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자정이 다 되어 서방님이 집에 돌아오셨다. 어제도 숙직이라 집현전에서 밤을 새워서 오늘은 일찍 들어오시려나 했는데 평소보다도 더 늦게 들어오신 것이다. 국수나 한 사발 먹고 싶으시다는 말에 급하게 국물을 내고 국수를 삶았다.
“내 오늘 직제학을 다시 보았소.”
피곤한 중에도 기분이 좋으신지 한결 들뜬 목소리로 서방님이 말씀하셨다.
“내 여지껏 직제학께서 임금의 명을 중히 듣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았겠소. 회의를 해도 말씀이 없으시니 눈치를 볼 수밖에. 그런데 오늘 그분이 임금이 내린 글자들로 시를 지어 올리지 않았겠소.”
“벌써 쓰임까지 생각하신 게로군요.”
“그렇소이다. 직제학께서 말씀하시길, 여식이 셋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 이 글자를 가리키니 며칠 만에 뜻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소. 임금의 명이 중하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는데, 여식들에게 글을 가르쳐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며 임금께 머리를 조아리셨소.”
“양반의 여식들뿐이겠습니까. 저잣거리의 백성들도 말을 옮길 수 있게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글을 알게 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는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소. 지혜와 지식을 모든 백성이 알 필요가 무엇이오. 그들이 알 만한 것만 알면 편안하고 안락하지 아니하겠소?”
- 성화몽기 중 일부 발췌>>
지현은 소파 위에서 눈을 떴다. 머리 아래에는 베개가 놓여 있었고, 도톰한 이불이 덮여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잔이 든 쟁반을 들고 최여사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항상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무엇을 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붉은색 빛이 나는 물은 달달하고 새콤했다.
“어제는 와인을 많이 드셨나 봐요. 그래도 여기서 그렇게 이불도 없이 주무시면 안 돼요. 난방을 하긴 하지만 단독주택이라 외풍이 있어요. 감기 걸릴 수 있답니다.”
지현이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향하는 유리문으로 달려갔다. 밖은 고요했다. 잘 정리된 잔디와 풀, 말라버린 연못과 빈 데크만 보였다.
“왜 무슨 일이 있나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최여사가 물았다. 지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젯밤 본 것이 진짜인지, 최여사의 말처럼 와인을 마시다 잠들어 꿈을 꾼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언제 오셨어요?”
“한 시간 정도 됐을 겁니다. 어제 정원 정리를 끝냈다고 해서 확인할 겸 들렀어요. 아가씨가 응접실에서 계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급하게 이불이라도 덮어 드리긴 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침을 준비할까요?”
확신이 서지 않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서 지현은 샤워를 핑계로 일어섰다. 지현의 방 침대는 아무도 눕지 않았던 듯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창 밖으로는 1층에서 봤던 것과 같은 조용한 정원이 보였다.
샤워를 마치고 내려와 핸드폰을 찾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사진이라도 찍었어야 했는데 쯧쯧, 속으로 혀를 차며 지현은 핸드폰 전원을 켰다. 배터리의 마지막 조각이 깜박이다 이내 꺼져 버렸다.
“혹시 아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으세요?”
나갈 준비를 하는 최여사에게 갓 내린 커피를 내밀며 지현은 물었다. 두 사람은 찻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커피 향이 좋네요. 가만있어보자, 도련님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제가 1983년인가 84년부터 일을 했어요. 도련님을 오며 가며 보긴 했지만 워낙 말수가 많은 분이 아니셔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할 일은 없었지요.”
최여사가 지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오히려 작은 사모님 쪽이 더 기억이 많죠. 도련님이 지방에 계실 때도 작은 사모님은 여기 계셨으니까요.”
“두 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글쎄요, 좋은 분들이셨죠.”
지현은 문득 고개를 들어 최여사를 바라보았다. 자식인 지현이 묻는 질문에 무슨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지현은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다.
“아빠가 광주에 있다 서울로 왔을 때 할아버지는 뭐라고 했나요?”
최여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말을 고르듯 고개를 돌리고 한참을 있다 대답했다.
“전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본 대로 말씀드릴게요. 그때 도련님은 화를 내셨어요.”
“아빠가요? 할아버지가 화를 낸 것이 아니고요?”
최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관님은 도련님이 화를 내는 것을 꾹 참고 들으셨어요. 2층 장관님 서재에서 지르는 소리가 식당까지 들릴 정도였어요. 그때는 사모님도 거길 들어가지도 못하시고 응접실에서 서성거리기만 하셨죠. 아마 장관님이 직접 광주로 내려가서 감옥에 있던 도련님을 모시고 왔던 그날 일 거예요. 도련님 얼굴이 꽤 상해 있었는데 화를 내는 기세로 봐서는 많이 다친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그래요.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요?”
“학생들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비겁하다고 부끄럽지 않냐고 소리를 지르셨죠. 전 무슨 얘기인지 모르지만 워낙 목청이 크셨어야죠. 나중에 장관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부끄러운 줄은 알지만 살아남아야 할 때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사람이 모두 시대를 거스르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모든 기둥이 부러져 버리면 집은 무너지는 거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도련님이 막 우셨던 것도 같아요.”
“독일로 가는 건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 아세요?”
“그때도 큰 소리가 났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이번엔 작은 사모님이 계셨거든요.”
“엄마가요?”
최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갓 결혼한 새신부인 데요. 도련님을 붙들고 아버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며 펑펑 울었어요. 이틀인가 만에 도련님이 두 손 드셨죠. 그다음에 출국까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어요.”
“일주일”
“한 달인가 후에 경찰이 왔었어요. 도련님 방을 압수수색 해야 한다며 영장까지 받아왔죠. 장관님은 독일로 쫓아가려면 쫓아가 물어보라고 벼락같이 화를 내셨어요. 아들 내외 짐도 다 같이 갔으니 거길 가서 알아보라고. 경찰도 그냥 물러나진 않았어요. 영장이 있다며 집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죠. 하지만 못 찾았어요. 결국 그냥 돌아갔죠.”
“그럼 엄마 아빠의 짐은 아직 이 집에 있는 거네요?”
최여사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지만 이 집에서 나간 물건은 없답니다. 이제 가 볼게요.”
“잠깐만요, 여사님. 도대체 할아버지는 왜 제가 이 집에 들어와 살기를 바라셨던 거죠?”
“제가 살아보니까요, 아가씨.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답니다. 말로 전하면 의미가 달라져 버리는 그런 것들이 있어요. 직접 보고 겪고 느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요. 그렇잖아요? 제가 지금 아가씨께 제 다리가 아프다고 아무리 설명한들 아가씨는 알 수 없어요. 저만큼 늙고 약해져 셔 무릎이 정말 아파야 비슷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죠. 그때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비슷하게 짐작을 할 뿐이죠.”
말을 끊고 최여사는 집 안을 한번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전하고 싶은 것들이 바로 이 집 안에 있을 겁니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요. 그걸 아가씨가 찾길 원하신 거예요. 언젠가 장관님이 독일로 가신 적이 있어요. 아가씨를 봤다고 하더군요. 똑똑하고 당찬 아이라며 몹시 흡족해하셨어요. 이제 아가씨가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드릴 차례예요.”
멍하게 앉아 있는 지현을 두고 최여사가 목례를 한 후 걸음을 옮겼다. 지현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사님, 바래다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택시를 불렀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가볍게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멀어지더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