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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Jan 09. 2022

닥터 스트레인지

 20여 년 전 화이팅과 지화자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듯한 이름을 가진 제약사가 고혈압 환자들을 위한 혈관 확장제를 개발했었다. 제대로 된 성능을 내지 못해 폐기될뻔했던 그 약은 다른 용도로 사랑받게 된다. 전 세계를 강타한 그 약의 인기 때문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병원의 사정은 빠르게 기울었다. 활기가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솟는다는 뜻으로 지어진 그 약의 이름과 대조적으로 대한민국 한의원의 매출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줄기 마냥 추락했다. 철마다 아주머니들이 ‘요즘 들어 부쩍’ 기운이 없는 남편들을 위해 바리바리 싸 갖고 가던 ‘보약’이라 불리던 것들이 1999년 그 약의 등장으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췄다. 초보 개업 한의사였던 아버지도 파란 알약 흉탄을 맞고 그만 쓰러질 뻔했다. 다행히 총명탕이라는 회심의 방어구 덕에 그럭저럭 지금까지 버텨오셨지만…


 정작 아버지의 주 무기는 한약이 아니었다. 한의대 시절, 교수님들 조차 ‘기와 혈’ 따위가 존재하겠느냐는 분위기에도 아버지는 기혈에 매달렸다. ‘한의학 생존의 열쇠는 과학화’라는 기치 아래 혹독하게 과학의 기준을 들이대던 분위기에서도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이런 아버지를 두고 ‘무천도사’라며 조롱했다. 하지만 졸업 즈음에는 침구학에 있어서는 저 친구가 제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 아쉽게도 침구학은 한의학 정규 커리큘럼이 아니었지만 - 개업 즈음에는 실력을 눈여겨본 선배들의 스카우트 제의도 꽤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침의 달인’이라 불리던 원로 선배가 아버지를 불러들였고, 아버지는 자신의 병원을 갖기 전까지 2년에 걸친 힘든 수련을 버텨냈다. 이때 아버지는 스승에게 배운 비기를 어린 나에게 늘 시험해보곤 하셨다. 어린 시절 손등, 귀, 등, 발 할 것 없이 아버지는 얇은 바늘로 나를 찔렀다. 그러시며 중얼중얼 뭔가를 읊으셨는데, 막연히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주문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건강한 것도 그때 아버지가 놓아주신 많은 침들과 주문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다. 진심으로.


 어린 시절부터 침구학과 함께 자라서인지 나는 침술에 대한 두려움도 의구심도 없었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칼에 익숙했던 아이가 세계 최고의 정육사가 되었다는 프랑스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침구학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네이티브 스피커’였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침을 다뤄 중학교 무렵에는 아버지가 몸에 불편함을 느끼면 침을 놓아 드리기도 했다. 모국어처럼 익힌 침을 다루는 것은 몸과 나누는 편한 대화 같았다.


 나는 결국 아버지를 따라 한의예과에 진학을 했다. 가진 재주가 그것밖에 없으니 딱히 떠오로는 대안도 없어 어찌 보면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즈음, 침구학에 있어서는 내가 아버지를 넘어선 것 같기도 했다. 나의 기술은 기와 혈을 조정하는 것을 넘어 조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굳이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기와 혈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건강, 기분을 넘어 성격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침이 없더라도 나는 손 끝만으로도 상대의 기와 혈을 느끼고 조정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들에게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나의 손끝은 나의 눈이자 귀이자, 입이었다.


 졸업 후 나는 아버지의 동업자가 되었다. 이미 강남 학부모 사이에서 총명탕으로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의 주력 사업에 나의 특기를 더해서 사업은 천천히 그 영역을 확장해 나아갔다. ‘작은 원장’으로 불리며 아버지의 진료실 옆에서 조그마한 진료실을 차렸다. 처음엔 주로 몸살 기운으로 어르신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시간이 흘러 나이와 상관없이 관절, 근육통, 주의력이나 우울증 등을 포함한 다양한 증세의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리 병원이 있던 건물에는 부모로부터 일을 물려받은 세명의 또래가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한의사의 길에 들어선 나와 부모의 학원을 물려받아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두 살 위의 자경 누나, 부모로부터 건물을 물려받은 한 살 아래 동생 헌준이 있었다. 12년 전 건물이 지어지고 한의원이 3층에, 보습학원이 4층에 이사를 들어왔다. 강남 일대에서 한의원과 보습학원은 묘한 공생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아버지와 자경의 아버지는 초창기부터 절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개미와 진딧물과 같은 관계라 칭하며 지금도 제법 가까운 관계로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저녁은 꼭 ‘진딧물을 빨러’ 만나시곤 했다. 자경은 학생 때부터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우리 병원에 찾아와 진찰을 받고 돌아가곤 해서 나와 가까운 편이었다. 다 커서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싶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불문학을 전공하던 그녀는 관심사도, 표정도, 옷을 입는 스타일까지도 나랑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한국의 토속 의술을 배우는 나와 먼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는 간극만큼이나 우리 사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딱 한번 데이트 비슷한 것을 했는데, 누나가 보고 싶다던 프랑스 작가의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대사 중간중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는 대사에 나는 술을 먹지 않고도 필름이 끊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고, 연극을 보고 나와 자경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 연극이 일종의 ‘부조리극’이라는 장르라는 설명을 했을 때 내 생전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경험은 없었다는 확신을 했다.


 반면 헌준은 단단한 통나무 같은 친구였다. 어린 시절 운동을 좋아하던 헌준은 공부 걱정 없이 운동만 하며 컸다. 10종 경기라는 생소한 육상 종목을 하던 그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목표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부잣집 도련님 치고는 싹싹하고 쾌활했던 헌준은 임대인과 임차인이라는 금단의 관계를 넘어 제법 친해졌다.


 “형, 그거 알아? 올림픽 10종은 이틀간 열 개의 육상 종목을 치러서 가장 우수한 사람한테 메달을 수여하는 경기야. 여기서 메달을 딴 사람들을 육상 경기의 왕, King of Athlete라는 칭호를 붙여줘. 대단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낮은 인지도의 종목의 타이들이 ‘왕’인 것이 너무나 어색했으며, 자신이 몸담는 종목의 실상을 알면 헌준이 정신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곤 했다. 아무리 열 종목을 두루 마스터한다지만, 어느 것 하나 최고이기는 어려운 종목의 1등이 ‘운동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는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그러던 작년 초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혔다며 기뻐했던 헌준의 인생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옆 나라에서 열리기로 했던 올림픽은 역병이 창궐하자 일 년 정도 뒤로 늦춰졌고, 원래 예정된 올림픽 개최 시기에 맞춰 운동하던 헌준은 컨디션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올림픽을 늦추게 했던 역병을 몸소 겪고 방황하더니 정작 올림픽이 열리는 최근 들어서는 나사가 풀어진 사람처럼 시간만 보내기 시작했다.


 여름이 기승이던 며칠 전 오래간만에 나타난 헌준은 달라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운동의 왕처럼 보였던 그의 다부지고 거대했던 몸은 그냥 거대하기만 한 몸이 되었다. 아니 어느 구석은 살짝 비대해 보이기까지 해서 이 친구가 운동의 왕은 포기하고 마블링의 왕이 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육한 몸과는 대조적으로 눈빛은 아주 공허했는데 동공으로 영혼이 다 빠져나가나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 임대료를 좀 올려 받을까 싶어. 보습학원에는 이미 이야기했어.”


 그는 이제 자경과 나를 공생이 아닌 기생 관계로 보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 기간 동안은 임대료를 낮춰 받는다는 착한 건물주 운동이라는 것을 어딘가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친구는 반대로 임대료를 올려 받으려 한다니. 아마도 그 검은 동공으로 영혼과 함께 주변머리마저 빠져나간 것이 틀림없구나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경 누나는 어떻게 반응했느냐는 내 물음에 무표정하게 그는 대답했다.


 “몰라, 그냥 울던데…?”


 얼마 전, 학원 선생님들을 다 내보내고 국영수를 혼자서 가르치느라 머릿속 뇌 세포가 뒤죽박죽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던 자경이 떠올랐다. 학생수가 줄어서 절박하다던 그녀였다. ‘아이고 우째 그랬을꼬’하며 조용히 헌준의 손목에 내 손끝을 얹고 다독였다.


 “헌준이 너 요즘, 많이 힘들지? 지금 올림픽도 하던데 네가 얼마나 상실감이 들겠냐. 임대료 이야기 전에, 우선 어떻게 지내는지 좀 이야기해봐.”


 그러면서 손 끝으로 그의 머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깊은 공동, 텅 비어버린 내면.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그의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었던 알록달록 다채로웠던 예전의 색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아마도 힘든 운동 잘 버티던 게 아닐까 싶었는데, 역병과 좌절의 시간 끝에 그의 마음은 소름 끼치게 텅 비어만 있었다.


 어차피 병원에 손님도 별로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한 시간가량을 헌준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눴다기보다 그의 막힌 기와 혈을 뚫고 서로 이어가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몸속에 퍼진 기와 혈을 뚫고 이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변하기도, 심지어 기억이 수정되거나 앞으로의 행동 양식을 수정할 수도 있게끔 된다. 언젠가 영화에서 엄마로 등장한 배우가 ‘기억을 지워주는 좋은 혈자리 있는데…’라는 대사를 듣고 시나리오를 쓴 감독은 어떻게 저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놀랐던 적도 있었다. 진짜 존재하는 혈이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대사처럼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해도 그 강도를 낮춰 준다던가 그 기억을 다른 감정과 연결해 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꼬박 한 시간을 작업을 하자 헌준의 얼굴에 혈기가 돌았다.

 “무슨 감정이 느껴지니?”

 “너무 참았던 것 같아요. 내 잘못도 아닌데 코로나 때문에 나는 꿈도 잃고 방황하고 있어요.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데 탓할 사람이 없어요.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된 건데, 그냥 내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결국 내 탓이라는 생각에 자꾸 죽고만 싶습니다.”

 “일의 원인을 찾으면 무얼 하겠어.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걸. 그게 누구의 탓이든, 삶이란 그런 건데 뭘. 우선 마음에 쌓임 감정부터 좀 털자.”


 그렇죠? 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이 예의 눈빛이 아니다. 그래 헌준아 일단 훌훌 털어, 어디 가서 쏟아 놓고 오려무나! 하며 어깨를 치자마자 헌준은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대장간의 노래’를 제법 힘차게 흥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뛰쳐나가듯 문을 열고 나갔다. 이내 외부 창을 통해 강남역 방면으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내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은 걸까? 혹 내가 뭔가 잘못하기라도 했을까 걱정이 됐다. 배터리도 충전이 과하면 불이 난다던데, 저러다 일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 싶다가도 스스로의 운명을 동정하며 저주하는 것 보다야 낫겠다 싶어 걱정을 이내 접었다.


그래 그러려무나.



https://news.v.daum.net/v/20210805094123876?x_trkm=t


※ 상기 기사를 모티브로 쓴 글이며, 해당 기사와 글은 무관합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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