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로스 Jan 11. 2019

뒤늦은 고백

와이프에게 얼마 전 고백한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첫사랑이 생각보다 가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출근하는 길에 지나치는 지하철역 바로 앞에, 친구들이랑 종종 놀러 가는 곳 근처에 살고 있다고 말이다.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말하긴 했지만 다행히 무심하게 넘어갔다.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처음엔 문자를 열심히 하며 하루를 보냈고 저녁엔 드문드문 통화도 했으며 몇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얼굴 보고 대화도 해봤다. 나는 남고를 다녀서 여자인 친구를 제대로 만들어본 게 처음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푹 빠지며 열정을 다해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마음이 물들어 갔다.


미리 말하지만 철저하게 짝사랑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녀가 좋았지만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기에 감동을 주는 방법도 몰랐고, 결정적으로 그녀를 찾아가서 맛있는 밥을 사주기엔 가난했다.


그때가 마침 우리 집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 난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면서 부모님에게 돈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의 오래되고 착한 친구들이야 내 지갑엔 먼지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그 당시 나에겐 돈 내라는 말도 안 했고 그걸 불만으로 표출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밥과 커피 한 잔을 제대로 사줄 수 없는 것도 현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가 스스로에게 장담한 약속이다. 무리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평생 고생하면서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말이다. 웃긴 건 만날 약속이 잡히자마자 어떻게 하루를 보낼 건지 계획을 세웠고, 한 순간의 고민도 없이 친구에게 돈을 빌릴 생각을 했다.


평소에 나는 약속은 무조건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친구들에게 신용도가 높았던 나는 친구에게 돈을 쉽게 빌렸다. 무려 5만 원을 말이다. 그 당시 학교 후문 분식집에 내가 좋아하던 꼬치 돈가스가 300원이었지.


얼마 후에 그 여자애를 만나게 됐다. 나는 내가 입을 수 있는 가장 깔끔한 옷을 챙겨 입고 당당하게 나갔다. 아버지 옷 중에서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상 옷이 꽤 많다. 문제는 대부분 세미 힙합 스타일이란 거지만. 그중에 가장 얌전한 걸로 골라서 입었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내 입장에선 먼저 말 거는 것도 참 어려웠고 그 애가 나에게 뭔가를 물어보면 조심스럽게 대답하기 바빴다. 그런데 말이 자꾸 꼬이고 불필요한 말을 더 하게 됐다. 나보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고 되물어 보기도 할 정도였으니. 점점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위축되어서 그랬었지만.


그 여자애는 착하긴 했지만 나름 까다롭고 예민한 면이 있어서 말을 쉽게 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반응해주는 게 참 좋았지만, 그 점 때문에 나는 점점 더 말을 아끼게 됐다. 나중엔 내가 너무 말을 안 하고 질문에 대한 대답만 하니까 나보고 할 말 없냐고 물어봤던 기억도 난다.


순식간에 시간은 지나갔고, 만났던 자리에서 그대로 헤어졌다. 음식은 내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먼저 계산을 했다. 그녀도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아서 자기가 계산하자고 하더라. 나는 짤막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지켜봤는 데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부지런히 가는 모습에 많이 서운하고 아쉬웠다.


그녀의 모습이 지하철역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챙겨 온 오 만원을 꺼냈다. 만나기 전까지 혹시나 잊어버릴까 봐 주머니에 꼭 쥐고 있던 바람에 잔뜩 구겨져서 할머니가 가끔 주시던 용돈이 생각났다. 피식 웃음이 나왔고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그게 성인이 되기 전까지 둘이 따로 만난 유일한 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튕기는 나란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