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아, 흥부네 집에 먹을 것이 부족하대. 이 문장과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은 뭐가 있을까?”
“네, 음... 흥부네 집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아니면 흥부가 쌀을 꾸러 갔습니다? 근데, 쌤, '꾸러'가 무슨 뜻이에요?”
“아, ‘꾸다’는 빌리다의 뜻이야. 쌀이 없어서 빌리러 간다는 거지.”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 않아요? 왜 굳이 빌려야 하죠?”
아이들의 순수한 질문들이 넘치는 이곳은 내가 운영하는 독서 센터다. 책을 통한 논술과 토론을 넘어서, 아이들에게 ‘바르게 읽기’부터 가르치는 ‘읽기 훈련 센터’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 과정은 단순히 글자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아닌, 글 속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느끼게 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아이들은 더 이상 단순히 책을 ‘읽는다’고 착각하지 않고, 진짜로 책을 이해하고 느끼게 된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때로는 유명한 문구가 떠오른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읽는 자는 삶을 두 번 산다.”
아이들이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이해하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가는 순간들을 지켜볼 때, 나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체감한다.
“흥부네 집에 쌀이 떨어졌다”라는 문장을 마치 쌀이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시우, 가난이란 단어가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뜻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윤후. 한 문단을 읽기도 전에 모르는 단어와 이해되지 않는 문장 구조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들. 이것이 요즘 독서 교육의 현실이다.
때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조지프 브로츠키의 말이 떠오른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만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아이들이 여러 매체와 디지털 환경에 밀려 경험하지 못하는 이 감정과 경험을 나는 그들의 책 속에서 찾아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독서 센터에서 아이들의 읽기 능력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려주는 ‘읽기 처방사’로서 매일 아이들과 함께 한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그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파악하며 이해하는 힘을 기른다.
하루는 아이들이 적어 내려간 문장을 읽다가 “4나흘”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
"채연아, ‘4나흘’이라고 썼는데, 이게 무슨 뜻이야?"
“사나흘이요. ‘사’ 자 대신에 숫자 4로 간단히 쓴 거예요.”
“그럼, 사나흘이 며칠이라고 생각해?”
“음, 당연히 4일이죠?”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중학생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채연이와 같은 답을 내놓는다.
나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너희가 이렇게 순수할 줄은 몰랐어! 세종대왕님께서 울고 가실 만하다. 그럼 닷새, 엿새는 뭘 뜻할까?”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쌤, 닷새? 엿새가 뭐예요?”
이런 순간이야말로 ‘읽기 처방사’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옛말의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한다. “자,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그리고 열흘까지 이어진단다.”
아이들은 여전히 의아해하며 “그럼 앞으로는 4일이 아니라 나흘이라고 써야겠네요?”
"사나흘은 3,4일이고, 그렇지?"라며 배움을 익히기 시작한다.
인도 철학자 타고르의 말이 떠오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배우는 것이며,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작고도 중요한 순간들이 쌓여 아이들이 점점 성장해 가는 것을 볼 때, 나는 이 말의 의미를 깊이 느낀다. 아이들이 책을 바르게 읽고,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나에게도 배움이자 큰 기쁨이다. 읽기 처방사로서 매일 만나는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작은 이야기꾼들이다. 나는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읽기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