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든다

뭐라도 쓰고 싶은 날엔

by roman editor

"베르타는 비웃듯이 입가를 비틀었다. 조금 전 성당 안뜰에서 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빅토르의 병원에 달려가 봉사할 듯이, 앞다투어 소피아의 입양을 주선할 듯이 떠들었지만, 내일이 되면 그들 중 누구도 마리아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을 위해 그런 허튼소리들을 내뱉은 것일까.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라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 중에서 -



가끔 어떤 사람, 어떤 일을 떠올리면 오싹해질 때가 있다.

전혀 고귀하지 않은 우리를 떠올리며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뒤덮는다.


힘든 계절을 살 듯 버티며, 흔들리며, 불편해하며 보낸 시간들을 떠올린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누군가' 또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가 싫어 누군가 꼭 내 옆자리에 있어줬으면 했던 학창 시절. 우리 셋은 늘 함께 했다. 그 존재만으로도 안도했던 시간 뒤엔 항상 '불안'이 따라다녔다. 셋 일 땐 '변치 않는 우리'라 떠들었지만, 둘일 땐 달랐다. 남은 하나는 다른 둘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도 서로를 믿지 않으면서 무엇을 위해 허튼소리들을 내뱉으며 함께 했던 것일까.


'열심히만 살면 되겠지'했던 사회 초년병 시절. 우린 동지였다. 서로를 격려하며 청년의 한 때를 함께 버텨내고자 했던 우린 늘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다. 연말 평가가 앞으로의 행방을 결정짓던 그때. 우린 서로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랬다. 우린 뭔가 달라져있었다.


'제법 철이 들고 너그러워졌다고 확신'하던 어른의 때. 각자가 짊어진 삶의 짐들을 풀어놓으며 우린 지속적으로 만났다. 비탈길을 걸을 땐 먼저 손을 내밀 것처럼, 서로가 갖지 못한 것들을 사려 깊게 헤아리며 나눌 것처럼 눈빛을 나눴다. 그렇게 섣부른 믿음을 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도 안 되는 그 잠깐 동안 뿐의 일이 되었다. 실수로 편 우산에 살짝 그의 눈가를 스쳤던 그때. 싸늘한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린 멀어졌다.

그때 그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면, 나의 작은 실수가 그를 스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의 우린 뭔가 달라졌을까.


그렇게 한 계절, 한 계절을 지냈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누군가로 인해 여분의 힘은 밑바닥까지 꺼져 버린다. 한톨도 남김없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린 그렇게 다시 살아낼 힘을 길어낸다.


그런가보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든다.

그 모두가 사람 사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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