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
넷플릭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의 장면을 몇 개 살펴보고 있습니다.
키미는 15살에 미친 교주에게 납치되어 벙커에서 15년을 보냈습니다. 자기 인생만큼의 시간을 벙커 속에 감금된 채 보낸 것이죠. 나이 서른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키미는 지나간 시간을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 꾸역꾸역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태도가 키미의 마음을 갉아먹기도 합니다. 키미는 조금씩 깨닫습니다. 자기에게 욕망을 삼키는 습관이 있다는 것, 그 습관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다는 것. 카운셀러인 안드레아와의 상담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엄마와의 관계를 제대로 매듭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키미는 엄마를 찾아 나섭니다. 엄마에게 제 때 표현하지 못했던 분노를 표현하고 엄마에게 확실히 사과를 받겠다고 다짐합니다. 키미는 롤러 코스터 중독자인 엄마를 만나기 위해 놀이동산으로 향합니다.
놀이동산에서 엄마를 찾아낸 키미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려 하지만, 키미가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엄마는 키미를 끌어 안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붓죠. 엄마는 키미가 꼭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하지만, 키미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15년동안 감금되었던 벙커에서 키미가 구출되었을 때 엄마는 이미 그 곳을 떠난 뒤였으니까요.
하지만 엄마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동정어린 눈빛을 견디기 어려웠던 겁니다. 사람들 나름의 배려였을지 몰라도, 엄마에게는 그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키미는 사람들의 그 눈빛을 견디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키미가 15년동안 벙커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도 늘 그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봤으니까요.
키미는 엄마가 느꼈을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준비해 온 말은 접어두고, 엄마과 함께 놀이동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보상 받는 기분으로 순간을 즐깁니다. 하지만 즐거움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볼풀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키미에게 엄마는 서두르라고 말합니다. 롤러코스터 타러 갈 시간이 촉박하니 지금 당장 가야 한다는 거죠. 얼른 서두르라고 키미를 내내 재촉하던 엄마는, 결국 운동화끈을 묶는 키미를 내버려둔 채 먼저 떠나갑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먼저 가 버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키미는 결국 폭발합니다.
키미는 엄마를 쫓아가 롤러코스터 옆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원래 하려고 했던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엄마는 나를 끝까지 찾았어야지. 잠깐 찾는 게 아니라 찾을 때까지 계속 열심히 찾았어야지. 원치 않던 아이가 실종되어서 속으로는 내심 좋았던 거 아냐?
나는 엄마가 정말 너무 미워. 나는 그럴 자격 있어.
두 사람은 한 번 더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이번에는 엄마가 자기의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널 가졌을 때 나는 17살이었어. 당연히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
그래도 널 낳았어. 그리고 그 순간부터 너를 정말 사랑했다구.
미친놈 하나가 갑자기 널 납치해 간 거야. 그게 내 잘못이니?
롤러 코스터에서 내려온 키미는 화를 냅니다.
운동화 끈을 묶는 것도 안 가르쳐줬으면서 어떻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어? 신발 찍찍이에 장갑이 붙어서 그거 때문에 혼자 남겨졌고, 결국엔 그래서 납치된 거야. 엄마 때문에 납치된 거라구.
그런데 이건 키미의 상상 속에서의 외침이었습니다. 키미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 현재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깨달음 덕분일까요? 키미의 표정이 한결 밝아 보입니다.
사실, 사건만 두고 보면 특별하게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키미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하면 엄마가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엄마 마음 속에 맺혀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어떤 합의점에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각자가 겪어온 고통을 확인했을 뿐이죠.
그렇다고 해서 둘의 대화가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렇게 쌓여 있던 감정을 발산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새로운 생각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상상 속에서나마 엄마에 대한 미움을 털어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화되지 못한 감정으로 마음 속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힘들 테니까요.
한결 가벼워진 키미는 엄마를 바라봅니다. 엄마는 들뜬 표정으로 다음 약속을 잡으려고 하죠. 키미는 수다스럽게 이야기하는 엄마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옛 감정에 얽매여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엄마의 모습이 보입니다. 키미는 미소를 머금고 엄마에게 왜 그렇게 롤러 코스터를 좋아하냐고 묻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죠.
가끔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싶을 때 있잖아.
롤러 코스터에서 그러면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보거든.
적절한 거리감을 두고 보니, [엄마]라는 커다란 이름표에 가려진 한 사람이 보입니다.
우리는 모성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접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경이롭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알게 모르게 그 거대함이 짓눌러 온 개인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키미의 엄마인 로리 앤 슈미트도 그런 개인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이 보기에는, 그리고 키미가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엄마였지만 로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키미는 엄마가 준 상처에 대해 원망을 표현했습니다. 로리는 자기가 다 잘못했다며 그 원망에 수긍하는 대신, 자기 마음에 있는 상처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로리 마음 속에 있는 상처는 키미가 준 것이 아닙니다. 당시 키미는 그저 어린아이였을 뿐이니까요. 그래서 로리가 키미를 상대로 자신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엄마]라는 이름표가 너무 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 역시 한 명의 사람일 뿐입니다. [엄마] 역시 완벽하지 않고, 단점을 가졌으며, 지금 이 순간을 처음 사는, 그래서 허둥지둥 할 수밖에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이 한 명을 온전히 길러내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하죠. [엄마]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주고, [엄마] 혼자 해낼 수 없는 부분을 사회가 도와주는 대신에, [모성애]라는 마법의 주문을 사용해서 [엄마]를 지나치게 높은 위치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닌지. '그거 진짜 굉장하고 특별한 거니까 네가 다 감당해야 해' 라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며 [엄마]가 된 연약한 개인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키미는 엄마가 만들어 준 쿠폰북을 보면서 조용히 말합니다.
엄마 고마워요.
키미의 엄마는 세상의 기준에서 완벽한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완벽한 엄마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키미의 엄마는 서투르지만 최선을 다해 키미를 키웠습니다. 키미의 고맙다는 말 역시 완벽한 엄마가 되어준 것에 대한 인사라기보다는 힘든 상황에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준 것에 대한 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키미는 자신의 과거와, 그리고 엄마와 화해합니다.
저는 내면에 상처를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것을 치유해나가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 인물들을 보면 무작정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그렇게 응원하다 보면 왠지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에서도 그런 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