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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Jun 23. 2017

상식과 부조리

다른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기


알베르트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과 마주할 때 생겨난다고… 호소는 인간들의 희망이고 세계의 침묵은 인간의 희망을 가로막는 모든 비합리다. 이렇게 생긴 부조리로 인해 인간은 좌절한다. 하지만 카뮈는 우리가 인간의 호소뿐만 아니라 세상의 비합리와 부조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삶을 통찰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것의 시작은 세상이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삶 역시 그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보는 순간, 내가 읽던 책은 나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문학이라기보다는 실용서다.”

세상에 부조리와 불합리가 상존한다는 것만큼 실용적인 깨달음이 또 있겠는가...


오래전 주식으로 유명했던 한 의사는 ‘자기혁명’이라는 책의 서두에서 세상이 모순과 거짓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자기 혁명의 시작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처음 그 책을 읽을 때에는 아직 사회에 발을 들인 지 몇 년(몇 달도 아니고...)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저게 무슨 오버스러운 이야기 인가’하면서 흘려들었는데… 요즘은, 그 글귀를 다시 읽으면 (여전히 오버스럽다고 느끼긴 하지만) 그 당시와는 다른 무게가 느껴진다. 하긴 생에 처음 카뮈의 책을 읽었을 때에는 책의 줄거리 조차 이해를 못했다. 삶은 인과에 따라 논리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흘러가는 줄로만 알았던 ‘어린 머리’의 그 시절에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어린 시절 '상식에 기반한' 세상을 가정하면서 살게 된다. 많은 사람이 두루 아는 상식이 - 교과서에 담긴 지식이, 주의의 어른들이, 혹은 신문에서 알려주는 상식으로 구성되어있는 세상. 절대 선처럼 받들여졌던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성공하는 삶’을 향해 가는 동안 한 번도 의심해 보지 못하는 그 상식…



경쟁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신념

그렇게 얻는 안정이 쾌적한 삶으로 나를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

근면함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신뢰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

세상은 나만큼이나 남을 배려할 것이라는 안심



사실 상식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종의 '조정 값'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정교하게 튜닝된 사람들의 사회에 살고 있다. 그 사회 속에서 아이들은 착실하게 커간다. 사회를 수용하는 능력은 어릴수록 더 뛰어나다. 그렇게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상식을 자연스레 습득하였다. 간혹 문제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아이들이 등장할 때면 대부분은 지적하는 쪽의 편에서 '문제아들'을 본다. 그들이 부조리한 세상에 막혀 절규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아이들이 철이 안 들어서, 멋대로여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사실 시기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그런 좌절은 누구나 다 겪는다. 단지 그것을 겪는 테두리가 학교인지, 가정인지, 사회 혹은 직장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 즉, 누구나 문제를 겪음에도 언제나 상식의 편에 서있다고 착각한다. 인생을 통해 많은 부조리와 불합리를 겪지만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상식의 편에 서서 그 일련의 좌절에 이유를 부여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사춘기는 부조리와 상식의 혼돈에서 나타나는 면역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그 부조리에 더 노출되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트랙에서 뛰쳐나온 이들을 잘 달래서 트랙 위에 돌려보낼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부조리와 상식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내가 다시 트랙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다른 트랙에 설지, 혹은 거꾸로 그 트랙을 거슬러 올라갈지는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뒤늦게 세상은 아직 혼돈 그 자체이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한하여)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세상에 대한 관점은 바뀌기 시작했다.


협동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텐데.

안정은 나의 '정신 보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면함은 호구로 가는 지름길은 아닐까?

늘 능력에 따른 보상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타인에게 매정한 사람도, 무관심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세상이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은 미래를 낙관하게끔 하는 부작용을 갖고 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내린 합리적인 결정이 이후에 좋은 결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반대로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세상을 비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서를 정제하는 효과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막연한 낙관은 걸러지고, 긍정적인 생각은 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덤으로 세상에 대한 다른 시선도 갖게 된다.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의심해보게 된다. 


니콜라스 나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이나 안티 프레질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절대적 진리라 생각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반증 가능하고 그 가설이 무너졌을 때의 파급력은 일상을 뒤집어 놓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현실을 기존 상식이 아닌 다른 가능성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삶은 더 회복력 있게 변화할 수 있다. 여기서 회복력이란 삶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빠질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얻어질 수 있다. 니콜라스 나심 탈레브는 이를 '안티프레질(튼튼한, 잘 깨지지 않는)'이라고 불렀다.


니콜라스 나심 탈레브. 조직폭력배나 권투 선수가 아니다. 철학자다.


내가 지금 받는 월급은 언제든 끊어질 수 있다. 어쩌면 다음 달부터...

매일 변함없이 건강할 것 같은 내 몸도 언젠가는 아플 수 있다.

지금 회사에서 받는 인정도 사실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기존에 해보지 않은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안티프래질 한 삶을 구축할 수 있다.



회의론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나친 낙관을 버리고 현실적인 시각을 갖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삶을 비루하다고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아주 많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블랙스완에 나온 예를 들면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통계적으로 무단 횡단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를 당하는 것보다 많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횡단 사고에서 사망자가 발생할 비율은 녹색 등일 때 신호등을 건너는 경우에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발생할 많은 변수에 대해서 고려하며 길을 건너지만, 횡단보도를 통해 건너는 사람은 상황을 믿고 안전을 낙관한 상태에서 건너기 때문에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예를 통해 탈레브는 이야기한다. 설령 내가 안전한 상태라 생각이 되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해서 대비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누군가는 횡단보도를 절대 신뢰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이 시스템에 내재된 혼란과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나? 우리는 지금 합리와 상식의 굴레에서 너무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부조리가 가장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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