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에티카', 몰락의 표정을 마주 보는 일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에서

by 이정식
나는 늘 몰락하는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이 질문은 본래 윤리학의 질문이 아닌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5-6.


이 문장에 휘청거렸다. 문학이란, 몰락의 에티카, 즉 몰락의 윤리학이라니. 몰락하는 자들에게 어떤 것이 있기에 저자는 그토록 매료된 걸까. 텅 빈 그들을, 저자는 어째서 가득 차다고 말하고, 숭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람 놀리는 건가, 싶은 문장. 물론 우리가 몰락의 당사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실재가 아니라 엄연히 문학이니까 가능한 문장이다. 문학은 삶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생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삶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윤리'가 탄생한다.


저자의 표현에 암시가 되어있듯, 윤리는 도덕과 다르다. 도덕이 근원적이라면, 윤리는 동시대적이다. 도덕이 선-악의 강제적 규율이라면, 윤리는 좋고-나쁨의 상대적 규율이다. 도덕에서 인간은 철저히 도덕의 수동태로 기능하지만, 윤리에서만큼은 인간은 능동태로 존재한다. 윤리에서 인간은 늘 주체다. 주체가 좋아하는 것(대상/가치관)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행위가 '윤리적인 행위'고, 그 행위로 구성된 삶이 '윤리적인 삶'이다.



© Tom Hunter


이렇게 되면, 윤리는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 개별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저마다의 좋음과 저마다의 나쁨. (물론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좋음-나쁨'이라는 건 있어야겠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성립할 수 있다. 나의 윤리는 너의 윤리와 다르다. 너와 나의 다름이 만나면, 둘 중 하나다. 나는(혹은 너는) 너에게(혹은 나에게) 흡수되거나, 충돌하거나. 흡수는 삼키지만, 충돌은 질문을 잉태한다. '너와 나, 누구의 삶이 더 좋은가'. 그러니까, 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문학이 윤리적일 수 있는 이유는 저마다의 작품마다 '너의 윤리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매혹적인 수많은 '다름'이 있다. 내가 문학을 읽는 건, 그 다름의 매혹에 넘어가버렸기 때문이고, 그 다름이 던지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해서다. "너와 나,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다운가." 그중에서도 나는 실패하는 사람의 매혹에 자주 넘어간다.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에 진실할 수 있다. 하나를 향해 자신의 삶을 내던진 그들은 저자가 유려하게 표현한 대로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언제나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고, (타자가 아니라) '주체'다.


(역설적으로, 그러나 당연한 논리적인 결과로) 그들이 실패한다면, 그것 역시 '자의'에서 비롯된다. 뻔히 보이는 몰락의 길로 성큼 걸어 들어가는 자들. 몰락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는 순간, 그 얼굴로 언뜻 스치는 표정을 문학은 포착한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스스로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고,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영호의 절규는 아득했고,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므로 대답할 수 없는 남편에게 '당신이 죽은 이유'를 자꾸 의문하며 남편에게 편지 쓰는 유미코의 표정은 서늘했지만 충만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영호의 표정, 그리고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과 동명인 영화 <환상의 빛>의 유미코의 표정


언제나 나는 그들의 몰락을, 아니 그들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어렴풋했고, 간신히 존재했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그들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매번 간신히 다가갈 따름이다. 선-악의 도덕 논리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그 아득한 깊이. 텅 비었지만 가득 찼고, 처절하지만 고혹적이다. 음화가 선명하므로, 그 표정은 숭고하다. 그 표정은 질문한다. "너와 나, 누구의 삶이 더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가." 나는 역시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마주 볼 수는 있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저 숭고한 그들의 표정을.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몰락을 마주 보는 일이다. 문학이 몰락하는 자의 표정을 담았다면, 독서는 몰락하는 자의 표정을 마주 본다. 독자는 늘 몰락의 목격자다.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며, 독자는 함께 으스러진다. 문학이 우리네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학의 얼굴을 따라간다. 문학이 짓는 표정에 따라, 우리는 간신히 웃음을 터뜨릴 수 있고 따라 울 수 있다. 그 표정이 던지는 질문에 늘 자신 있게, 너와 나의 삶 중 누구의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할 순 없지만, 너의 몰락이 보여준 '삶의 윤리'를 내가 진지하게 내 '삶의 윤리'로 생각해보겠다고 마음먹는다. 저자는 이러한 문학을 "몰락의 에티카"라고 했던가. 나는 이것을 "독서의 에티카"라고 감히 이름 붙인다.




© Tom 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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