잔이 부딪히는 소리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었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도, 걸어 다니는 소리도, 카트를 미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밝고, 환하고, 음악이 있었다. 다만 난방은 안되어 있는 듯 면으로 된 지현의 잠옷 사이로 냉기가 엄습했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정원으로 향한 유리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실에도 정원에도 사람은 없었다. 다만 소리는 계속 한 방향에서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방이었다. 마침내 계단 아래 1층에 도착했을 때 지현은 할아버지 방 문을 열어 봐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고민에 빠졌다. 분명 어떤 종류의 소리와 음악이 그곳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정원에서 모임을 마친 손님들이 한가롭게 방에 모여서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지현이 할아버지 방 쪽으로 한걸음 내디뎠을 때 응접실 저 쪽에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지현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이 집이라면 이 상황을 편하게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음식을 먹고 필요하거나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다. 누군가를 낚아챌 무기를 등 뒤에 숨긴 채 웃으며 잔을 들거나 모두 함께 무겁고 어두운 선택을 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환한 정원의 불빛 아래 좋은 음식과 멋진 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그 내용은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결심을 했던 것일까? 한 손으로는 아들의 무고를 확신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있지도 않은 아들의 범죄를 까발리는 기사를 쓸 결심을? 한편으로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즐거움의 건배를 했던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지현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지만 용케 응접실 소파 위였다. 저 문 안에는 뭐가 있을까? 저 문 안에서 그들은 무엇을 협의하고 의논했을까. 지현의 속에서 분노가 서서히 차 올랐다. 아빠는 무고한 일로 고문을 당하고 돌아가셨다. 엄마는 그렇게 만든 나라를 두려워하며 먼 곳에서 나를 키웠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는 할아버지는 어쩌면 자신의 영위를 위해, 이 커다란 집을 위해 아들과 며느리를 사지로 내몰았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졌다. 지현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