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zypea Jul 22. 2020

5. 히어로보다는 조율자

2분기 마감을 끝내고 감사 시즌이다. 외부 회계 법인과 내부 감사팀이 함께 참여하여 재무제표에 보고된 사항들이 적합한 데이터나 소스에 기반하여 올바르게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이해하는 미팅을 갖는다. 


이주 전에 가진 첫 미팅은 내 업무와 관련되었지만 주제가 좀 포괄적이었다. 혹시 따로 준비해야 할 자료가 있나 싶어 미팅에서 논의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면 그에 맞게 자료를 준비하겠다고 메일을 보냈더니, 대략적인 질문 리스트가 왔다. 살펴보니 1번은 내가 준비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관건은 2번이었다. IT 시스템에 관한 것으로, 최근 바뀐 시스템에서 거래의 흐름을 이해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 부분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는 IT 팀장님이라면 이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미팅 스케줄을 포워드 하고, 현재 감사 중인데 미팅에 참여하여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바로 다음날 미팅이었음에도 그는 다행히 시간이 되니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준비하여 미팅에 참여하겠다고 답했다. 


다음 날이 되었고 미팅이 시작되었다. 2번에 관해 설명해 줄 IT 매니저를 미팅에 초대했다고 덧붙이고 간단히 1번의 질문부터 내가 준비한 파워포인트와 함께 설명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사실 그들이 궁금했던 핵심은 2번이었다. IT 매니저는 준비해온 슬라이드를 바탕으로 전문가답게 자세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을 하였다. 몇 가지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 오갔다. 30분의 짧은 미팅을 통해 1번과 2번에 대해 논의할 것은 다 논의한 후 미팅을 끝마쳤다. 꽤 깔끔한 미팅이었다. 나는 가끔 영어가 안될 때가 있는데 이날만큼은 영어도 술술 나왔다. 


회사일을 하면서 결국은 개인의 능력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하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분업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회사는 히어로 영화처럼 한 명이 또는 극 소수가 무적의 주인공이 되어 해결사를 자처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능력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건은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해결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줄 적절한 사람들을 정확히 알고 있는가, 그들을 무대로 올려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미팅 시간 내에 미해결 된 이슈에 대해 다음을 기약하며 오픈 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번 미팅은 손에 뽑을 만큼 만족스러운 미팅이었다. 나는 외부/내부 감사팀이 알고 싶어 하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었고, 정확히 누구를 컨택해야 하는지를 이전에 협업 경험을 통해 알고 그를 무대로 올렸다. 여기서 누가 더 설명을 잘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는 중요하지 않다. 주어진 시간, 30분 동안 모든 질문은 답을 찾거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원했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줄 사람을 초대하여 모든 과정이 스무스하게 넘어갔다는 이유로 나는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으로 그와 나의 좋은 팀워크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 대학원을 다닐 때부터 나는 사실 조별과제보다는 개인 과제를 훨씬 더 선호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조별로 과제를 할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무임승차자에 대한 이슈, 조별로 과제를 하면서 버리게 되는 시간, 그리고 A 결론이 맞는데도 토의하다 보면 서로의 의견에 맞추느라고 결론이 산으로 가는 경우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 개별로 하는 과제가 편하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협업은 다른 문제였다. 회사에는 신입부터 20년 경력자까지 다양한 인원들이 서로 다른 업무에 분포되어 있다. 즉 모두 같은 책을 펼치고 같은 강의를 들으며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조별과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회사에서의 직원들의 시작점은 모두 다르고, 그들의 경력과 백그라운드도 다르며, 각자 참여하는 프로젝트 역시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회사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자신도 없다. 나는 밤을 새워 공부해도 7년 동안 IT 일선에서, 고객과의 접점에서 일을 한 직원의 시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없으며 그들 역시 대학 때부터 숫자, 엑셀, 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다뤄온 나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협업해야 한다.  모든 것을 내가 다 알고 이해하여 컨트롤해야 한다는 것은 회사라는 시스템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혼자 반짝반짝 빛나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본 적도 있었으나 지금의 나의 목표는 다르다. 나와 단 한 번이라도 함께 업무를 한 사람들과 최대한 좋은 네트워크를 쌓아 필요할 때 내가 그들을 서포트하고 또 그들이 나를 서포트해주어 서로 윈윈 하는 최상의 결과를 만드는 일이 나의 목표가 되었고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얻는다. 그래서 크든 작든 어떤 프로젝트나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레이더를 돌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을 물색한다. 예상대로 프로젝트나 문제의 해결에 실마리를 얻는다면 이번 미팅처럼 꽤 만족스럽다. 


과거에 나는 사회 부적응자라고 생각했다. 주말에 참여해야 하는 등산이 싫었고, 회식이 싫었고, 내 일이 끝나면 칼퇴하고 싶은데 야근해야 하는 것이 싫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별로 사회생활할 줄 모르는 직원으로 찍혀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직원들이 캐주얼하게 모여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는 해피아워는 다소 부담스럽고 할 말도 잘 없긴 하다. 하지만 가장 개인적이면서 개별적이고 남의 사생활에 크게 관심도 없고 간섭도 받기 싫어하는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회사 안에서는 가장 협력적이 되었다. 나는 적응자인가 부적응자인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전 04화 4. 워크홀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